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대가로 치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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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대가로 치른 것
2023.04.22.
막시밀리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시네스트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 넌 참 운이 좋아. 윈터스 가문 사람들이 원래 그렇지만.
그리 말하며 시네스트라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 대가가 필요할 거야.
- 상관없어. 난 뭐든 걸 수 있어.
막시밀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에겐 지금의 삶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왔다.
* * *
과거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될 줄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테레사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다.
- 어째서.
막시밀리안은 싸늘하게 식은 테레사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이번에도 실패했다.
- 다시…….
막시밀리안은 새로운 기회를 노렸다.
그는 시간을 돌리기 전, 시네스트라에게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받아 뒀다.
공작성의 미로로 내려간 막시밀리안은 문을 열었다.
- 기다리고 있었어.
시네스트라는 그런 그를 비웃듯 활짝 웃으며 반겼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 시간을 무한정 돌릴 수는 없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대가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막시밀리안은 번번이 실패했고, 계속 시간을 돌렸다.
실패의 원인이 디에스 기사단에 있다는 걸 알고 나서도 몇 번을 되돌렸다.
그러면서 두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마력과 관련된 물건은 다음 회차에도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마력과 관련된 힘은 다음 회차에서 더 강해진다는 걸.
막시밀리안이 회귀를 거듭하며 기억을 축적할수록 디에스 기사단의 능력도 점점 강해져 갔다.
‘이대로라면 대가만 치르고 결국 실패할지도 몰라.’
미래를 읽는 기사단의 허를 찌를,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막시밀리안은 큰 틀에서 문제를 살펴보기로 했다.
디에스 기사단은 특정한 미래를 보고, 거기에 세상의 흐름을 맞춰 갔다.
그들의 꿈에는 나타나지 않을 낯선 존재가 필요했다.
시네스트라가 알려준 ‘꿈꾸는 자’의 힘은 오직 이 세계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의 ‘외부자’가 개입한다면 그들의 꿈을 피해 일을 꾸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부자가 반드시 내 편일 거라는 보장이 없지.’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만약, 가장 믿을 만한 자를 다른 세계로 보내 ‘외부자’로 만든 뒤 다시 불러온다면?
돌이켜 보니, 매번 막시밀리안의 주변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이나였다.
그래서 그는 제이나의 영혼을 다른 차원으로 보냈다.
“너에게는 늘 미안해하고 있어.”
막시밀리안은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시간을 돌릴수록 이 세계에 있던 자들의 힘이 점점 강해졌거든. 디에스 기사단도 그랬고.”
“그래서 날 다른 세계로 보낸 거야?”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했어. 만일 네가 외부자가 되면 그들의 꿈에 나타나지 않거든.”
그렇게 만들어진 꿈이 제이나가 알고 있던 원작이 되었다.
“그럼 내가 읽었다고 생각했던 건…….”
“제3자의 눈으로 우리 이야기를 본 거지. 그 탓에 네 생각도 많이 바뀐 거고.”
이번 삶에서 막시밀리안은 강제로 외부자로 만들었던 그녀를 다시 원래의 세계로 불러왔다. 예상대로 디에스 기사단은 제이나로 인해 벌어지는 일을 꿈꾸지 못했고, 그들은 결말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테레사가 살아난 건 모두 네 덕이야.”
“자, 잠깐. 아직 대가에 대해 제대로 안 말했어.”
제이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막시밀리안은 계속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날 다른 세계로 보냈을 때도 대가를 치렀을 거 아냐!”
“그건 이미 끝났어. 널 보낸 대가로 그동안 내 기억이 없었던 거니까.”
“그럼 시간을 돌린 대가는?”
제이나의 목소리에 점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아픈 게 그 대가야?”
막시밀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입술만 짓씹던 제이나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테레사에게는 말하지 마.”
그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릴 뿐이었다.
* * *
황성으로 돌아온 나는 비틀거리며 본궁으로 향했다.
본궁에 마련된 내 침실에 들어간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우울감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나?”
나타니엘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왔나?”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도리질하자 나타니엘의 손이 목 뒤쪽에 닿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 제이나?”
난 몸을 틀어 나타니엘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그의 손이 갈피를 잃고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등에 닿았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저 토닥거려 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막시밀리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줬다.
내 말을 듣던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요.”
테레사에게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의 남은 수명은 고작 몇 달 정도라고 했다.
- 테레사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아.
죽어 가는 제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서히 자신을 잊어 주길 바란다는 그의 말엔 진심이 가득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나타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소공작은 테레사를 사랑하나?”
“어, 음. 아마도……요?”
사랑하지 않나?
그렇게 애틋하게 여기고 위하는데?
“그렇다면 테레사는 그를 사랑하나?”
“그건…….”
“옆에 있는 우리조차 확신할 수 없는 관계라면 괜히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 역시 나타니엘의 말에 동의했다.
