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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마법 같은 순간 (130/145)


130화 마법 같은 순간
2023.04.29.



 


“막스.”

테레사는 열꽃이 피어 울긋불긋한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솟았다.


“이, 이 바보 멍청아.”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가쁜 숨을 쉬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기이할 정도로 낯설었다.

그는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꿈에서도 울려서 미안해.”

막시밀리안의 말에 목이 막혔다.

테레사는 무너지듯 침대 앞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천천히 뺨을 매만지자 열기가 느껴졌다.


“어.”

막시밀리안은 생생한 온기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테레사? 어떻게 여기에.”

그는 뒤로 물러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아닌 테레사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도, 돌아가.”

“안 돌아갈 거야.”

침대 위로 올라온 테레사는 손을 뻗어 이불을 뒤집어쓴 막시밀리안을 끌어안았다.


“이제 어디에도 안 가고 네 곁에 있을 거야.”

놀란 듯 흠칫 그의 몸이 떨렸다.


“너도 멋대로 굴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제이나와 나타니엘은 테레사에게 치료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둘이 그렇게 자신 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웬만한 성력으로도, 의술로도 치료되지 않는다는 열병.

어쩌면 정말로 그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테레사 난…….”

“그땐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지금은 아니야?”

막시밀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테레사는 그를 붙든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사랑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지금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막스, 왜 대답을 안 해. 이제 내가 귀찮아진 거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막시밀리안은 울고 싶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생존에 대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살고 싶었다.

동시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더욱 절망적이었다.


“울지 마, 막스.”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멀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난, 나는…….”

거절하려던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 마음의 평안을 우선시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치졸한 자신이 역겨웠다.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듣고 싶었던 달콤한 말에 막시밀리안은 그대로 무너졌다.

병으로 약해진 마음은 다정한 손길에 쉽게 녹았다.

테레사가 부드럽게 토닥이자 어느새 고통이 멀어져 갔다.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한 막시밀리안은 서서히 잠이 들었다.

* * *

테레사와 사이가 좋아진 이후, 막시밀리안은 성력의 도움으로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했다.


“시네스트라는?”

“여전히 조용해요.”

막시밀리안의 상태를 알자마자 난 다시 시네스트라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드나들던 공작성 지하의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망할 놈의 용,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돼요.”

분한 마음에 책상을 내리치자 나타니엘은 괜히 양심에 찔린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일단 소공작의 말에 의하면 병의 원인은 애매한 양의 성력인 듯한데.”

막시밀리안은 회귀의 주체가 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회귀를 반복하면서, 그의 몸에 있던 극미량의 성력이 보통 사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테레사처럼 성녀라 불릴 정도로 성력이 강해지지 않는 한 완치는 불가능해 보였다.

나타니엘은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오라버니에게 더 많은 성력을 넣어 주었다.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이론은 완벽한 것 같은데 실제로 구현해 내는 것이 쉽지 않군.”

나타니엘은 킬리언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몸에 있는 성력을 증폭시킬 마도구를 개발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서를 해석해 주는 것 정도였다.


“시네스트라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문을 닫고 숨어 있을 이유가 없겠지.”

멍하니 책을 뒤적이던 나는 다른 시네스트라를 떠올렸다.

죽기 직전에 만난 그녀는 이쪽의 시네스트라보다 훨씬 친절했다.


“다른 시네스트라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렇다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가사 상태에 빠질 수도 없었다.

예측 불가능한 용의 변덕스러운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번에는 날 봐줬지만, 이번에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지도 모른다.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군.”

“예?”

그 순간, 나타니엘은 눈을 반짝이며 해석해 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딱 봐도 신이 나 보이는 게, 괜찮은 생각을 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을 줄여 가며 나타니엘과 킬리언이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타니엘은 천으로 만든 모자같이 생긴 물건을 들고 왔다.


“수면 유도 장치다.”

“잠은 잘 자는데요.”

요즘 바빠서 잠잘 시간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걸 쓰고 자면 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 혼수상태에 가까워지는 거지. 물론 진짜 혼수상태는 아니니, 옆에서 내가 깨우면 되니까 위험하지도 않고.”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상태에 빠진다고 다른 시네스트라가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 보죠.”

“응.”

나는 그에게서 모자를 받아 머리에 썼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긴장해서 잠이 안 오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부끄러울 정도로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 * *



“정말 욕심 많은 아이로구나.”

반가운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따분한 얼굴의 시네스트라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로 절 불렀다는 건 도와줄 생각이 있다는 뜻이죠?”

“내가 널 도와주면 넌 내게 뭘 해 줄 수 있지?”

그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여유 있는 미소였지만 권태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도발에 시네스트라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용을 둘이나 만났다고 우리에 대해 아주 잘 아는구나.”

“칭찬으로 들을게요. 제 목적은 이미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네 오라비를 살리고 싶어 하는 건 알아.”

“방법이 있나요?”

시네스트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심심하던 차니까 도와줄게. 다른 시네스트라가 화를 내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둘은 서로를 아는 것 같았다.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차원에 있는 두 사람.

쌍둥이일 리는 없는데, 둘은 대체 무슨 사이일까.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 거예요?”

“그게 진짜 네가 궁금해하는 건가?”

“아니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는 시네스트라의 시선에 난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에 대한 해답을 얻어 갈 수 있어. 그러니 선택해.”

