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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악당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다 (1) (133/145)


외전 1화 악당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다 (1)
2023.05.10.



“제이나!”

문을 열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뒤를 쫓아 들어온 오라버니까지.

아무래도 내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조용히 좀 들어오세요.”

난 그들을 진정시키며 가볍게 흘겨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자는 허둥지둥 들어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지, 진짜야?”

“네. 맞아요.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났으니까 가질 때도…….”

나는 얘기하던 도중 조금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도 아니고 막시밀리안이 울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왜 오라버니가 울어요?”

“아니, 그냥 미안해서…….”

“미안하다니, 왜요?”

막시밀리안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잖아.”

막시밀리안의 주접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고생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렇게 울 정도로 고생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 하하. 그러게.”

막시밀리안은 민망한 듯 눈물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그런 오라버니를 질린 얼굴로 쳐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좀 어떠냐? 의사가 뭐 조심하라고 한 건 없느냐?”

“초기니까 무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덕분에 폐하께서 제 일까지 떠맡느라 바쁘시지만.”

최근 나타니엘은 정말로 바빴다.

예전 같았다면 적당히 일을 마치고 이른 저녁에 돌아왔을 텐데, 요즘은 새벽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물론 이해는 했다.

다 날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걸.

그런데 이상하게 서운하다.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는데 그것 때문인가…….’

난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궈 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

“그럼 차도 안 주고 내쫓을 생각이었느냐?”

장난스럽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마 전에 아나이스 황녀가 보내 준 홍차가 있는데 향이 아주 좋더라고요.”

난 하녀에게 차를 끓여 오라 명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멀리 못 나가서 죄송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뭘 나오려고 하느냐. 어서 들어가서 쉬거라.”

제이나는 시선을 돌려 막시밀리안을 보고 말했다.


“오라버니도 조심히 가시고요.”

“으응, 너도 몸조리 잘하고.”

“테레사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두 사람은 제이나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황후궁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던 윈터스 공작은 잠시 멈춰 섰다.

막시밀리안은 소식을 듣고 제이나를 만나러 갔을 때 보다 더 심각한 표정인 아버지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너 먼저 돌아가거라.”

“어디 가시게요?”

“난 폐하를 뵙고 가야겠다.”

공작의 심각한 표정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은 그런 막시밀리안을 두고 재빨리 황제가 머무는 본성으로 향했다.

나타니엘을 만나려면 꽤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만나서 반드시 물어볼 것이 있었다.



“어서 오게, 공작.”

“이렇게 시간을 내주어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부를 생각이었네.”

나타니엘의 늘 날카로워 보이던 얼굴이 오늘은 유달리 지쳐 보였다.

제이나가 해야 할 내궁의 일까지 모조리 처리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시녀들이 모두 궁에 없으니…….’

게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한창 바쁠 시기이기는 했다.


“점심은 들었나? 시간이 없어서 지금 먹으려고 하는데…….”

나타니엘의 말에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식당으로 향하고 음식이 나오자 공작은 경악했다. 나타니엘의 식사가 황제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이다.

음식은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종류였다.

대신 고기와 녹인 치즈를 잔뜩 올려서 포만감을 높였다.


“늘 이런 걸 드시고 계신 겁니까?”

“오늘은 그래도 공작이 있어서 좀 시간을 들여 먹을 수 있군. 일하면서 먹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의 얼굴은 기대로 반짝거렸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기세였다.

공작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뭐지?”

“선황후께서 폐하를 낳으시고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내 이어진 공작의 물음에 나타니엘은 얼굴을 굳혔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보아도 됩니까?”

 

* * *

눈을 뜨자 주변은 오색 찬란한 구름이 가득하다.

서양풍 로맨스 판타지와 어울리지 않는 동양적인 느낌이 가득한 배경이다.


- 여기가 어디지?

분명, 아버지와 막시밀리안이 돌아간 뒤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 꿈인가?

- 맞아, 꿈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알고 있는 얼굴이 날 반겼다.


- 시네스트라!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소, 손이 왜 그래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시네스트라의 손은 반투명한 게 꼭 귀신처럼 보였다.


- 아, 이거. 일종의 대가지.

- 대가라고요? 설마…… 시간을 돌린 대가인가요?

- 맞아. 시간을 돌린 마법을 건 게 나인데 설마 아무 대가 없이 그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 지금 죽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와요?

- 죽다니. 그럴 리가.

시네스트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 죽음에는 다음이 있단다. 우리는 천천히 소멸되어 가는 것뿐이야.

- 죽는 것보다 더하잖아요.

- 놀라지 말렴, 아이야. 난 얼마나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 살았단다. 이제 소멸된다 해도 전혀 아쉬울 게 없단다.

시네스트라는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마치 오랜 숙원을 해결한 느낌이었다.


-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이렇게 사라져 간다 해도 적어도 너보다는 오래 살 테니까.

