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가족의 탄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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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3화 가족의 탄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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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3화 가족의 탄생 (3)
2023.06.21.
한 달 전, 수녀원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쇠약해진 전 황후, 밀리아가 얼마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전보였다.
나와 나타니엘은 이 사실을 아나이스와 헨리에게 전할지 고민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밀리아의 현 상황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녀를 만날지 안 만날지 결정하는 건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5년 전, 나타니엘과 함께 헨리의 데뷔 무대를 본 적이 있었다.
제법 소년티가 나는 헨리의 연주에 나타니엘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걸 보기도 했다.
“기대돼요?”
“그래.”
나타니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였다.
쪽, 하는 남사스러운 소리가 뺨에서 났다.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는 붙잡을 틈도 없이 후다닥 멀어졌다.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뺨을 문질렀다.
* * *
나와 나타니엘은 접견실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먼저 나가 보면 안 돼요?”
“체이든. 보채지 않기로 약속했잖니.”
내 말에 체이든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나타니엘과 쏙 닮았는지 괜히 나타니엘에게 짜증이 났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공연히 미움을 산 나타니엘은 당황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왜 갑자기 날 노려보는 건데.”
“몰라서 물어요?”
나타니엘은 한숨을 쉬며 체이든을 내려다보았다.
제이나의 말을 듣고 조용해졌지만, 얼굴에 삐진 티가 역력했다.
“체이든, 아빠가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나타니엘의 말에 체이든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저 아무 표정도 안 지었어요.”
“체이든.”
나타니엘의 채근에 아이의 양어깨가 축 늘어졌다.
체이든은 얌전히 앉아서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이드랑 레일라가 형이나 누나가 된다고 그랬어요.”
“잘 아는구나.”
“저 진짜 안 그랬어요.”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나타니엘이 아이를 번쩍 안아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체이든이 엄마랑 약속 안 지킨 건데, 왜 삐졌을까?”
“아, 안 삐졌어요. 그냥, 동생을 빨리 보고 싶어서…….”
난 그런 체이든이 가엽게 느껴졌다.
내가 저런 얼굴에 약한 건 모두 나타니엘 탓이다.
나타니엘이 가끔 저런 표정을 지으면 나도 모르게 화가 누그러진다니까.
“앞으로 또 그러면 정말 체이든이 막내가 되는 거야.”
“네…….”
조금 누그러진 내 반응에 체이든은 나타니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나타니엘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체이든, 아빠 무릎 위에서 동생을 만날 거니?”
내가 부드럽게 달래자 체이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후다닥 무릎 위에서 내려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손바닥으로 옷을 탁탁 쳐서 반듯하게 펴고, 아까 전에 울먹거리던 모습은 싹 지운 채로 반듯한 표정이었다.
난 어이가 없었지만, 동생에게 위엄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체이든을 생각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폐하, 공국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나타니엘의 명에 문이 열렸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 * *
밀리아는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황성에서 쫓겨난 지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자신이 끝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던 삶.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아이.”
헨리를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어미가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변질되어 버렸다.
어린 나이에 헤어져서 이 어미의 모습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닐까.
“괘씸한 것들. 감히 천륜을 끊어내려 해?”
그녀는 아직도 나타니엘을 원망했다. 어떤 날은 자신을 배신한 황제를 욕했고, 어떤 날은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많이 욕한 사람은 제이나였다.
“그 애가 나타나고 나서 모든 게 어그러졌어.”
제이나가 자신과 헨리의 미래를 망쳐 버렸다는 망상이 밀리아를 잠식했다.
그때, 끼이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밀리아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
밀리아의 눈은 흐리멍덩하니 빛을 잃었다.
그동안 너무 울어서 시력이 낮아진 것이다.
정확한 형태를 보지 못하고 색 정도만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인 금발의 훤칠한 키의 남자.
밀리아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헤, 헨리?”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니.”
“오, 오오…….”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녀는 헨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서 이 어미에게 얼굴을 좀 보여 주세요.”
하지만 그 그림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헨리, 헨리!”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여기에 있으니까요.”
“이 어미가 그립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겁니까?”
“그리워요? 제가요?”
헨리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 헨리?”
“어머니께서 저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잊으셨나 봅니다.”
헨리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학대당하던 시절의 꿈을 꾸곤 했다.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전부 널 위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전부 본인의 욕심이었으면서. 당신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한 번도 물은 적 없지 않습니까?”
헨리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막상 어머니를 마주하게 되자 학습된 공포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버텨 내야 했다.
“오늘 여기 온 건 당신을 향한 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날 낳았지만, 내 가족은 아니야.”
밀리아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했다.
“헤, 헨리 어째서 그런 말을…….”
“그냥 당신의 만족을 위해 날 휘두르려고만 했을 뿐.”
“아, 아니야.”
“당신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주먹을 꽉 쥔 헨리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마치 어두웠던 과거와 멀어지는 것 같았다.
* * *
“폐하, 밀리아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마틴의 말에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나이스는 어머니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이제 그녀에게 밀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오래도 살았군.”
“뭐, 그래도 황후 출신이었으니 기본 이상의 생활은 보장했을 테니까요.”
