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한지유가 긴 다리로 이준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가 이준이니?”
“어.”
“나도 5반에 배정받았어.”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래가 바뀌었어.’
전생에 한지유는 엘리트반인 1반에 속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다.
자신이 강해지기 위해 선택한 청호 보금자리. 이 때문에 신기지가의 관심을 끌고 만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괜찮아.’
아주 작은 변수가 생긴 거지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미래가 변한다 해도 상관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만큼 강해지면 그만이니까.
그저 강해지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한지유는 경계할 대상이긴 했다.
“잘 지내 보자.”
한지유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왜 하필 얘야.’
사람들은 한지유의 미모만 주목했지만, 이준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외모보다 더 뛰어난 건 검술이다. 차가운 마음을 가져서 빙화로 불릴 뿐이지.
검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여기에 무자비한 손속까지.
감정이라는 게 있는지 모를 만큼 냉혹했다.
‘얘랑 엮이면 피 보는데.’
독종일 정도로 집요하기까지 했다.
제일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이준은 한지유의 악수를 거절하며 말했다.
“난 친구 안 사귀니까 투명 인간 취급해.”
슬쩍 한지유를 봤는데, 섬뜩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에 미세한 살기까지 띠었다.
‘저 봐. 웃는데 살기가 보이는 건 뭐냐고. 쟤 정말 위험해.’
이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학생들은 한지유의 미소를 보고 그저 탄성을 내었다.
“와, 저게 사람 얼굴이냐.”
“손 한번만 잡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준은 좋겠다. 빙화랑도 엮이고.”
“젠장. 나란 놈은 꼬추 밭에나 있고. 에휴.”
“이하동문이다. 새꺄.”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지유가 옆에 있는 책상을 가져와 이준의 책상 옆에 붙이는 게 아닌가.
“헐.”
“진심이야?”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남학생들은 자신들의 피부를 꼬집으며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했다.
“존나 부럽다.”
“야야. 형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부러워하지 마.”
한지유에게 찝쩍대는 학생들은 많았다.
제일 유명한 사람은 권룡.
이준의 이복형이기도 했다.
현재는 폐관수련 중이라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당장 수련을 때려치우고 나올지 모른다.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이 앉으려고?”
“그러면 안 돼?”
시비를 거는 어조도 아니고, 호의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아이가 제일 피곤한 성격이다.]
‘인정합니다.’
이래서 피하고 싶었다.
시비를 털기라도 하면 적당히 손을 봐줘 관심을 끊게 만들면 그만.
그저 옆자리에 앉겠다는 애를 때릴 순 없었다.
“꼭 옆에 앉아야 해?”
“어.”
그녀의 눈빛은 확고했다.
자신이 거절한다 해도 들어줄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탄했던 학교 생활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피곤한 건 덤.
한지유가 옆자리에 앉자, 곧이어 역사 선생이 교실로 들어와 수업을 시작했다.
* * *
이준은 수업을 집중할 수 없었다.
옆에 한지유가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살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기 때문.
사부의 음성이 도중에 들리지 않았다면 심신미약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지금 세력 판도가 어떠하냐?]
‘갑자기 세력판도는 왜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제자야.]
한지유의 살기를 피했더니, 이젠 사부의 목소리가 서슬 퍼랬다.
‘15가문연맹, 무맹, 사마련이 있습니다.’
[구파일방하고 오대세가가 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말해 보거라.]
‘그들이 15가문연맹인데 세력의 힘은 모두 비슷해요.’
[제갈가의 무공을 이은 신기지가란 곳도 말이냐?]
‘네.’
[순수 무력으로 세력을 유지한 건 아닐 터, 녀석들이 이곳에서 인재를 끌어 모으거나 하지 않느냐?]
짝!
이준이 손뼉을 쳤다.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수업을 하던 역사 선생과 학생들이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이준이 고개를 숙였다.
한지유가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을 무시했다.
괜히 쳐다봤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갈세가는 무공이 약해 인재를 끌어 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한데 이곳도 마찬가지구나. 아마 널 관찰하려는 것도 스카웃을 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것일 게다.]
인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신기지가였다.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좋았다.
자신의 값어치가 올라가면 신력권가의 안목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터.
명예가 추락할 거다.
하필 자신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붙인 사람이 한지유라는 게 미스다.
‘그래서 저 무서운 여자가 저한테 붙은 거라는 말이에요?’
[예정되었던 일이다. 저들을 어떻게 써먹을지나 궁리나 하거라.]
‘엮이고 싶진 않지만… 다른 가문보단 차라리 저들이 낫긴 하죠.’
적어도 신기지가는 새로운 이세계 게이트가 열렸을 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
그 하나만으로 이들과 동맹을 하기엔 충분했다.
‘고민 좀 해 봐야겠어.’
오전 수업이 끝나기 5분 전이 되었다.
무림 사관 고등학교도 일반고와 다를 바 없이 점심 전쟁이 시작되었다.
띵동댕동~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교실문 밖으로 총알같이 뛰어나갔다.
심지어 경공까지 사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애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교실엔 이준과 한지유만 남았다.
“밥 먹으러 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찰랑이는 머리에서 향기가 났다.
그 향기가 이준의 코로 흘러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급히 혼원신공을 돌려 들끓는 내기를 잠재웠다.
