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악당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다 (3) (135/145)


외전 3화 악당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다 (3)
2023.05.17.



 


“나타니엘은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타니엘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지?”

“그냥 묻는 거예요.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와 관련된 문제였다.

적어도 내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너 빼고는 다 포기할 수 있어.”

“예?”

나타니엘은 뭔가를 눈치챈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시종장을 불렀다.


“당장 가서 의사를 불러와라.”

“예, 폐하.”

“의사는 갑자기 왜요?”

난 그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나타니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날 바보로 알지 마라.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질문하는 거 아닌가?”

눈치 없는 도마뱀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바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부르지 않아도 돼요.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난 한숨을 쉬며 그를 말렸다.

나타니엘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어서 사실대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제가 꿈에서 시네스트라를 만났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우리 아이에 대해 말한 게 있어서 그래요.”

내가 이야기를 이어 가려던 중 부름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궁의가 도착했다.


“부, 부르셨습니까. 폐하.”

“되었다. 돌아가도 된다.”

“예?”

“돌아가라고.”

“아, 예.”

궁의는 영문모를 표정을 짓고는 몸을 돌렸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런 일은 나와 나타니엘만 아는 편이 좋았다.


“제대로 이야기해야 할 거야. 빼놓거나 거짓말하는 것 없이.”

이 사람이 속고 살았나, 왜 이렇게 의심하는지 모르겠다.

난 그를 앉히고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꿈에 나타난 시네스트라, 아이가 가진 힘.

그리고 그 힘 때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것까지.


“아이 때문에 그대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타니엘은 충격이 큰 듯했다.

날 보는 커다란 눈이 눈물로 글썽거렸다.


“우, 울어요?”

“그럼 그대는 내가 똑같은 상황이라면 안 울겠나?”

아이처럼 뚝뚝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입이 벌어졌다.

저렇게 울면 내가 다음 말을 하기 민망하잖아.


“윽!”

나타니엘은 격해진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날 꽉 끌어안았다.


“안 된다, 절대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 아이는……. 다음에 가져도 되는 거고, 만일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가지면 되는 거다. 어차피 헨리가 있으니까.”

내 귓가에 대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원래 이런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아서 더 미안했다.


“나타니엘. 잠깐만요.”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만 하지 마.”

이제는 거의 통곡을 하기 직전이었다.

난 더 큰 후환이 두려워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시네스트라가 해결 방법을 알려 줬어요.”

“해결 방법?”

“네, 네. 그러니까 이렇게 울 것까지는 없다니까요.”

나타니엘은 눈물을 훌쩍이며 날 보았다.

볼품없기는 했지만 솔직히 반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울지만 않았다면 조금 더 골려 주고 싶기는 했다.


“그 눈 뭐야.”

“뭐, 뭐가요?”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표정이다.”

“하, 하하. 그럴 리가요.”

언제 저렇게 눈치가 빨라졌지?

시네스트라가 용의 힘을 거둬 간 이후, 나타니엘은 희로애락이 뚜렷해졌다.

나야 그의 좋은 감정을 자주 접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별말 없이 처리되었을 일에 나타니엘은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갑자기 변한 그의 모습에 대신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꽤 우스웠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이라는 게 뭐지?”

그의 말에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용의 힘을 돌려주는 거예요.”

 

* * *

시네스트라를 만나고 온 윈터스 공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이성적인 공간에 갔다 온 탓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제이나에게 말하지.’

공작은 나타니엘의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시네스트라에게 새로 태어날 아이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더 오랫동안 용의 모습으로 지내야 할 수도 있어. 너희들의 왕이 가진 힘이 좀 커야지.]

방법이 있냐고 묻자 시네스트라는 웃으며 말했다.


[그간 용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 방법은 없냐고 찾아온 사람은 봤어도 없애게 해 달라는 녀석은 처음이군.]

그녀의 말에 공작은 정신을 차렸다.

용에 대한 신앙은 제국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황족이 찬양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힘을 포기해야 아이에게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폐하께서 포기하실지, 아니 그게 제국에 도움이 될지…….’

공작은 방법만 알아 두고 이 이야기는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자칫 잘못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황성으로 향했다.

시네스트라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걸러서 말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마차에서 내리자 시종장이 공작을 반겼다.


“폐하께서 황후 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를 황후 궁 쪽으로 안내했다.

공작은 시종장의 뒤를 쫓으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이상하게 둘 다 표정이 좋았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분명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걱정도 많아 보이고 표정도 안 좋아 보였는데 말이다.

시종장이 나가고 제이나가 일어나 자리를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입궁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차를 내려 놓았어요.”

“아, 응.”

순간 공작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 딸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릴 때는 뭔가 이상한 일을 꾸밀 때였다.

