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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화 해피엔딩, 그 이후 (6) (141/145)


외전 9화 해피엔딩, 그 이후 (6)
2023.06.07.



 
아나이스와 킬리언의 결혼식은 공국에서 유력 인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사원에서 열렸다.

석재 건물이라 삭막해 보일 뻔한 내부는 수많은 샹들리에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해서 전혀 분위기가 좋았다.

전부 킬리언이 재력과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막시밀리안은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좀 민망해서.’

그가 아나이스 황녀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과거의 일 때문에 이 결혼식에 사절로 가는 걸 귀족 중에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정작 아나이스 공주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 전 용기가 없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지 못했어요. 그 결혼에 제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데도요.

오히려 고맙다며 이 결혼에 꼭 참석해 달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민망하다며 피로연 때나 참석하겠다고 빠진 상황이었다.


“우리 누님을 보러 가요!”

나타니엘이 직접 보내 준 정장을 차려입은 헨리가 카시안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식장을 구경한 세 사람은 아나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황녀님, 들어가겠습니다.”

가볍게 노크하고 안에 들어가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나이스가 긴장한 얼굴로 잔뜩 굳어 있었다.


“황녀님, 너무 아름다워요.”

카시안의 칭찬에 아나이스는 뒤늦게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야 할 분이 왜 이렇게 굳어 계세요.”

테레사는 긴장한 그녀를 위해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나이스는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난번과 달리 이상하게 긴장되어서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 아나이스에게 헨리가 쪼르르 달려가 폭 안겼다.


“누님 결혼 축하드려요.”

“으, 으응.”

“앞으로도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방글방글 웃던 헨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얼마 전 양친을 잃은 아이였기에 다들 안타까워했다.

카시안은 그런 헨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나이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헨리의 뺨을 토닥였다.


“그래. 우리 둘 다 행복하게 살아야지.”

“저는 안 끼워 주는 겁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킬리언이 웃으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리 전부 다 같이요!”

헨리는 카시안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머, 카시안은 곧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나이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헨리는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성인이 되면 카시안이랑 결혼하면 되니까.”

헨리의 깜찍한 선언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카시안도 나랑 결혼한다고 했는데…….”

“그럼요. 나중에 어른이 되셔서 찾아오시면요.”

카시안의 말에 아이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어느새 굳어 있던 아나이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웃고 떠들던 사이 밖에서 하인이 문을 두들기며 고했다.


“곧 식이 시작할 겁니다.”

“저희는 이만 나가 볼게요.”

아나이스와 킬리언을 남겨 두고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테레사, 자리에 먼저 가 있어. 난 헨리 좀 데려다주고 올게.”

“응. 다녀와.”

“황자님, 그럼 갈까요?”

“웅…….”

헨리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시안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오늘 두 사람의 입장에 헨리가 피아노를 치기로 했으니 거기에 데려다주는 것 같았다.

먼저 자리에 도착한 테레사 옆으로 카시안이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다.


“카시안, 헨리 님이랑 잘 지내네.”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카시안이 황자와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는지 신기했다.


“아니, 그냥. 불쌍해서 잘 대해 준 것뿐이야.”

테레사의 말에 카시안은 고개를 휙 돌렸다.

분명 부끄러워서 그런 거겠지.

테레사는 웃으며 그녀를 놀려 댔다.

그러던 중 곧 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테레사, 시작하나 봐.”

불이 꺼지고, 핀라이트가 두 사람이 입장하는 문 앞에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손을 잡고 입장하지만, 아나이스는 다른 선택을 했다.

킬리언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술렁이던 사람들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헨리의 피아노 소리였다.

지겹게 들었던 행진곡인데 전혀 느낌이 달랐다.

부드럽고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피아노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잘 어울린다.”

“그러게.”

테레사의 말에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앞으로의 행복을 기원하며.

* * *

식의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완벽하게 행복해 보였다.

식을 주최한 사제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퇴장하고도 내부에 불이 밝혀지지 않았다.

테레사는 몸을 숙여 카시안에게 물었다.


“식이 다 끝난 게 아니야?”

“응. 공국에서는 좀 특이한 전통이 있더라고.”

테레사는 아나이스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부케를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으로 끝이 나는 듯했다.

공국에서의 결혼식은 제국과 달리 특별한 전통이 있다고 들었던 테레사는 카시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

“아니.”

