제21화
이준은 느지막하게 학교 식당으로 갔다.
그래도 꽤 많은 학생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낙오자, 아니 이준 선배다.”
“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폭군 선배를 이겼지?”
“일진 선배들도 당했데.”
이준에 대한 관심이 꺼질 법도 하지만, 관심은 식지 않았다.
폭군 이기홍의 랭킹은 50위.
그를 이긴 이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남학생들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를 탐색했다.
신흥강자의 등장.
위로 올라가려면 제쳐야할 인원이 한 명 더 생겼다는 소리였다.
하위 랭킹에 위치한 이들에겐 안 좋은 소식이었다.
“이준 선배니이임. 여기 자리 비었어요.”
같이 하교 했던 여후배 무리가 손을 들어 이준을 불렀다.
[무릇 남자란 무심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여자의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 풍류를 아는 이 스승의 말을 한 번….]
‘음. 그렇군요.’
구시대의 연애 강의를 경청했다.
“얼른 오세요. 밥 다 식겠어요.”
“혼자 먹을 뻔했는데, 다행이다.”
“선배님 인기 많지 않아요? 같이 먹으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인기 없어.”
1학년 여자 후배들이 믿기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 치지 마세요.”
“진짜야. 그러니까 밥 먹으러 혼자 오지.”
이준은 요즘 들어 자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 환골탈태를 통해 외모까지 상향된 이후로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건 사실.
하나 있는 친구는 학교에 아직 안 나왔다.
녀석이 나오기 전까지는 혼자였다.
딱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귀찮았다.
이준이 밥을 먹으면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주변의 시선도 식판을 들고 오는 이에게 향해 있었다.
재밌게 이야기하다 마는 여 후배를 보고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이준은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체하겠다.’
한지유였다.
“내가 이준이랑 같이 밥을 먹고 싶은데?”
“그, 그러세요.”
여후배들이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순간에 텅 비어 버린 테이블.
한지유가 이준의 앞에 앉았다.
“지유 선배랑도 친해?”
“요즘 지유 선배가 이준 선배를 죽어라 따라다닌다고 하더라.”
“진짜?”
“그렇다니깐 우리 언니가 그랬어.”
“정보원들 바빠지겠구만.”
이름에 무게 있는 학생들은 하나하나가 정보였다.
특히 한지유는 더 특별했다.
신기지가의 무공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천재.
그녀가 성인이 됐을 때는 신기지기가 한 번 더 도약할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다 맞는 소리.
전생에도 그녀 때문에 신기지가가 정말로 강해졌다.
그녀는 신기지가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신기지가의 비선은 그녀의 정보를 철저하게 숨겼다.
학교를 1년이나 다녔지만, B급에 올라섰다는 소문과 칠현검법을 익히고 있단 사실 말고는 알려진 게 없었다.
모두 베일에 쌓인 한지유였지만 이준은 그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애들은 괜히 왜 쫓아. 같이 먹지.”
“여러 명이 먹으면 불편해.”
“저기요? 난 네가 더 불편하거든요?”
피자를 먹은 이후부터일까.
자신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은 한지유였다.
젓가락을 움직이며 반찬을 집어 먹는데, 간간히 느껴지는 시선.
“밥 안 먹냐?”
“관찰 중이야.”
태연하게 말하는 한지유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얘 4차원이었지?’
사람들은 모른다.
차갑고 도도한 얼굴.
하지만 성격은 아주 골 때렸다.
한지유가 말을 안 해서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무시하자.’
그녀에게 신경을 끄고 밥 먹는데 집중했다.
* * *
신력권가의 회복실.
방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스탠드 조명이며, 집기며 바닥은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했다.
“아아악!”
이기홍이 악을 지르며 소리쳤다.
분한 마음에 주먹으로 벽을 치기도 했다.
전이었다면 단 한방에 벽을 무너트릴 수 있었는데, 단전이 사라지니 주먹에 상처가 났다.