“공작성까지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장치를 좀 더 고쳐 줄게.”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나타니엘은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 쓰겠어.”
특유의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자 마음이 좀 놓였다.
어쩐지 나타니엘과 함께라면 이번 일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테레사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막시밀리안을 만나고 온 제이나는 어째선지 그와 관련된 화제를 묘하게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시밀리안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한 걸까.’
마음이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중간에 붕 뜬 채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테레사의 상태를 눈치챈 건 카시안이었다.
“요즘 무슨 걱정 있어?”
“어? 아, 아니야.”
“왜 그러는데?”
카시안은 제국을 대표해서 아나이스 일행과 함께 공국에 다녀올 사절로 뽑힌 상황이었다.
그만큼 준비할 것도 많았으니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또, 또 그 표정이다.”
카시안의 말에 테레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카시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소공작 때문이야?”
정곡을 찔러 오는 말에 테레사의 몸이 흔들렸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자신의 마음이지만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막시밀리안이 싫은 건 아니었다. 사랑하던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 같은 것이 생기긴 했다.
“같이 지낼 때는 잘해 줬나 보네.”
“으응.”
“그런데도 네가 확신이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되돌아보면 최근 막시밀리안의 행동은 ‘좋아해서 잘해 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도리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날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가끔 막시밀리안이 자신이 아닌 허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카시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네가 이렇게 고민하는 건, 미련이 남았다는 뜻 아닐까?”
“미련…….”
분명 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다.
요즘 그가 조금 잘해 줬다고 이런 감정이 생기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잘 모르겠어.”
카시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어쩌면 테레사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는 것이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럼, 서로 제대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제이나는 막시밀리안이 테레사에 대한 마음을 회피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카시안이 보기엔 테레사 역시 비슷했다.
“공작성은 너무 멀기도 하고…….”
“황후 폐하께서 순간 이동기를 이용해 공작성에 자주 가시던데. 부탁하면 아마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응.”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제이나가 자신에게 막시밀리안을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테레사는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황후궁으로 향했다.
제이나는 황후궁 재단장으로 한창 바쁜 상황이었다. 하지만 테레사의 요청을 듣고 깜짝 놀라며 머뭇거렸다.
“고, 공작성에 가려고요?”
“네. 황제 폐하께서 만드신 순간 이동 장치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
당황한 표정의 제이나가 시선을 피했다. 그녀 역시 막시밀리안처럼 거짓말에 약했다.
그리고 테레사는 확신이 생겼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마도구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까요?”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제이나는 약간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테레사는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지도 모르지.’
혼자서 멋대로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상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테레사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끝을 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순간 이동 장치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눈부신 빛이 눈앞에 터지고, 순식간에 공작성에 도착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낯익은 후원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내 구획을 나누고 계획을 세우며 가꿨던 곳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장미 향이 가득한 후원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와아…….”
한편으론, 계획만 세웠던 것이 반쯤 현실로 구현되어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천천히 후원을 걸었다.
바쁜 와중에도 제이나가 미리 연락했는지, 머지않아 막시밀리안이 나타났다.
“오, 오랜만이야, 테레사.”
뛰어왔는지 약간 뺨이 붉었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요즘도 잘 못 자? 살이 많이 빠졌네.”
“으응? 아니야. 좀 바빠서 잘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
막시밀리안은 뒤로 물러서며 힘없이 웃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의 하녀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서로 눈인사를 하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녀가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쩐 일이야. 이렇게 멀리까지 다 오고.”
막시밀리안이 시선을 내리깐 채로 물었다.
테레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우리 관계를 좀 정확히 정리하고 싶어서.”
“어? 아아. 파혼장을 보내 주면…….”
막시밀리안은 허둥지둥하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테레사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파혼하고 싶다고 한 건 막스, 너잖아.”
움찔, 그의 어깨가 튀었다.
테레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왜 날 나쁜 사람을 만들려고 해? 하고 싶은 사람이 보내 줘.”
“하, 하지만 그러면 너한테 불이익이…….”
“아, 내 불이익을 걱정해 줬다고.”
생각해 보면 약혼 전에 계약서를 쓰자고 했던 건 테레사였다.
막시밀리안은 오직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함께하기로 했을 뿐이고.
‘멍청하게.’
약혼 목적도 테레사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상대였던 디에스 기사단이 와해되었으니 자연히 끝날 계약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다정하게 대해 주던 막시밀리안에게 흔들린 건 그녀 자신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고민할 관계가 아니었다.
“알았어. 곧 정리해서 보낼게.”
그와 더 있어 봤자 화만 낼 같았다.
테레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응접실에서 뛰어나온 테레사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한심해.”
겨우내 땅속에 숨죽여 있던 씨앗이 봄에 발아하듯, 그녀의 감정이 다시 싹튼 것이다.
괜히 여기까지 찾아왔다.
테레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