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자각의 순간 (129/145)


129화 자각의 순간
2023.04.26.



 


“테레사 님!”

멍하니 서 있던 테레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리 부인.”

테레사는 웃으며 부인을 맞이했다. 그녀도 테레사의 손을 잡고 활짝 웃어 보였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아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 대단한 건 아니고요.”

손을 잡은 채, 부인은 유리 온실로 향했다.

그녀가 보기에 소공작과 테레사는 서로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차선책으로 이런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완성하지 못하고 가셨잖아요. 안 계시는 동안 온실이 완성되었답니다.”

“그, 그래요?”

테레사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어차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마지막으로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은 어느새 온실 앞에 도착했다.


“후후, 기대하세요.”

문을 열자 이국의 달콤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이걸, 어떻게 다…….”

그녀가 생각한 모습 그대로였다.

아주 사소한 부분도 상상한 것과 똑같아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았다.


“굉장하죠?”

“이, 이걸 어떻게 다 한 거예요?”

“제가 한 게 아니랍니다.”

리 부인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부 소공작님이 만드셨어요.”

“막시밀리안이…….”

“그럼, 좀 더 구경하다가 돌아가세요.”

리 부인이 나가고 나서 테레사는 천천히 중앙으로 향했다.

내부는 화사한 색의 꽃으로 가득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벌과 나비도 날아다니고 있었다.


“굉장해.”

마치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곳곳에 세워 둔 식물 이름표를 보며 더 안으로 향했다.

중앙에는 막시밀리안과 함께 차를 마시곤 했던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남아 있었다.

테레사는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시간이 모두 좋기만 하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즐거웠던 기억도 있었다.


‘행복했어.’

막시밀리안은 확실히 변했다.

누구보다 그녀를 생각해 주고 귀하게 여겨 주었다.

그래서 착각한 것이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한 사람과 두 번 사랑에 빠지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냥함은 너무 달콤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언제나 갈구하던 것이니, 약해진 틈을 타고 들어와 독처럼 테레사를 잠식했다.


“으……으으.”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로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진심을 깨닫고 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테레사?”

머리 위에서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어떻게……. 몸이 안 좋아?”

막시밀리안은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손이 테레사의 뺨에 닿았다.


“읏.”

예상치 못한 접촉에 당황한 테레사가 막시밀리안의 손을 쳐냈다.

그는 픽 밀려나 뒤로 넘어졌다.


“막스?”

쓰러진 막시밀리안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자꾸만 몸에 힘이 풀리는지 풀썩 쓰러졌다.

테레사는 그런 막시밀리안 옆으로 달려갔다.


“괘, 괜찮으니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도와주려는 테레사의 손을 거부했다.

그녀는 그제야 막시밀리안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 깨달았다.


“너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역시 몸이 안 좋은 게 맞구나.”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거짓말하지 마!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마른 데다가 핏기도 없고…….”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뺨과 몸을 만지며 화를 냈다.

당황한 그는 또다시 테레사의 손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우린 아무 사이도…….”

“내가 신경 쓰여!”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좋아한다고 그러면서 사람 마음은 다 흔들어 놓고, 인제 와서…….”

멋대로 말을 뱉어 낸 테레사는 입을 막았다.

막시밀리안의 놀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고백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렸다.

둘은 시선을 피한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 사랑한다면 서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해야 해요. 말하지 않으면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잖아요?

 
벌써 일 년 전에 제이나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테레사는 지금이 그 조언에 따를 때라고 생각했다.


“막스, 나, 난…… 네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몇 번이고 제게 매달리며 고백했던 막시밀리안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단숨에 뱉어 냈다.


“난, 여전히 막스, 네가 좋은데 너, 넌 어때……?”

테레사는 겨우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막스?”

“미,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

그는 순식간에 도망치듯 온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동안 테레사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울고 있었어.’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 * *

난 나무 뒤에 숨어서 테레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요즘 황후궁의 화원을 가꾸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공작성에 다녀온 뒤로 내내 저런 상태야.’

분명 막시밀리안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오라버니를 아무리 추궁해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으으, 궁금해!”

“뭐가요?”

“으, 으아아악!”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카시안이 불쑥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테레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재빨리 카시안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왜 그러시는데요?”

“아니, 테레사 말이야. 공작성에 갔다 와서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거든. 나만 느껴?”

카시안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뭐……. 그렇죠?”

느낌이 왔다.

카시안이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넋이 나갔어?”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테레사가 막시밀리안에게 고백했나 보더라고요.”

“뭐!”

큰 소리를 내자 카시안이 재빨리 내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나 테레사가 들었을까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못 들은 듯했다.

