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가 바란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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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내가 바란 엔딩
2023.05.03.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손을 잡았다.
평소보다 살짝 낮은 체온이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열이 안 나서 다행이야.”
“으, 으응.”
막시밀리안의 뺨이 살짝 붉었다.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고 나서 테레사의 스킨십이 대담해졌다.
“어디 몸 안 좋아? 얼굴이 빨개.”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뺨에 닿았다. 가까워진 싱그러운 꽃향기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막시밀리안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막스?”
“내게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어.”
이럴수록 자꾸만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녀의 곁에 조금만 더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이, 이제 그만 가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응.”
민망함을 숨기려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읏.”
순간 눈앞이 일렁거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 안에 있던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막스!”
놀란 테레사의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막시밀리안은 본능적으로 제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다.
시한부라는 건 언제고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으, 으윽.”
테레사는 당장 그의 몸에 성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성력을 넣어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빠져나갔다.
그녀도 막시밀리안이 성력에 기대서 회복하는 데 한계가 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서 사람을…….”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팔을 잡았다. 돌아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참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막시밀리안은 끝이 왔다는 걸 느꼈다.
“가지, 마.”
“빠, 빨리 사람을 불러야 해.”
“두고 가지, 마.”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테레사의 성력 말고는 다른 회복 수단이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테레사의 눈물이 툭툭 그의 뺨과 이마에 떨어졌다.
막시밀리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졌다.
“내년에 바다에 가자는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아.”
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그대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마.”
테레사는 계속해서 성력을 밀어 넣었다.
허무하게 흩어지는 걸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만일 내가 잘못되면.”
“막스, 제발.”
“내 몫만큼 행복하게 살아야 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막시밀리안이 가장 후회한 건, 그동안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그는 무슨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살았다.
적당히 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어 왔으니까 괜찮다고 믿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테레사의 사랑을 당연시하고 모든 일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풀릴 거라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슬퍼하는 건 잠깐만 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 사랑하는 사람도, 다시 만나고.”
그러니 그녀가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테레사는 행복해야 할 사람이니까.
“아이도 많이 낳고…….”
눈앞이 서서히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테레사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 * *
우리는 바로 공작성으로 향했다.
이 마도구의 힘으로, 어쩌면 막시밀리안이 완치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리 부인!”
“폐하.”
나와 나타니엘이 갑자기 나타난 탓에 그녀는 어중간한 자세로 예를 갖췄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지?”
“후원에서 테레사 님과 산책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우린 거의 뛰다시피 걸어서 후원으로 향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테레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발, 우리가 늦지 않았길.’
나타니엘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러다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려 뛰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테레사!”
테레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막시밀리안을 끌어안고 있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몸에 힘이 빠졌다.
나타니엘은 내 손을 꽉 잡아챘다.
테레사의 품에 안긴 막시밀리안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막, 막스가.”
테레사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가득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막시밀리안의 뺨에 손을 뻗자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체온이 전해졌다.
“오라버니.”
그를 비난할 때도, 그가 죽을 만큼 후회하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연코 이런 엔딩을 원한 적은 없었다.
서로 드디어 마음이 통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잠시.”
나타니엘은 침착하게 날 밀어 내고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았다.
“숨은 이미 끊어졌지만, 아직 영혼이 붙어 있어.”
나타니엘은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제이나, 어서 마도구를.”
나는 챙겨 온 물건을 건네주었다. 나타니엘이 막시밀리안의 팔에 팔찌를 끼웠다.
그리고 테레사에게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안에 있는 마석이 마력을 성력으로 바꿔 주는 마도구다. 처음 성력을 넣어 가동시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여전히 울먹울먹한 얼굴로 테레사는 나타니엘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곧 눈을 감고 성력을 팔찌에 불어 넣었다.
막시밀리안의 몸이 희미하게 빛났다.
하지만 빛은 금방 꺼져 버렸다. 테레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물었다.
“이, 이거 잘 안 되는데 어떻게 하죠?”
“너무 긴장한 것 같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나타니엘은 침착하게 그녀의 옆에 앉아 일러 주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테레사는 자꾸만 실패했다.
이제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 못 할 것 같아요. 이러다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으면 어떻게 해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너무 중요한 일이 닥치니 긴장한 탓에 잘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테레사, 날 봐요.”
그녀의 눈엔 공포와 불안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 손에 달렸다는 사실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지금 그냥 아픈 것뿐이니까, 치료해 준다고 생각하고 침착하게 해 봐요.”
붙잡고 있던 손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테레사는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힘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빛이 커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직 한참 부족한 느낌이에요.”
테레사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어서 난 가져온 마석 몇 개를 더 갈아 끼웠다.