쿵쾅대는 심장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준이 얼굴이 평온하자 한지유의 눈가 근육이 꿈틀거렸다.
‘날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해.’
한지유는 태어나면서 신비한 힘을 타고 났다. 그건 바로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무공인 미혼술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을 따르게 만든 기술.
하나, 이준에겐 그런 마력이 통하지 않은 듯싶었다.
“어. 넌?”
이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은 메아리였다.
그녀의 습관 중 하나. 제 할 말만 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빙화란 별명이 붙여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녀를 잘 아는지라 이준도 대답을 듣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한지유가 고개를 돌려 뒷문을 주시했다.
‘이준. 재밌어. 작은 아버지 말이 아니었더라도 오길 잘했어.’
남자라면 자신을 절대 거부할 수 없다.
오늘 처음으로 평온한 남자의 얼굴을 봤다. 왠지 모를 패배감을 맛봤으나,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미소가 아닌,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 * *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준이 이번에 듣게 될 과목은 검법 수업이었다.
전 시간과는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피 말려 죽이려는 심산인가.’
이준은 그 원인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한지유가 수업에 참가했다.
학교 랭킹 10위는 굳이 학교의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가문의 무공보다 하위 무공을 배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곳에 빙화가 나타났으니, 시장통이 될 수밖에.
“모두 조용!”
검법 수업의 선생인 박재민이 내공을 담아 말했다.
그는 철혈검가에서 파견 나온 검술 선생이었다.
별호는 참혼검. 학교에 무공을 기부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가진 무공은 칠절참흔으로 일곱 번의 참혹할 흉터를 만드는 검법을 사용한다.
한민성 이사장을 제외하곤 학교에서 제일 강한 각성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 한 마디에 훈련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칠절참혼의 형은 외웠느냐?”
“예!”
“저녁에도 죽어라 연습했어요.”
“잘했다.”
냉막한 인상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칭찬을 많이 하는 박재민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새로운 학생도 왔겠다, 1:1 비무 수업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나?”
“오오!”
“좋아요.”
“저두요.”
“빙화 앞에서 내 실력을 보여주겠어!”
박재민은 실전을 중요시했다.
비무만큼 실전에 가까운 훈련은 없었다.
학교 무공인 칠절참혼의 형식을 익히면 곧바로 비무 수업을 진행하는 게 그의 방식.
이번 학기도 어김없었다.
“누구부터 할 테냐. 승자에겐 가산점을 부여하겠다. 알다시피 제일 좋은 성적으로 수업을 이수한 사람에겐 철혈검가의 스카웃을 받을 거다.”
학교의 무공을 열심히 익히려는 학생들은 모두가 일반 각성자 출신이다.
15가문 연맹에서 스카웃 제의가 오는 건 엄청난 일.
일반 각성자지만, 추후에는 가문의 무공도 배울 자격이 주어질 수도 있었다.
“내가 1등하고 말겠어.”
“야야. 한지유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1등 하겠냐.”
“설마 가문의 검법도 있으면서 칠절참흔을 탐내겠어?”
“하긴. 아무리 신기지가가 무력이 약해도 칠절참흔보단 좋은 검법이 있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학생들이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먼저 할 사람 없나?”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좋다. 상대는 네가 지목하도록.”
당당하게 앞으로 나온 남학생이 자신보다 실력이 안 좋은 친구를 골랐다.
진검을 꺼낸 두 명의 남학생.
칠절참혼의 기수식을 동시에 취했다.
서로 탐색전을 펼치다가 동시에 앞으로 뛰어들었다.
까앙!
* * *
비무는 계속 되었다.
한 명이 승리하면 다른 한 명은 패배했다.
방식은 토너먼트식.
이긴 사람이 올라온 사람을 선택했다.
학생들의 전적은 1승 1패.
잘하면 2승1패, 3승의 고지를 밟은 사람은 전무했다.
아니, 딱 두 사람.
이준과 한지유만이 전승을 했다.
이준은 수업에서 배운 칠절참흔으로, 한지유는 신기지가의 무공인 칠현검법으로.
“한지유는 그렇다 치고 이준은 우리랑 같은 칠절참흔 아니야?”
“우리랑 배운 시간도 같은데 존나 잘하네.”
“이미 검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쓰잖아.”
지금과 같이 말이다.
채쟁챙챙-
이준을 상대하고 있는 남학생은 이를 악물고 공격했다.
하지만 이준은 이미 경로를 알고 있는 듯 공격을 모두 막았다.
오직 방어만 하는 이준.
마치 검법을 하나하나 분해하려는 듯, 유심히 관찰하며 상대했다.
‘쉽네.’
눈에 상대의 검로가 너무도 잘 보였다. 느리기보단,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미래가 보인달까.
흥이 났다.
이 비무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할지 알아보고 싶었다.
“좀 그만 막아!”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을까.
상대의 검에 내공이 잔뜩 실려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색 광채.
“검기야!”
아직 미완의 검기가 이준에게 반월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저 멀리서 쏘아낸 것도 아닌, 지척에서 짓이겨왔다.
이준은 목 부위로 날아오는 검기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피할까? 아니면 막아? 그도 아니면….’
그 짧은 찰나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때 이준의 눈에 잡힌 한지유의 얼굴. 너는 이걸 어떻게 막을 거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