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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파혼의 원인 (126/145)


126화 파혼의 원인
2023.04.15.



 
대관식이 끝나고, 항상 있던 연회는 생략했다. 분위기상 간단한 식사로 마무리했다.

그런데도 시간은 늦어졌다.

나와 나타니엘은 하루 종일 무거운 옷과 관에 짓눌린 채 사람들을 상대했다.

마침내 일정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자 몸이 축 늘어졌다.


“으으…….”

씻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생각보다 긴장했나 봐요. 나타니엘은 괜찮아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저 좀, 이상했을 뿐이야.”

“뭐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대관식을 할 줄 알았거든…….”

나타니엘은 조금 멍한 얼굴로 코코아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몇 주만 지나면 이 궁에 황실 사람은 그대와 나뿐이겠군.”

아나이스도, 헨리도 이번에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나타니엘이 자리를 잡고, 밀리아와 트레비아 가문의 잔재를 청산할 때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조사하면 할수록 트레비아 백작가와 얽힌 검은손이 많았다.


“궁이 휑해지겠네요.”

아나이스와 헨리, 킬리언이 늘 황태자궁에 놀러 와 줘서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멍하니 누워 있던 내 위로 나타니엘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쓸쓸해질 것 같나?”

“뭐……. 그렇겠죠?”

그가 날 가만히 내려다보며 씩 웃더니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난 셋 정도가 좋아.”

“예?”

“가족이 없어서 쓸쓸할 것 같다며. 여기서 늘리려면 아이를 갖는 방법밖에 없지 않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달라붙는 나타니엘을 보면서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를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목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당당하던 나타니엘이 되레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의미심장하게 웃어 주었다.


“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은데. 나타니엘은 아닌가요?”

놀라서 동그래졌던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에 코가 아릴 것 같았다.

* * *

높은 자리에 오르면 편히 놀고먹을 줄 알았다.

며칠 만에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이 너무 많아.’

물론 나만 바쁜 건 아니었다.

나타니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리는 새벽쯤에 일어나 밤늦은 시간까지 일했다.

그래서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 일에도.


“네 오라비가 또 파혼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난 오랜만에 입궁한 아버지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간 공작성에서 테레사와 함께 지내며 꽤 가까워진 느낌이었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버지는 속이 타는 듯 물 한 컵을 전부 들이켰다.

사실 둘이 한시적인 계약 약혼 관계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고 치는 자식을 둘이나 둔 탓일까.

아버지는 내 태도를 보고 금방 눈치챘다.


“혹시 너도 알고 있었던 게냐?”

“뭐, 뭐를요?”

“둘이 이상한 계약을 한 거 말이다.”

“아, 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아니 뭐……. 아버지도 알고 계시면서 눈감아 주신 거 아니에요.”

볼멘소리를 내자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테레사에게 물어봐 줄 수는 없는 게냐?”

“테레사에게 뭘요?”

“막스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말이다.”

“그걸 알아서 뭐에 쓰시게요.”

“그래야 뭐라도 고치지.”

아버지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옛날 막시밀리안의 언행을 떠올리면, 아버지가 그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에도 파혼한다면 테레사뿐만 아니라 오라버니에게도 타격이 클 것이다.

안색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곧바로 테레사를 불렀다.

그녀는 내 시녀장이 되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부르셨나요, 황후 폐하.”

은은한 미소를 띤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쩌면 테레사가 막시밀리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내 말에 테레사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윈터스 공작님이 들르셨다기에, 폐하께서 부르실 거라 생각했어요.”

찻잔을 들어 살짝 목을 축인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오라버니와 파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테레사를 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막시밀리안이라고 했다.


‘대체로 이렇게 되면 화기애애해지면서 서로 화해하지 않나.’

내 생각은 그랬지만, 두 사람 중 어느 한 명이라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오라버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말에 테레사의 뺨이 꿈틀거렸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 난 몸을 움찔 떨었다.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잔잔하게 웃고 있지만, 화가 난 게 그대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파혼하자고 한 거 아니에요.”

“예?”

뜻밖의 대답에 난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파혼하자고 했다고?


“파혼 이야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막시밀리안인걸요.”

쐐기를 박는 테레사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 *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둘이 더 많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터놓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예상 밖의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오라버니를 한번 만나야겠어요.”