하지만 마석의 힘을 더해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나타니엘은 망설이지 않고 막시밀리안의 몸에 제 마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겨우 희미하게 보이던 빛이 다시 강해졌다.
테레사에게는 침착하라 했지만, 정작 나도 긴장한 채 나타니엘의 옆에서 입술을 물었다.
자꾸 흘러가는 시간에 초조해질 때였다.
“으, 으음.”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꾹 닫혀 있던 막시밀리안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긴 은색 속눈썹 아래로 윈터스 가문 특유의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막스!”
“어…….”
테레사는 곧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마지막이라고 하지 마.”
“으, 으응.”
긴장이 풀린 테레사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막시밀리안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테레사 언니가 오라버니 때문에 우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할 거예요.”
내 말에 막시밀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레사의 등을 토닥였다.
행복한 미래를 앞둔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 * *
마도구의 힘을 빌리자 막시밀리안의 건강은 금방 좋아졌다.
마력을 성력으로 바꿔 흡수하고, 테레사의 도움을 받으니 오히려 전보다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황의를 보내 둘의 건강을 살펴주기도 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서, 어느새 킬리언과 아나이스 일행이 떠날 순간이 다가왔다.
얇은 여행용 망토를 걸친 아나이스가 약혼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한 손에 용 인형을 든 헨리는 카시안과 함께였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 환송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킬리언은 살짝 무릎을 굽히며 나와 나타니엘에게 인사했다.
나타니엘은 심드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려 제국의 황녀를 보내는 일이다. 가볍게 처리할 순 없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공국에 오시면 대단한 환대를 받으실 겁니다.”
함께 연구하면서 많이 친해진 두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마차가 준비된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타고 갈 화려한 마차는 물론이고, 그 뒤로 지참금으로 가져갈 마차 여러 대가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놀란 아나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은보화가 가득 한 짐마차를 돌아보았다.
“이, 이런 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부담스럽다니요. 이 정도는 제국에 아무것도 아닌걸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아나이스의 손을 잡고 살짝 몸을 숙였다.
“가서 힘든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황녀님은 시네스트라 제국의 황족이란 걸 잊지 마세요.”
“가서 잘 지낼게요.”
그 대답을 들으며 옆에 있는 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아직도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황성에서 더 치료해서 보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타니엘은 헨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잘 다녀오거라. 단 한순간도 네가 이 제국의 황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러고는 잠시 말이 없다가 아이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헨리의 커다란 눈이 흔들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게요. 꼭 멋진 연주가가 되어서 돌아오겠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주먹 쥐고 다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나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카시안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가 옆에서 잘 지켜 드릴게요.”
“카시안만 믿어. 돌아올 때가 되면 연락 줘.”
“네, 걱정 마세요.”
그들은 모두 마차에 올랐다.
“다음엔 공국에서 봐요!”
아나이스가 작별 인사를 마치자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성대한 환송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고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함께 멀어지는 마차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만 돌아갈까요?”
“응.”
하지만 나타니엘은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이제 이 넓은 황궁에 남은 황족은 그와 나뿐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듯이.
* * *
막시밀리안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같은 효능의 마도구를 마물이 되어 숨어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기로 했다.
이번엔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귀걸이 형태로 만들었다.
난 그것들을 들고 아버지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그런 이상한 마을을 상의도 없이…….”
“하, 하하하. 그래도 잘 숨겼잖아요.”
“정말 너희 때문에 매번 심장이 안 좋아진다.”
마차 안에서 아버지는 투덜거리며 얼굴을 문질렀다.
죄송한 마음에 아버지의 옆에 앉아 든든한 팔 위에 손을 올리고 뺨을 비볐다.
“이, 이렇게 애교를 부려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입가는 이미 풀려 있었다.
내 손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 고생을 했는데 결혼한 걸 후회하지는 않느냐?”
“아버지, 전 충분히 행복해요. 나타니엘하고도 사이좋고요.”
“난 정략결혼은 언제나 불행한 결과를 불러올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막스와 테레사의 결혼도 찬성하지 않았던 거고.”
아버지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너희 둘을 보니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알겠구나. 어떻게 결혼했든,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누구보다 치열하고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아버지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네 어머니와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모습에 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어머니는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아버지를 고통 속에 살게 했다.
“지금도 늦지 않으셨다고요. 어머니는 잊어버리시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방법이죠.”
“뭐, 뭐? 이 나이에 무슨.”
당황한 아버지가 뺨을 붉히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난 옆에 더 찰싹 붙어 속삭였다.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고요.”
“되, 되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렇게 대답한 아버지는 도망치듯 마차 구석으로 달아났다.
난 웃으며 아버지를 잔뜩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