그렇게 말한 카시안이 키득거리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부케를 받은 사람이 성큼성큼 빛으로 들어와 테레사의 앞에 섰다.


“테레사.”

“어, 어?”

테레사는 부케를 받은 사람이 막시밀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나서는 걸 썩 내켜 하지 않는 그가 설마 이런 이벤트에 참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약간 얼굴을 붉힌 채로 한쪽 무릎을 꿇고 테레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간 나 때문에 힘들어했던 거 알아. 원치 않은 소문에 휩쓸려 상처받을 때도 있었고, 내가 무심해서 널 힘들게 했던 적도 있었지.”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달라지고 나서는 그런 것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테레사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난…….”

막시밀리안이 잘못한 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렸을 뿐.

이제 조금 자신감이 생겨서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둘은 정말 맞지 않았다.

어딜 가도 주목받는 막시밀리안, 어딜 가도 존재감이 희미한 테레사.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막시밀리안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막시밀리안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쇼를 벌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싫어하는 그가 그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아마 카렌 때문이겠지.


‘내가 신경 쓸 거란 걸 알아서.’

떨리는 손이 불안정한 상태의 그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막시밀리안은 신이 아니었다.

지난번과 같은 일은 그가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어쩔 수 없이 벌어지기도 하겠지.

그때마다 매번 막시밀리안이 죄인처럼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자신도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했다.

아까 레티샤도 자신을 우습게 여기다가 강하게 나가자 조용해지지 않았나.


“응.”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이 건넨 부케를 받았다.

그와 자신을 위해서.

더는 누군가의 뒤에 숨어 지내지 않을 것이다.


 

* * *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아나이스는 킬리안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얄밉거나 질투 나지는 않았다.

단지…….


“이제 준비하러 갈까요?”

킬리언의 부드러운 음성에 아나이스는 정신을 차렸다.

피로연을 위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와야 했다.


“저희가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네, 네.”

아나이스는 킬리언이 부른 하녀를 뒤따랐다.

그녀가 대기실에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자 킬리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잘 어울립니다, 아나이스.”

결 좋은 금발을 따서 틀어 올리고 루비가 박힌 연한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했다.

드레스는 리본과 같은 연한 분홍빛이었다.

얇고 반짝이는 천을 겹겹이 겹치듯 장식한 드레스는 마치 봄에 피는 꽃처럼 부드럽고 달콤해 보였다.

목에는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제이나가 결혼 선물로 보내 준 것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옷은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불편했다.

아나이스는 드레스를 이래저래 돌려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화려하지 않아요?”

“아니요, 전혀요.”

킬리언은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정말 잘 어울립니다.”

킬리언은 문득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소심해 보이던 아나이스와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동생을 지키겠다며 자신에게 가시를 세우던 모습도 귀여웠다.

그때는 그냥 길들이기 어려운 소동물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녀린 그녀가 간직한 상처와 비밀은 킬리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아나이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마음은 점점 커져서 행복을 선사하고 싶어졌다.


“그 옷이 당신보다 더 잘 어울릴 사람은 없을 거예요.”

작은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킬리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가시죠.”

“네, 네.”

아나이스는 킬리언이 잡아 준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 두 사람을 보고 깨달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했다.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피로연이 열리는 정원으로 향했다.

멀리 복도 끝에 보이는 정원은 등을 달아 축제 분위기였다.

주변은 환영 마법을 이용해 열대 풍경을 투영해 두었다.

춤을 추는 플로어 가운데에서 들러리를 섰던 테레사와 그녀에게 청혼했던 막시밀리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나이스는 이국적이고 화려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정말 멋져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킬리언은 씨익 웃으며 아나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궁에서 죽은 듯이 살던 그녀에게 더 많은 걸 보여 주고 싶어서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다음에는 진짜 남부 섬으로 놀러 가요.”

아나이스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킬리언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나이스를 내려다보았다.


“킬리언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위험한 순간마다 그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변함없이 믿어 주던 킬리언 덕분에 용기를 계속 갖고 행동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소속감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용기를 주었다.

늘 고맙게 생각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늘 고마웠는데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아나이스의 말에 킬리언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것보다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만.”

“듣고 싶은 말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아나이스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킬리언은 듣고 싶었던 말을 먼저 속삭였다.


“사랑한다고요.”

이내 자신의 말에 붉어진 아나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나이스는 발꿈치를 들어 올려 킬리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말을 들은 킬리언은 아나이스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간지러웠다.

두 사람이 연회장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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