묻지 말라는 얘기를 참 고급스럽게 돌려 말한다.

내가 입을 꾹 닫자 시네스트라는 공중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읽어 봐.”

두루마리를 펼치자 익숙한 한글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알려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이만 돌아가.”

또 이렇게 당하다니!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너는 다 알고 있다는 둥 두루뭉술하게만 말해 줬었다.


“속았어!”

“으악!”

내가 벌떡 일어나자 나타니엘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만났어?”

“만나긴 했어요. 전혀 도움이 안 됐지만.”

나타니엘은 더 말해 보라는 듯 내 옆에 앉았다


“두루마리를 하나 줬는데 별 내용 없었어요. 마력과 성력은 하나였고 두 힘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그 말만 적혀 있더라고요.”

나타니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역시 감이 안 잡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 병은 부족한 성력 때문이라고 했지. 테레사의 성력으로도 부족한 양을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했고.”

단숨에 필요한 만큼 채운다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테레사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어…….”

순간, 머릿속에 아까 본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마력과 성력은 그 근본이 같은 힘이다. 만일 마력을 성력으로 변환할 수만 있다면, 풍부한 마석을 이용해 막시밀리안의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킬리언과 이야기하고 오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으니까.”

그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어쩌면 오라버니가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손이 저릴 만큼 흥분이 밀려왔다.

* * *

힌트를 얻고 나자 일의 진척이 빨라졌다.

킬리언이 아나이스와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나타니엘은 국정도 미뤄 놓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황제의 일을 나와 아나이스가 나눠서 하고 있었다.


“정말 해도 해도 끝나지가 않네요.”

“원래 하시던 일에 황제 폐하의 업무까지 더해졌으니까요.”

아나이스가 서류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며 웃었다.

난 그녀 옆에 쌓인, 아직 산처럼 남은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아나이스의 말에 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곧 차와 쿠키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향긋한 차향에 조금이나마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헨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가끔 무서운 꿈을 꾸는 것 같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그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일은 고통스러운 기억일 것이다.

신전에 부탁해서 정신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극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혹시 공국에서 헨리가 적응을 힘들어하면 연락하세요. 윈터스 공작성은 공국과 가깝고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잘 안 닿으니, 헨리가 잠깐 왔다 가도 모를 거예요.”

가능하면 황자가 조금 더 크고 나서 공국으로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헨리 본인이 황성에서의 생활을 힘겨워했다.


“황후 폐하께는 늘 폐만 끼치네요.”

“무슨 소리예요. 지금 황녀님에게서 킬리언을 빼앗아 일 시키는 사람이 저인걸요?”

“저, 저한테서 빼앗다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나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놀리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차를 마시고 다시 업무를 보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제이나!”

잔뜩 흥분한 나타니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로 상기된 얼굴의 킬리언이 쫓아 들어왔다.

둘이 말하지 않아도 물건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공작성으로 향했다.

* * *

테레사의 하루는 막시밀리안과 함께 아침을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둘은 예전처럼 식당에서 만나 식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테레사.”

막시밀리안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감격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가 성력을 나눠 주기 시작하면서 소공작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졌었는데, 고작 몇 주 사이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어제는 잘 잤어? 얼굴이 좋아 보여, 막스.”

활짝 웃으며 다가간 테레사는 그를 부축하여 천천히 식탁으로 향했다.

그가 하인이 빼 둔 의자에 앉자 테레사는 그 옆에 앉았다.

원래는 긴 식탁에서 마주 보고 앉아 먹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돌아오고 나서는 식탁을 원탁으로 바꿨다.

그 덕에 테레사는 막시밀리안 바로 옆에 앉아 식사할 수 있었다.


“이제 수프도 먹을 수 있네.”

“으응. 다 네 덕이지 뭐.”

그녀가 막 돌아왔을 때, 막시밀리안은 숟가락도 못 들 만큼 힘이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오늘은 아침 먹고 유리 온실에 가자. 지난번에 심었던 말레니아 꽃이 어제 피었더라고.”

식사하는 내내 테레사는 오늘 함께할 일들을 늘어놓았다.

급격하게 약해진 체력 탓에 할 수 있는 일은 가벼운 산책과 독서 정도가 다였다.


“그래, 그러자.”

막시밀리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예전 같았다면 지루한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끝에 다다르자 그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아끼지 않았던 것이 그는 너무나 후회되었다.


“막스.”

“으응?”

“지금 우린 후회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테레사의 단호한 말에 막시밀리안은 살짝 뺨을 붉혔다.

그녀가 딸기를 포크로 찍어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


“자.”

막시밀리안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입을 벌려 딸기를 받아먹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둘은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첫날에는 어색했던 스킨십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하아…….”

“지쳤어?”

“으응.”

30분도 걷지 않았는데 막시밀리안은 벌써 힘들어했다.

테레사는 그의 손을 잡고 벤치로 향했다.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아니,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아.”

막시밀리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테레사는 그의 옆에 앉았다.


“다 나으면 우리 남부에 놀러 가자.”

“남부? 테레사, 넌 더운 거 싫어하잖아.”

“네가 좋아하잖아. 한 번쯤 네가 말한 쪽빛 바다를 보고 싶어.”

몸이 아프면 마음도 쉽게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건 삶의 의지를 꺾었다.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매번 이런 약속을 했다.

하리의 마법에 걸려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막시밀리안이 그녀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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