마틴은 그녀의 유품으로 남은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전부 헨리 님에게 남긴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헨리가 거절할 테니 전부 알아서 처분해.”
얼마 전 헨리는 밀리아를 따로 만나고 왔다.
돌아온 헨리는 시원섭섭한 표정이었다. 잠깐 울 것 같았지만, 이내 참아 내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늘 어리기만 했던 동생이 어느새 훌쩍 커버려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다.
‘체이든이 다 자라면 이런 마음일까.’
그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형님, 형님 하며 쫓아다니던 귀여운 헨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리고 이거.”
나타니엘은 마틴이 건네준 편지를 뜯어 보았다.
밀리아가 남긴 유서에는 나타니엘을 저주하는 말이 가득했다.
[당신은 괴물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모습을 숨기고 산다 해도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당신 어머니도 받아들이지 못한…….]
나타니엘은 무표정으로 그 내용을 반쯤 읽고는 망설임 없이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감사합니다!”
마틴은 나타니엘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다시 붙잡기 미안할 정도였다.
나타니엘은 집무실을 빠져나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제이나가 시간을 들여 성을 전부 뜯어고친 덕에 아버지가 비극을 맞이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그 사건이 나타니엘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이나와 아이들 덕분에 그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다.
“아버지!”
“레일라?”
나타니엘은 뽀르르 달려와 폭 안기는 작은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레일라는 그가 바라던 대로 제이나를 쏙 빼다 닮았다.
은발에 가까운 연한 금발, 한여름의 녹음을 담은 것 같은 녹색 눈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니.”
“로이드가 자꾸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러잖아요. 아빠가 혼내 주세요.”
“로이드가?”
“엠버도 있는데 창피하게, 씨.”
분했는지 뺨까지 부풀리며 씩씩거리는 모습에 나타니엘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엠버는 막시밀리안과 테레사의 둘째 아이였다.
레일라보다 한 살 어려서 그런지 둘은 쿵짝이 잘 맞았다.
“윈터스 공작도 왔나 보구나.”
“공작 부인이랑 키이스도 왔어요!”
윈터스 공작의 첫째 아들인 키이스까지 왔으니 아이 하나가 사라져도 모를 법도 했다.
나타니엘은 레일라를 안은 채로 황후궁으로 향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후원 쪽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나타니엘은 응접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후원으로 돌렸다.
레일라는 나타니엘의 목을 꼭 끌어안고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헨리 삼촌이 피아노를 쳤는데 진짜 멋있었어요. 맨날 침대 위에 축 늘어져만 있었는데, 꼭 다른 사람 같았어요!”
“그래?”
“네! 레일라도 피아노 배울래요.”
“일단 어머니에게 말해 보자.”
“힝, 지금 배우고 싶은데…….”
레일라는 뭐든 금방 질려서 그만두곤 했다.
그래서 이런 일은 꼭 제이나의 승인이 필요했다.
나타니엘은 칭얼대는 레일라를 달래 주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또 뭐 하고 놀았니?”
“으음…… 참! 아까 헨리 삼촌이 카시안 이모한테 고백했어요.”
레일라의 폭탄 발언에 나타니엘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버지의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일라는 말을 이어 갔다.
“공작 부인이 놀라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니까요. 어머니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면서 자리를 피하고요.”
“하, 하하.”
나타니엘은 어린 헨리가 카시안과 결혼하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설마 진짜일 줄이야.
게다가 공교롭게도 카시안은 아직 미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알아봐야겠군.’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을 제이나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웃음소리가 가까웠다.
장미 넝쿨이 올라가 있는 파고라 밑,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나이스, 그런 아나이스의 주변에 모여 있는 테레사와 카시안.
살짝 떨어진 곳에서 속닥거리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닮은 아이들이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렇게 평화로운 장면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기묘한 이질감이 나타니엘의 발을 묶었다.
“아빠?”
레일라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멈춰 선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때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일라, 레일라!”
레일라를 찾던 그녀가 레일라를 안고 있는 나타니엘에게 달려왔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해야지.”
“죄송해요.”
제이나는 레일라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제이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서 가요, 나타니엘.”
“응.”
천진하게 웃는 제이나의 손을 잡고, 나타니엘은 방금 전까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레일라를 내려 주자 쏜살같이 다른 아이들 곁으로 달려갔다.
나타니엘은 제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외롭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용으로 태어난 나타니엘은 늘 고독함에 허덕였다.
그랬던 그가 두 다리를 딛고 인간으로서 이곳에 머물게 하는 건 제이나 덕이었다.
그리고 제이나를 시작으로 더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생겼다.
“나타니엘?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 아무것도.”
“당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면 아마 기절할걸요.”
제이나가 웃음을 참으며 그의 손을 잡고 아나이스 곁으로 데려갔다.
“내가 레일라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타니엘의 말에 제이나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막시밀리안과 킬리언이 불쑥 끼어들어 나타니엘의 입을 막았다.
“쉿.”
나타니엘은 웃으며 그들의 옆에 앉았다.
더는 외롭지 않았다.
그가 혼자 살던 작은 세계가 이렇게나 커졌다.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손을 꽉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게 행복은 이곳에 있었다.
이 따스함 속에서, 가족과 제이나와 함께.
외롭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반짝이는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그들은 모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