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당신과 영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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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당신과 영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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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당신과 영원을
2023.05.06.
마을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이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온 아버지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윈터스 공작이다. 너희가 머무는 곳의 영주로, 황제 폐하를 대신해 황후 폐하를 보좌해 여기에 온 것이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말을 마친 아버지는 주변을 살피고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 앞에 서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완전히 인간화할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반영구적으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는 방법은 알아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감격에 젖어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들에게 귀걸이의 용도와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던 사람들은 어쩐지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 팔찌를 가까운 관공서에 가져가 보여 주면 필요한 마석을 내어줄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말게.”
일반 제국민들이 사기에 마석은 너무 비쌌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시밀리안을 살려 준 나타니엘에게 보답하겠다며 마을 주민들에게 무료로 마석을 공급해 주기로 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폐하!”
그제야 마음을 놓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기뻐했다.
“황후 폐하께서 반드시 저희를 도와주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감격한 마리와 빌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뒤에 있는 귀여운 아이들은 새로 생긴 귀걸이가 신기한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건가?”
“저흰 이곳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저희처럼 고향을 잃은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실제로 마을을 떠나는 가족도 많았지만, 반절 정도는 그대로 남기로 결정했다.
“이 마을은 내 영주로서 특별히 관리할 터이니 앞으로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버지마저 나서서 약속해 주자 더 많은 사람이 마을에 남기로 했다.
“황후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께도 감사하다고 꼭 전해 주세요.”
우리는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그들의 얼굴에 가득 피어난 희망을 보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 * *
봄이 끝나 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낮에는 차가운 음료가 당길 만큼 햇볕이 강해졌고, 그 빛을 받은 정원은 신록의 색을 입었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공작성에 있던 테레사가 제도로 올라왔다.
“황후 폐하.”
“테레사!”
그간 격무에 시달린 나는 그녀의 등장에 구원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간 많이 바쁘셨나 봐요.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하, 하하. 이제 테레사가 왔으니 살 것 같아.”
그녀는 내 말에 살짝 웃었다.
난 그간 궁금해하던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
“오라버니와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곧 결혼할 것 같아요. 올가을 정도를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에, 정말요!”
“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있지만요.”
“넘어야 할 산이요?”
테레사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그녀는 손으로 뺨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희 부모님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으음.”
내가 테레사의 부모님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첫 번째 약혼 때 딸의 마음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분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라버니가 알아서 풀어야지 어쩌겠어.”
아직도 무신경했던 삶의 업보가 그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뻔한 것보다는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막스가 잘할 거라 믿고 있어요.”
테레사의 얼굴에 확신이 보였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둘은 정말 행복해 보였고, 이것이 내가 원하던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요즘 제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이 가게에서 사 온 미트 파이예요.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테레사의 손짓에 뒤에 있던 하녀가 작은 크림색 상자를 내려놓았다.
새로운 음식에 관심이 많은 나는 잔뜩 기대에 차서 상자를 열었다.
“윽.”
“어머, 왜 그러세요?”
하지만 코를 막고 바로 뒤로 물러섰다.
이상한 향 때문에 역하게 느껴졌다.
“미, 미안, 테레사. 이상한 향이 나서…….”
“엇, 그래요? 분명 괜찮았는데.”
테레사는 급하게 하녀를 불러 냄새를 맡게 했다.
하녀는 작게 잘라서 맛까지 보았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테레사도 한입 입에 넣었다. 난 최대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아무래도 향이 이상해.”
“저도 괜찮은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테레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사람을 불렀다.
“가서 주치의를 불러오거라, 어서.”
“난 완전 건강한데.”
내 말에 테레사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뒤늦게 난 그 의미를 깨달았다.
* * *
나타니엘은 오늘도 늦게 돌아올 것 같았다.
황제라는 위치는 삶의 즐거움이 보장되기 어려운 자리라는 걸, 나와 나타니엘 모두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본성으로 향했다.
맑은 초여름 공기가 기분 좋게 뺨을 간지럽혔다.
나타니엘이 일하고 있는 집무실에 도착하자 시종장이 몸을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폐하께 고하게.”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가 내 방문을 알렸다.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몸을 숙여 허락을 알렸다.
“폐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라 하셨습니다.”
집무실은 선황제 때보다 한결 소박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독특한 미적 취향을 이해하지 못한 나타니엘이 장식품을 모두 미술관으로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어서 와, 제이나.”
