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비밀은 지켜 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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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비밀은 지켜 줘야 해
2023.04.19.
막시밀리안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달려가서 안아 올리자 깜짝 놀랄 정도로 가벼웠다.
“오라버니, 정신 좀 차려 봐요.”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과 차디찬 몸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난 그를 내려놓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을 부르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쩐지 막시밀리안은 모든 걸 예상한 것 같았다.
* * *
하인을 데려와 막시밀리안을 침실로 옮기고, 주치의를 불렀다.
“좀 어떤가?”
“긴장이 풀려서 열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 푹 쉬면 좋아지실 겁니다.”
“정말 그것뿐인가?”
“예. 정말 다른 곳엔 이상이 없습니다.”
몇 번이고 확답을 받고 나서야 주치의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난 침대 옆에 앉아 막시밀리안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나타니엘에게 금방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으음.”
신음 소리와 함께 막시밀리안이 눈을 떴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신이 들어?”
“여긴…….”
“온실에 쓰러져 있었어.”
몸을 일으킨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왜 여기에 와 있어. 한창 바쁠 텐데.”
“그 한창 바쁜 시기에 더 바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가볍게 흘겨보자 막시밀리안이 힘없이 웃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미소였다.
“혹시 테레사 때문에 온 거야?”
“잘 아네. 왜 파혼하겠다고 한 거야? 얼마 전까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
막시밀리안은 입을 꾹 닫았다.
아무래도 쉽게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이유라도 말해 줘야 상대도 설득할 거 아니야.”
“테레사가 신경 써?”
“당연하지. 옆에서 보면 둘 다 미련이 철철 넘쳐 보였다고.”
공작성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함께 위험에 맞섰기 때문일까.
만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깊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회복될 거라 생각했다.
“하, 하하. 그럼 안 되는데.”
자조적으로 웃으며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테레사에게 잘 보일까 고민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체 왜 파혼하겠다고 한 거야?”
“그냥, 같이 지내보니까 알겠더라. 우린 너무 달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고 했다.
둘 다 마음을 열고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어떻게 서로 완벽하게 같을 수 있겠어. 오라버니는 다르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옆에서 보면 둘이 비슷해. 특히, 문제가 생기면 상대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는 게.”
계속 말을 걸어 캐 봤지만, 막시밀리안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난 괜찮아. 그만 돌아가.”
그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괜찮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지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바로 몸이 휘청였다.
그를 붙들어 다시 침대 위에 앉혔다.
“누워 있어. 자꾸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진짜 괜찮다니까.”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걱정 안 하게 잘하든가.”
내가 툭 쏘아붙이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평소 같으면 차갑게 반박하면서 쏘아붙였을 막시밀리안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힘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 모습을 보며 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테레사.’
원작, 그러니까 전생의 테레사가 이렇게 죽어 갔다.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치병.
나타니엘조차 치료법을 찾지 못했던 병이었다.
잊고 있던 전생의 굴레가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아닐지도 몰라.’
잊혀진 과거를 그대로 재현해 내려 했던 디에스 기사단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그런 엔딩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시네스트라가 마음이 약해져서 놓아주는 바람에, 그들이 다시 흐름을 바꾸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리는 시네스트라에게 보냈어?”
“응. 우리 쪽에서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일단 보냈어. 대신 시네스트라의 곁에서 멀어지면 바로 알 수 있게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 놨지.”
하리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죽일 수 없을 만큼.
‘나타니엘에게 부탁했다면 가능했을지도.’
하지만 굳이 그런 일을 그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시네스트라는 왜?”
“오라버니 건강이 안 좋은 게 심상치 않아 보여서. 혹시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남은 게 아닌지 물어보려고.”
막시밀리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숨기고 있어.’
언젠가 테레사에게서 그가 무언가를 숨길 때면 시선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몸이 안 좋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네스트라도 바쁠 텐데 뭐 하러 그런 걸 물어봐.”
“바쁘긴 뭐가 바빠.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용일 텐데.”
우리가 디에스 기사단과 싸울 때도, 대단한 도움이 되기는커녕 뒷짐 지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그런데 바쁠 거라니.
“오라버니는 쉬고 있어. 내가 데이먼 경에게 말할게.”
자꾸 붙잡는 그를 침대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더 불안해졌다.
난 곧바로 데이먼에게 시네스트라의 행방을 물었다.
“어, 지금 아마 응접실에 계실 겁니다. 간식 시간이거든요.”