그는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게야.”

“공작, 너무 놀라지 말게.”

나타니엘까지 심각한 얼굴을 하자 공작은 바짝 긴장한 채로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난 용의 힘을 포기할 생각이네.”

“예?”

“그렇다고 모든 힘을 다 포기하는 건 아닐세. 내가 가진 힘을 포기하고, 뱃속에 있는 아이의 힘의 일부를 내가 가져올 생각이야.”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설명을 계속했다.


“강한 마력을 가진 건 분명 삶에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비정상적인 강함은 아이에게도 제국에도 절대 도움이 되지 않아.”

그는 평생을 용의 힘에 시달렸다.

강한 힘을 가진 만큼 나타니엘에게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막 결혼한 시점에서는 그를 종마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폐하…….”

“난 내 자식이 그런 삶을 살길 바라지 않네.”

만일 나타니엘이 가진 힘을 뛰어넘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제국민들은 더욱 열광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그쪽 시네스트라에게도 방법을 들었겠지. 혹시 다른 의견이 있다면…….”

“아닙니다. 폐하께서 먼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저야 따르겠습니다.”

공작은 나타니엘이 달리 보였다.

그간 일을 잘하고, 제이나에게 충실한 것과는 달리 아버지로서 과연 좋은 모습을 보여 줄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부모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고, 그 역시 감정이 결여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의 먼 미래를 위해 일부러 힘을 거두어 가겠다는 결정이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면 폐하께 다른 부작용 같은 건 없습니까?”

“있기야 할 걸세. 다른 시네스트라의 말로는 당분간 용의 모습으로 지내야 할 거라는군.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힘보다 줄어들 것이고.”

나타니엘의 말에 공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중간에서 잘 해결해 보도록 하지요.”

나타니엘이 용이 되는 것은 극비였다.

그러니 그가 공식적으로 나타나서 일을 볼 수 없다면,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일은 공작의 정치적인 힘이 커지는 이점이 있는 동시에 그를 적으로 둘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정치에 영원한 아군이 없는 만큼, 만일 황제가 배신한다면 언제든 1순위로 제거될 만한 일을 떠맡는 셈이었다.


“믿어 줘서 고맙군, 공작.”

“폐하께서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제 딸이 보증하니 말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제이나는 미안한 얼굴이었다.


“늘 고마워요, 아빠.”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공작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폐하 핑계를 대고 도망칠 테니 괜찮다.”

장난스런 공작의 대답에 제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 역시 웃으며 차를 마셨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자기도 데려가 달라 매달리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공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 * *

시네스트라는 가볍게 하리의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갈게.”

안쪽에서 반응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방 안은 또 엉망이었다.
그녀는 마법을 이용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왜, 왜 온 거야.”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저런 모습은 퍽 우스웠다.


“아, 괜찮은지 보러 온 거야. 몇 달 만에 만난 외부인이잖아. 그 사람에게 다시 버려졌으니 제정신일까 해서.”

사실은 하리가 절망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그녀의 친구는 감정이 격해질 때 다채로운 마력을 뿜어 댔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마력을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오늘은 절망에 휩싸여 검붉은 색의 마력이 방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하리는 울면서 중얼거렸다.


“날 여기에 가둬 놓고 네가 얻는 게 뭐야?”

“으음,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나, 나도 심심해. 다른 사람을 불러 줘.”

그녀는 이대로 평생 이곳에서 저 미친 용을 상대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하리는 인간이 하는 사고방식은 버리기로 했다.


“다른 사람? 누구?”

“여, 연도 있잖아. 연이라면 너도 아는 사이니까…….”

그녀는 용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인 연의 이름을 거론했다.


“뭐? 하, 하하하하하.”

“내가 나가서 데려올게. 너도 같이 나가면 되잖아.”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를 잡고 웃는 시네스트라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리는 말을 계속했다.

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 미친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자 시네스트라는 웃음을 머금고 바지 뒤에 달아 놓은 작은 유리병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연,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말에 유리병은 희미하게 몇 번 색을 발하다가 사라졌다.

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 유리병을 보았다.


“그, 그게…… 뭐야?”

“아, 이거? 연의 영혼이야. 내가 주웠어.”

시네스트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리병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웅웅, 바람이 부는 소리 같았지만 그 속에 비명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연……. 연이라고?”

“응, 연은 늘 나와 함께 다니고 있었어.”

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아…….”

하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음도 그들을 시네스트라에게서 도망치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소멸되어 가는 영혼마저 제 곁에 붙들어 둘 생각이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겠지.

아니, 오히려 기뻐할지도 모른다.


“너흰 영원히 나와 함께하는 거야.”

시네스트라가 웃었다.

그녀가 바라던 엔딩은 바로 이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