- 그, 그렇군요. 그거참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제 꿈에까지 나온 이유가 뭔가요? 아, 지하에 있던, 당신이 머무는 곳으로 가는 그 문은 왜 갑자기 사라진 거고요?

나보다 오래 산다는 말에 안도함과 동시에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모두 떠올라 따지듯 물어봤다.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살짝 뒤로 물러서며 웃었다.


- 하나씩 대답해 줄 터이니 너무 몰아세우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구름 위에 앉아 하나씩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 일단 지하에 있던 문은 그쪽의 내가 없앤 거라서 확실히는 몰라.

이쪽, 저쪽 너무 복잡했다.
대체 두 사람은 어떻게 다른 걸까?


- 표정을 보니 그것도 궁금한가 보네.

- 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하나도 안 돼요.

시네스트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 쉽게 말해서 영혼을 두 개로 나눈 거야. 하나는 시간의 틈새에 남아서 시간을 돌리는 걸 도와주고, 남은 하나는 루프 속에서 내가 원했던 걸 얻어야 하고 말이야.

- 당신도 원하는 게 있었나요?

- 당연하지. 난 자비로운 신이 아니란다.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면 알려 줄 건가요?

- 으음, 글쎄.

아무래도 쉽게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이쪽 세계에 있는 시네스트라가 자신을 찾아가는 문도 없앤 걸 보면 더욱 그랬다.


- 그럼 제 꿈에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뭔가요?

- 네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란다.

그녀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 루프를 반복하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거든.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는 모두 해결한 거 아닌가?


- 바로 용의 힘이 강해졌단 거란다. 원래의 나타니엘은 강한 마법을 가졌다지만, 지금처럼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은 아니었거든.

- 그건 그때 들었어요.

- 그래, 그리고 그 신에 가까운 힘이 네 배 속의 아이에게도 깃들었단다.

그녀의 말에 난 반사적으로 내 배를 만졌다.

아직은 있다고 실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체.
그 아이에게 그렇게 강한 힘이 깃들어 있다니…….


-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죠?

- 문제가 있다면 바로 너에게 있단다, 제이나.

시네스트라는 조금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에 묻은 감정에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어쩐지 무서운 이야기를 들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네 몸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몸. 이대로 가다가는 아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네가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 *

윈터스 공작은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타니엘이 한 말을 곱씹었다.


- 어린 시절 마력을 다루는 데 미숙해서 인간의 모습이 아닌 용의 모습으로 지낼 때가 많았네. 그리고 어머니는 그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고.

 
제 치부를 밝히는 일이라서 그런지 황제의 얼굴은 조금 붉어 보였다.
감정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 참.”

괜한 걸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딸이 그런 걸로 충격받았다면 애초에 결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작성 지하에 살던 그 용을 찾아내야겠군.’

윈터스 공작은 막시밀리안에게 가문의 일을 넘기고 공작령으로 향했다.

공작 성으로 향하는 이동 장치는 모두 폐쇄한 지 오래였다.

아무리 황제의 강력한 우군이라지만 그런 걸 남겨서 괜한 불씨를 남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며칠을 밤낮으로 달려 성에 도착한 윈터스 공작은 자신을 보고 반색하며 좋아하는 리 부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무슨 일 있나? 표정이 왜 그런가?”

“그렇지 않아도 서신이 엇갈려 제가 얼마나 애가 닳았는지 모르실 겁니다.”

평소 차분하기로 유명한 리 부인의 호들갑이 불길함을 가중시켰다.

리 부인의 안내로 응접실에 도착한 윈터스 후작은 당황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시네스트라 님.”

“안녕.”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려던 용이 제 발로 나타난 것이다.

리 부인이 차와 케이크를 내오고, 자리를 비켜 주자 그녀는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맛있는 케이크는 정말 오랜만이야. 설마하니 우리 중에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줄은 몰랐거든.”

“우리라니…… 누구랑 같이 지내고 계신 겁니까?”

저런 괴팍한 용과 자진해서 함께 지낼 용기 있는 사람이 있다니……. 윈터스 공작은 그들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아아. 자네도 알 거야. 디에스 기사단의 녀석들 말이야.”

“푸흡!”

충격적인 발언에 공작은 마시던 차를 뿜었다.

시네스트라는 더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진정 좀 하라고.”

“지, 지금 그 미친놈들하고 같이 지내신단 말입니까?”

“같이 지낸다기보다는 그들이 빚을 갚고 있는 거지.”

그들이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공작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자들의 편의를 봐주시는 겁니까? 전부 감옥 속에서 고통받다가 죽었어야 할 놈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불행해지지 않아. 오히려 죽을 수 있다고 기뻐했겠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네스트라는 공작에게 그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 그리고 그 힘으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려 주었다.

그녀가 해 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점점 굳어 가는 윈터스 공작의 얼굴이 퍽 재밌기까지 했다.


“하나만 약속하지.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걸세.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하다 여길 거야.”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 지옥 같은 결과를.”

공작은 제 눈으로 그 비참한 최후를 반드시 보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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