그리고 데이먼은, 그녀가 디저트를 즐기느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살짝 알려 주었다.
응접실로 향하자 시네스트라와 여전히 그녀를 불편해하는 파티셰가 보였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러면서 그녀가 딸기로 장식한 에클레어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으음, 역시 맛있어.”
감탄하는 얼굴이 어찌나 얄미운지.
난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 주변 사람을 물렸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하리나 연이라면, 네가 생각한 것보다 잘 지내지 못해.”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팔을 흔들었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기묘한 빛을 냈다.
“여기에 영혼을 보관하는 거야. 넌 안 들리겠지만, 이 안에서 죽여 달라고 외치면서 매일같이 울고 있거든.”
손에 묻은 크림을 날름 핥아 먹으며 그녀가 방긋 웃었다.
분명 친구라고 들었는데 상대방의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시네스트라에겐, 그저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제 옆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자랑하는 듯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겨우 정신을 차린 난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 물으러 온 게 아니야?”
“막시밀리안의 상태가 이상해서 온 거예요.”
“아아, 그 녀석.”
시네스트라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에클레어를 들었다.
“남은 시간 동안 잘해 줘. 곧 죽을 테니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 * *
막시밀리안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스한 봄을 맞은 윈터스 공작가의 정원엔 장미 향이 가득했다.
“테레사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난겨울, 그녀와 함께 새로 정리한 정원이 이렇게 성과를 보여 주었다.
색색의 다양한 장미 덩굴이 정원 가득 피어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그는 한참을 구경하다가 제이나의 말을 떠올렸다.
‘미련이 넘쳐 보였다고.’
자신이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두 번째 약혼을 제안했을 땐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그저 테레사와 다시 잘 지낼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더 정을 떼었으면 나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너, 너!”
그때, 쾅 소리와 함께 제이나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화가 났는지 하얀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어졌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이나는 멱살을 잡듯 그의 옷을 붙들고 윽박질렀다.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 흔들리자 어지러웠다.
“잠깐만. 제이나, 나 어지러워.”
“아, 미안.”
그녀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막시밀리안은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이상한 데서 감이 좋다니까.”
“사실대로 말해.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떨고 있는 동생을 보며 막시밀리안은 살짝 웃었다.
최근 자주 싸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했다.
“하나만 약속해 줘.”
“약속?”
“날 위해서라도 테레사에겐 비밀로 하겠다고.”
“그건 듣고 나서 생각할 거야.”
제이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분명 그녀 역시 테레사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얼마 전에야 기억을 전부 되찾았어.”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것은 하리와 싸우던 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던 막시밀리안은 모든 것의 시작점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시네스트라와 계약을 했어.”
제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내 생명을 걸고, 시간을 돌리기로.”
* * *
신전에는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했다.
용이 떠나고 난 뒤,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신전에 막시밀리안이 나타났다.
- 오셨습니까, 공작님.
신관은 익숙하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막시밀리안은 신관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안쪽에 마련된 묘지로 향했다.
테레사의 이름이 적힌 묘비 앞에 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올해는 좀 늦어서 미안해.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테레사가 좋아했던 꽃을 내려놓았다.
벌써 그녀가 죽은 지 십여 년이 지났다.
막시밀리안의 옆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이나는 멀리 시집을 갔고,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테레사를 잃고 몇 년간 우울증에 시달린 탓에, 그를 쫓아다니던 여자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런 건 막시밀리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가치 있고 빛나던 건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까.
- 안녕.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막시밀리안은 짜증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 날 찾았다고 들었어.
그와 여자 주변을 제외하고는 회색빛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 설마, 시네스트라?
- 그래, 맞아. 네가 몇 년간 날 찾겠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서 말이야. 나한테까지 그 소문이 들리더라고.
막시밀리안은 환희에 찬 얼굴로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 당신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
고서에 의하면 용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생명을 창조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다고 했다.
삶의 이유를 잃은 막시밀리안은 용이 되어 사라진 나타니엘을 찾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다는 고대의 용, 시네스트라가 나타나다니.
- 테레사를 살릴 순 없나?
막시밀리안은 시네스트라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녀의 붉은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아무리 나라도 힘들어.
남자의 얼굴에 실망을 넘어선 절망이란 감정이 떠올랐다.
시네스트라는 그런 막시밀리안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숙였다.
- 오해하지는 마. 힘들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어.
- 방법이 있는 건가?
절박한 물음에 시네스트라가 웃었다.
- 시간을 되돌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