“이준 이 개새끼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말겠어어어!”
“도련님 진정하시지요.”
“꺼져!”
“어이쿠.”
할아버지뻘이나 되는 집사가 이기홍에 밀려 뒤로 넘어져 버렸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단전이 깨졌는데 진정하게 생겼냐고 어? 네가 대신 죽을래? 어!?”
이기홍이 발로 집사를 찼다.
엎어져 있는 집사는 이기홍의 발길질을 맞기만 했다.
이기홍이 눈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실핏줄이 터졌다.
혈안이 된 그의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어. 죽어어어. 죽어 버리라고오오오.”
퍽퍽퍽.
이기홍이 집사를 거의 죽이려고 할 때쯤, 회복실로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안의 꼬라지를 보고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진정하거라.”
“아버지….”
남자는 이기홍의 어깨를 붙잡고 토닥였다.
그는 이기홍의 아버지 패력진권 이민욱이었다. 집사가 다치든 말든 이민욱의 신경은 온통 아들에게만 있었다.
“걱정 말거라. 이 아비가 누구냐. 네 단전을 꼭 고쳐 주마.”
“가능할까요?”
난폭한 행동만 일삼던 이기홍이지만, 아버지 앞에선 순한 양이 되었다.
“암. 되고말고. 네가 이리 되었단 소식을 듣고 모든 정보를 동원해 널 회복시킬 수 있는 영약을 찾았다.”
“저, 정말이에요?”
이기홍의 눈이 커졌다.
단전을 회복할 수 있는 영악은 아직 정보가 없었다.
억만금으로도 구할 수 없는 물건.
그런 걸 찾았다고 하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불의 돌이라고 굉장한 화기를 지닌 영약이 있어. 그걸 먹는다면 단전이 금방 복구될 수 있다는구나.”
“진짜죠? 저 위로하려고 하는 말 아니죠?”
“아들한테 거짓말을 하겠느냐.”
“아버지!”
덩치가 산만 한 이기홍이 이민욱에게 안겼다.
조금 전까지 집사를 폭행하던 폭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철없고 여린 고등학생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단 고통은 각오해야 된다.”
“이를 말입니까. 단전만 회복할 수 있다면 그깟 고통은 참을 수 있어요.”
이민욱이 대견하다는 듯 이기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눈은 덤이었다.
망나니를 두고도 나무라지 않고 감싸기만 하니, 이기홍의 성격이 개 같았다.
다 이민욱이 자처한 꼴. 자기 아들이니 그의 눈엔 예뻐 보이기만 했다.
“곧 투신단을 투입할 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내 하나뿐인 아들인데 당연하지.”
이민욱은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이를 잔뜩 갈고 있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한테 고통을 준 걸 후회하게 해주마. 천한 놈.’
아들을 토닥이곤 몸을 돌렸다.
“또 오마. 몸조리 잘하거라.”
밖으로 나온 이민욱이 수하를 불렀다.
“무영.”
“부르셨습니까.”
“김태형에게 이번 일도 실수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전해.”
“그리 전하겠습니다.”
“투신단에겐 놈의 목을 확실히 끊어놓으라고 말하고.”
“예!”
무영이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명령을 내리고 나니 이민욱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준이 아들을 어떻게 이긴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준은 게이트 밖으로 나오지 못하리란 걸.
그 안에서 서서히 고통을 느끼며 죽을 것이다.
“어디서 벌레만도 못한 것이 태어나서는.”
* * *
오후 수업이 끝났다.
“일주일 뒤 실습 일정이 잡혔다.”
“쌔앰. 그걸 마지막에 말하기 있기에요.”
김태형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몰래 튀는 녀석이 있을까 봐 그랬다.”
“장소는 정해졌어요?”
“미궁 보물 창고, 샥의 해변, 그리고….”
그가 뜸을 들이자.
