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해피엔딩, 그 이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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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해피엔딩, 그 이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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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해피엔딩, 그 이후 (4)
2023.05.31.
사실, 공국에 도착해서 사절단을 예약된 호텔까지 인도한 데에서 카렌의 역할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 자리에 뽑히기 얼마나 어려웠는데 여기서 물러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
카렌은 로비에 앉아 막시밀리안이 나오길 기다렸다.
영원히 방 안에서 기다릴 수는 없을 거다.
‘분명 약혼녀 몰래 자신과 한 번쯤은 이야기하러 나오겠지.’
그렇게 막시밀리안을 기다리던 카렌은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카렌?”
“오, 오랜만이야. 레티샤, 아서.”
레티샤의 차가운 눈이 카렌에게 닿았다.
그러자 카렌은 괜히 양심에 찔려 시선을 피했다.
‘내가 먼저 아서를 좋아했는데.’
레티샤와 아서, 카렌은 아카데미 동기였다.
셋이서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카렌은 아서에 대한 마음을 키웠다.
그러던 중 레티샤가 먼저 아서에게 고백했다.
카렌은 제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고백한 레티샤가 미웠다.
레티샤를 받아준 아서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한 주제에!
두 사람 보란 듯이 더 멋진 남자를 끼고 나타나서 아서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레티샤의 코도 납작하게 짓눌러 주고.
“카렌, 너 설마 이런 곳에 혼자 온 거야?”
레티샤는 아서의 팔을 자신에게로 더 바싹 붙이곤 카렌을 경계하며 말했다.
“일 때문에 온 거라니까.”
카렌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패배자가 된 것 같아서.
레티샤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지 마. 마탑에서 일하는 네가 호텔까지 와서 일하는 게 말이 돼?”
“극비 업무 수행 중이라…….”
카렌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위기의 순간이 없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며칠 전 홧김에 아서보다 훨씬 멋진 남자랑 만나고 있다고 거짓말한 게 후회될 정도로.
그때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디론가 향했다.
카렌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막시밀리안의 은발이 눈에 띄었다.
“막스! 여기야, 여기!”
카렌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움찔 놀란 그가 뒤로 물러서러는 걸 놓치지 않았다.
후다닥 팔짱을 끼고,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둘에게 웃었다.
“말했지? 내 애인. 이번에 놀러 오기로 했다니까.”
카렌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놀라서 팔을 빼려 했다.
하지만 카렌 쪽이 더 빨랐다.
그녀는 막시밀리안의 등을 떠밀며 그들 곁을 떠났다.
“얘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먼저 들어가서 쉬어.”
“카렌!”
무례하고 막무가내인 태도에 화를 내려던 막시밀리안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카렌을 보고 당황했다.
막시밀리안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사이 카렌이 재빨리 그를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카렌이 자리에 멈추자 막시밀리안은 따지듯이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
“하, 한 번만 봐줘라. 응? 내가 진짜 급해서 그래.”
“그건 네 사정이고.”
그는 이런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좋은 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장 돌아가서 제대로 말해.”
“막스!”
“테레사가 오해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막시밀리안은 몸을 돌려 그녀의 친구들이 서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자 카렌은 무릎을 꿇고 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부탁해도 들어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테레사!”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카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냉랭한 얼굴의 테레사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냥 친구 사이 아니었어?”
테레사의 말에 막시밀리안이 카렌을 밀쳐 내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니, 테레사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사이가 어떤 건데?”
막시밀리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변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오해만 살 거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 도망치려는 카렌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여자한테 직접 들어 봐. 난 억울하니까.”
방금까지만 비굴했던 카렌은 머리를 굴리다가 오히려 당당한 얼굴로 외쳤다.
“약혼자 좀 잠깐 빌립시다. 닳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가 얼마나 뻔뻔한지 모르고 한 소리였다.
* * *
테레사와 카렌은 단둘이 방 안에 앉았다.
같이 들어오려는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밖으로 내쫓은 지 오래였다.
카렌은 여전히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당당한 표정이었다.
“약혼자를 빌려달라는 게 무슨 말이죠?”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 사정이 뭔지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카렌은 꼿꼿한 테레사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만 애를 태웠다.
원래 순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여자라고 들었는데, 왜 저렇게 자기주장이 강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카렌은 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여기서 밀리면 이도 저도 안 될 것이다.
“막시밀리안이 당신 것도 아니고, 잠깐 애인 행세 좀 해 주는 게 그렇게 나빠요? 어차피 두 사람 서로 좋아서 약혼하는 사이도…….”