나는 목소리를 죽여 카시안에게 물었다.


“고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지난번에 만나러 갔다가, 제 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카시안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공작은 울면서 도망갔대요.”

“아…….”

“하여튼 대답도 못 듣고 왔나 보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렇게 넋이 나갔어요.”

카시안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소공작도 참, 결국 거절할 거였으면 왜 그렇게 잘해 줬는지.”

지나가는 말로 투덜거렸지만, 막시밀리안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덜컥 연애를 시작하는 건 말도 안 되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카시안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난 의자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침 일을 마친 나타니엘이 돌아와 말을 걸어왔다.


“오셨어요?”

테이블에 턱을 댄 채로 난 그를 반겼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가까이 온 나타니엘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난 멍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이나.”

어서 말을 하라는 듯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흐음, 고민 중이에요.”

“무슨 고민?”

“테레사한테 말할까 말까 하고요.”

“소공작에 대해서?”

“네.”

오라버니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나와 나타니엘, 그리고 얼마 전에 알게 된 아버지가 다였다.

막시밀리안이 테레사에게 알리는 걸 싫어한 데다가…….


‘요즘 열병 때문에 몸도 많이 안 좋고.’

다른 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며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나타니엘에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런 재수 없는 이야기는 왜 하는 건데?”

“역으로 좀 생각해 보려고요.”

그는 얼굴을 구긴 채 잠시 고민했다.


“일단 최대한 치료법을 찾겠지.”

“치료법이 없으면요?”

“…….”

상상하는 것조차 괴로운지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는 그대는?”

“네?”

“만일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두 번 다시 그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무섭기만 했다.


“미안, 미안해요. 이상한 질문 해서.”

“울리려고 한 건 아니야.”

그의 서늘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난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눈물이 멈추길 기다렸다.


“만일,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계속 나타니엘의 옆에만 붙어 있을래요.”

지금처럼 다른 일을 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것이다.

하루 종일 곁에 붙어서,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날카롭지만 상냥하게 웃어 주는 눈매, 가끔 못된 말을 뱉어 내는 입술,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부드러운 머릿결과 살짝 서늘한 체온까지.


“역시 이대로 허무하게 오라버니를 보낼 수는 없어요.”

“이야기할 생각인가?”

“네.”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 부채감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테레사는 이미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후회하고 괴로워할 사람은 그녀였다.


“소공작이 원망할 거야.”

“말해 주지 않으면 테레사도 원망하겠죠.”

막시밀리안과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만일 내가 테레사의 입장이 된다면 분명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오라버니의 자존심이 뭐라고, 소중한 순간순간을 놓친단 말인가.


“원하는 대로 해.”

나타니엘은 툭툭 내 어깨를 두들겼다.

마치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처럼.


“잘되겠죠?”

“그대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 중에 실패한 것이 없지.”

난 불안을 잊기 위해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감았다.

* * *

막시밀리안은 열기에 눈을 떴다.


“아파.”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도 힘들 만큼 아팠다.

그는 멍하니, 테레사가 이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리다 죽어 가던 때를 떠올렸다.

테레사의 열병은 애매한 양의 성력 때문이었다.

성력은 무조건 몸을 회복시키는 힘이 아니었다. 약한 부분을 없애고 재생시키는 능력이었다.

아주 적었다면 몸에 영향이 없었을 것이고, 많았다면 전설처럼 성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성력은 독과 다를 바 없었다.

몸의 약한 부분을 없애기는 쉬워도, 재생에는 많은 양이 필요했으니까.

그 성력을 늘리는 방법은 오직 회귀뿐이었다.

그래서 성력량이 적었던 초반 회차 때는 매번 이 열병으로 테레사가 죽어 갔다.


“그때는 이렇게 아픈 줄 몰랐는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테레사를 보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다음번에 그녀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를 위한다면서 이 끔찍한 고통을 몇 번이고 겪게 한 자신이 싫어졌다.


“난 끝까지 이기적이었어.”

그런데도 테레사가 보고 싶었다.

자신을 보며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그녀의 눈을, 드디어 웃어 주던 얼굴을.

부드럽게 울리던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한심해.’

처음부터 그녀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면.

익숙하다고 소홀히 하지 않고, 아껴 주었다면.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를, 행복했을 미래를 부순 것은 막시밀리안 자신이었다.


“윽.”

다시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눈을 감고 테레사를 떠올렸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 고통을 조금은 견딜 수 있었다.


“막스.”

환청?


“이, 이 바보 멍청아.”

막시밀리안은 눈을 떴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테레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에서도 울려서 미안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