“아아, 빨리 말해 주세요.”
“궁금해 죽겠어요.”
학생들이 답답해 죽으려는 표정을 지은 채 재촉했다.
“염화의 동굴이다.”
“난 무조건 그린 존 급 게이트에 갈 거야!”
“내가 먼저야.”
앞서 말한 두 개의 게이트도 그린 존 급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주변 환경이 다르다는 것.
비나, 눈, 모래바람, 천둥, 번개, 용암.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곳은 같은 등급이라도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 곳이 염화의 동굴이었다.
5반은 F, E급만 모여 있는 반.
그들이 언제 염화의 동굴 같은 곳에 들어가겠는가.
인솔자까지 있으니 이번 기회에 가 보려는 것이다.
“갈 수 있는 정원은 열 명이지만, 이준은 필수 참가니 나머지 인원은 너희끼리 이야기 잘 나누고 정하길 바란다.”
김태형이 슬쩍 이준에게 곁눈질을 하다가 나가 버렸다.
이준도 그의 눈빛을 느꼈다.
‘염화의 동굴로 가려 했는데, 마침 잘 됐어.’
불 속성을 지닌 파랑이에게 꼭 필요한 영약이 있는 장소였다.
이준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 기숙사로 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한지유를 보며 말했다.
“할 말 있어?”
“칠절참흔으로 어떻게 그런 위력을 낸 거야?”
“음.”
“삼재심법 말고 다른 걸 익혔던 거야?”
이준은 그녀에게 대답해 주고 싶어도 못 했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 때문.
한지유의 친위부대가 자신을 노려봤다.
소위 팬클럽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이 자신을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지유에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나 암살당하면 책임질 거야?”
“내가 왜?”
“저기 네 친위부대가 날 죽이려고 하잖아.”
이준과 한지유가 수시로 붙어 다닌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친위부대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이준을 감시했다.
“쟤들하고 난 상관없어.”
“저놈들은 아닌 것 같아서. 너랑 계속 말했다간 진짜 암살당할지 모르겠다. 난 이만 간다.”
* * *
이준은 빠르게 기숙사로 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그러다 침대 머리맡 아래로 얼굴을 내밀었다.
“잘 있었어?”
“뀨우.”
파랑이가 힘이 없어 보였다.
귀엽게 빨빨 돌아다녔던 녀석이 쿠션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상태창을 열어도 그저 잠자고 싶다고는 메시지만 쓰여 있었다.
“사부님. 파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픈 구석은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긴 하구나.]
“뭐가 문제일까요?”
사료를 불려서도 줘 봤다.
그럼에도 좋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문제라도 알면 좋으련만.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혹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냐?]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환경이 변해서 그런 걸 수 있단 생각해 곧바로 게이트를 소환했다.
지잉-
포탈이 열리자, 이준이 파랑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파랑이를 오아시스 옆 그늘진 나무 밑에 내려놨다.
“푹 쉬고 있어.”
“뀨우….”
이준이 파랑이를 놔두고 포탈에서 나왔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준을 향해 무극자가 말했다.
[경과를 지켜보자꾸나.]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준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파랑이가 있는 게이트로 들어왔다.
“뀨우….”
아직도 자는 파랑이의 모습.
변한 게 없었다.
[하루밖에 안 지났다. 더 지켜보자꾸나.]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못해 돌아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벌써 일주일이 더 지났다.
파랑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가 됐다.
[게이트의 상태가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구나.]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원래 청호 보금자리 게이트는 마기가 상당히 짙었느니라. 하지만 네가 흡혈마공으로 흡수한 덕에 바깥 환경과 똑같아졌지. 바깥과 게이트 안의 환경이 다를 바 없으니 상태가 더 악화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구나.]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마기가 전혀 없는 게이트.
그리고 게이트 밖.
공간만 다를 뿐 환경은 같았다.
혹시나란 생각에 마지막으로 파랑이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열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