카렌은 말을 하다 테레사의 표정을 보곤 입을 딱 다물었다.
테레사는 지금 분명 웃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다.
아까까지 당당했던 태도는 사라지고 카렌은 고개를 떨군 채로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불쌍한 척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막스는 물건이 아니에요.”
테레사는 그런 카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까 막시밀리안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잘못은 아닌 듯했다.
“가서 제대로 해명하세요. 저흰 공식적인 자리에 나설 거고 이 일로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카렌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테레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와 막시밀리안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녀의 축객령에 카렌은 몇 번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방을 나섰다.
“피곤하네.”
테레사는 씁쓸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아까 막시밀리안에게 엉겨 붙는 여자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예전에는 자주 보았던 장면이었다.
제국에서도 저런 사람은 많았다.
종종 막시밀리안에게 몸을 던지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꽤나 냉정하게 밀어내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늘 믿는다며 웃고 넘겼지만, 사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테레사, 들어가도 될까?”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는 카렌이 나가는 걸 확인하고, 안절부절못하다 겨우 문을 두들길 용기를 냈다.
“들어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테레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막시밀리안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 카렌이 제대로 이야기했는지 궁금해서.”
테레사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막시밀리안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정말 별말 없었으니까.”
“응.”
막시밀리안의 그런 모습을 보며 테레사는 그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삶 중 이런 작은 오해로 시작된 파국이 많았다.
테레사는 자존감이 낮은 편이었다.
그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면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막시밀리안을 밀어내곤 했다.
혹시나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막스.”
테레사는 떨고 있는 막시밀리안의 손을 잡았다.
긴장과 불안으로 땀에 젖은 손의 감촉이 전달되자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막시밀리안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테레사는 그와 행복한 미래만 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불행했다.
자신의 죽음, 헤어짐 같은 것을 걱정하며.
“왜 이렇게 떨고 있어.”
자신이 도울 방법이 없는 걸까.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고작 얼굴도 기억 못 한 소꿉친구가 나타난 걸로 흔들릴 정도로 자신은 약하지 않았다.
“하, 하하. 너무 화가 나서 그랬나 봐.”
테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멍한 표정의 막시밀리안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자 그가 낮은 신음을 뱉어 냈다.
“거짓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면서.”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후의 아늑한 햇살에 반짝이는 눈이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손을 뻗어 테레사의 뺨을 매만지다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테레사는 순순히 끌려 내려왔다.
살짝 닿은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감촉에 턱 끝까지 쫓아오던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막시밀리안은 성급하게 테레사를 침대 위로 밀었다.
멈칫하던 그녀가 막시밀리안의 등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이 섞여 들어갔다.
테레사는 달콤한 체향에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몽롱한 시야 속에서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땀에 젖은 어깨를 짚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사라질 것 같아.’
테레사는 처음으로 막시밀리안의 불안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 * *
눈을 뜬 테레사는 노을에 주황빛으로 물든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
목이 갈라져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테레사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협탁 위에 있던 물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배고파.”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방으로 식사를 배달시킬 요량으로 하녀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가지, 마.”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막시밀리안이 하는 말에 멈춰 섰다.
“막스?”
잠에서 깬 건가 싶어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잠꼬대를 하는 건가 싶어 몸을 돌렸다.
“테레사, 제발.”
너무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테레사는 다시 침대로 가서 막시밀리안의 옆에 앉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막스, 나 여기에 있어.”
테레사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따스한 체온이 닿자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죽지 마.”
그는 자신을 향해 빌고 있었다.
죽지 말라며, 잘못했다고 말이다.
테레사는 가끔 막시밀리안의 감정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기억하는 그는 늘 죄인이었다.
“막스, 일어나 봐. 나 여기에 있으니까.”
테레사는 작게 속삭이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막시밀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테레사.”
그는 다급하게 테레사를 끌어안았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테레사는 나가는 걸 포기하고 막시밀리안의 등을 토닥였다.
매일 밤 악몽을 꾼 걸까.
그의 꿈속에서 ‘나’는 매번 죽거나 사라지는 걸까.
테레사는 그제야 막시밀리안이 불안을 떨쳐 내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도 매일 밤, 막시밀리안이 죽는 꿈을 꾼다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 이제 어디에도 안 가.”
테레사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중얼거렸다.
“평생 네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막시밀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테레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테레사는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불안을,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지울 수는 없는 걸까.
언제까지 불안해하는 막시밀리안을 지켜봐야 할까.
그녀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