그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렵고 피곤한 것보다 업무가 많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압박을 주는 것 같았다.
난 그의 옆에 서서 물었다.
“지금 바쁜 시간 아니에요?”
“별로.”
어쩐지 뚱한 표정이다.
난 주변 사람을 물리고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흐음. 우리 서로에게 아쉬웠던 일을 속에만 담아 두지 않기로 했죠?”
그는 여전히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지금도 분명 무언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런 얼굴인 게 틀림없었다.
“나타니엘.”
“요즘 같이 있는 시간이 적어서…….”
“적어서요?”
나타니엘은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아쉬워서 그랬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부끄러운지 얼굴과 목까지 발갛게 변했다.
나타니엘은 모를 거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놀러 가요.”
갈등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내일 일을 도와주겠다며 꼬셨다.
결국 내 끈질긴 유혹에 넘어간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난 그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향했다.
산책길을 걸으며 지난 몇 주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즉위한 다음의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에 대한 토로였다.
“그래도 벌써부터 나타니엘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많던걸요.”
요즘 제도에는 새로운 황제가 된 그에 대한 찬사가 가득했다.
신의 가호를 받은 위대한 황제라며, 제국민들은 연일 그를 칭송했다.
민망한지 나타니엘이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 그렇군.”
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타니엘은 익숙하다는 듯 눈을 감고 감촉을 즐겼다.
“참,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을 거예요?”
“어, 음. 화, 황제궁?”
“오늘은 황후궁으로 가요.”
내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황후궁을 싫어했다.
밀리아가 머무를 적엔 대대적으로 내부 공사를 해서, 옛 모습이 전혀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타니엘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아 몰랐다.
‘시네스트라가 원래대로 고쳐 둔 황후궁에 처음 갔을 때, 하얗게 질려서 난리도 아니었지.’
결국, 다 둘러보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방치당했던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밀리아가 입궁할 때까지는 돌봐주던 사람조차 없었다고 했다.
- 그 커다란 방에 혼자서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리던 게 아직도 생각나.
애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방문만 보면서 누군가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외로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내부 장식을 전부 바꿨어요. 분명 나타니엘도 마음에 들 거예요.”
어느새 황후궁 앞에 도착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긴장되면 다음에 올까요?”
기왕이면 오늘 보여 주고 싶었지만, 무리해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게다가 그대가 꾸민 황후궁도 궁금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질 정도로 그의 맥박이 크게 두근거렸다.
우리는 천천히 궁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웠던 벽은 화사하고 깔끔한 벽지를 발라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다.
“괜찮군.”
“그렇죠?”
전반적으로 이쪽 세계에서 보지 못한 디자인이라 모던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타니엘은 신기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나는 손을 잡은 채 황후궁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사용했던 서재는 약간의 디자인만 바꾸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침실은 나타니엘이 올 때를 대비해 더 크게 확장하고 황태자궁에서 사용하던 침실과 비슷하게 꾸몄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데?”
나타니엘은 웃으며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어느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그 방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들어가 볼래요?”
“이 방도 꾸며 둔 건가?”
그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나타니엘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연한 보라색 배경에 백합과 장미 그림이 그려진 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작은 아기 침대와 아기용 물품이 가득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타니엘이 날 돌아보았다.
“저거, 설마.”
이 순간을 기다린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나타니엘?”
설마 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당황한 난 손수건으로 그의 뺨을 닦았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나타니엘은 안타깝고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놀랐어요?”
“너, 너무 놀라서 그런 것뿐이다.”
부끄러워하던 그는 손수건을 든 내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아 뺨을 비볐다.
그답지 않게 따끈따끈한 볼의 감촉에 기분이 좋았다.
나타니엘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속삭였다.
“기뻐, 그대와 나의 아이라서. 우리의 아이라서…….”
날 보는 그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당신과 아이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할게.”
녹아내릴 만큼 달콤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던 붉은 눈동자에 이제는 생기가 가득했다.
그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생생한 충족감을 주었다.
“엄마가 된 걸 축하해, 제이나.”
반투명 커튼을 통과해 흐려진 오렌지빛 노을이 방 안을 따뜻한 색으로 물들였다.
살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달아 놓은 모빌을 흔들어 그림자를 움직였다.
기쁨에 반짝이는 나타니엘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졌다.
난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빠가 된 걸 축하해요, 나타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