내 말에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던 나타니엘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요.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다가 갑자기 깨끗하게 물러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간의 일을 설명하자 나타니엘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흠. 소공작이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제 생각도 그래요.”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그는 아직 윈터스 공작성에 있어서 만나러 가기엔 너무 멀었다.

게다가 나도 즉위 초반이라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아 여유가 부족했다.


“정 급하면 순간 이동 장치를 쓰는 건 어때?”

“황성 주변에 있는 건 얼마 전에 다 철거했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그건 공작성에서 황성으로 오는 것만 가능하고요.”

지난 사건 때, 순간 이동 장치가 공작가의 병사들을 데려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장치가 언제나 좋은 의도로만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지 역시 그걸 알고 우리가 즉위하자마자 순간 이동 장치의 철거를 시작했다.


“살짝만 손보면 오갈 수 있을 거야. 아직 전부 철거하지도 않았고.”

“전부 철거하지 않았다고요?”

“응.”

분명 해체 시작을 알리는 보고서를 얼마 전에 보았는데. 심지어 예상 완료일은 이미 지나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나타니엘은 무언가 찔리는 듯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 장치에 관심이 좀 생겨서 몇 개 남겨 뒀다.”

역시나.

취미라고는 디저트를 먹는 것이 다였던 그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건 바로 마도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타니엘은 남들과 다른 마력 체계를 가진 덕에 마도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 사건을 겪은 뒤 부쩍 흥미를 보였다.

옆에서 바람을 넣는 킬리언도 문제였다.

둘이 밤잠도 설치면서 이상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 순간 이동 장치, 상당히 특이하더군.”

심지어 킬리언에게 다른 화제를 꺼내서 말을 돌리는 기술까지 배운 모양이었다.

나는 넘어가는 척하며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뭐가요?”

“그대도 알듯이 상당히 오래되어 보였잖아.”

“맞아요. 손만 대도 부서질까 봐 걱정되긴 했죠.”

내가 동의하자 나타니엘은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그런데 사용된 기술이나 부품들은 전부 1, 2년 전의 최신 것이더군. 의심을 피하려 일부러 낡아 보이게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일이 생겼다는 거야.”

나타니엘과 킬리언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도 알아내지 못한 현상이라니.

자연히 오컬트적인 신비한 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뭐 귀신이나 그런 게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타니엘은 내 상상의 나래를 단숨에 끊어 버렸다.

그런 식으로 대답할 거면 도대체 왜 이야기를 꺼낸 건지.


“아직 연구 중이야.”

“흐음.”

“하여튼 중요한 건, 그 장치로 공작성에 다녀오라는 거야.”

빙빙 돌던 이야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난 잠깐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은 방법이 있다는데 안 쓸 수는 없죠.”

“내일쯤 준비해 둘게.”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은 살짝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이 손본 마도구를 누군가가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는 말에 좀 불안해졌지만.


‘그러고 보니, 시네스트라에게 마력을 넘기고 나서 더 감정이 풍부해진 것 같아.’

나타니엘은 자신의 마력이 예전보다 줄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많은 양이긴 했지만.


‘다시 커다란 용이 되긴 힘들다고 그랬지.’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예전에는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썼다면, 지금은 용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나타니엘의 귀여운 모습을 보기 어려워진 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언제 용으로 변할지 몰라 두려워하던 그를 떠올리면 분명 좋은 변화였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겨우 짬을 내서 하루 휴일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 편안한 드레스를 입고 본궁의 옥상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킬리언이 잔뜩 들뜬 표정으로 날 반겼다. 그 뒤에 있는 나타니엘 역시 비슷해 보였다.


‘어째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은데.’

불안함을 애써 누르며 장치 위에 섰다.

금세 장치가 가동되고,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울렁거림이 끝나자 공작성의 후원에 도착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후 폐하.”

기계에서 나오자, 미리 연락받은 리 부인이 날 맞이했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잘 지냈지?”

“물론입니다, 폐하. 다 폐하 덕분이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무래도 테레사 님이 떠나서 그런가 봅니다.”

리 부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십수 년 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안주인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며 잔뜩 기대하던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오라버니랑 이야기 좀 하려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공작님께 말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난 입이 떡 벌어졌다.


“소공작님은 요즘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으세요. 공작님께서 오신 날엔 몰래 도망치기까지 하셨고요.”

“세상에.”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마무리했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어?”

“지금쯤이면 유리 온실에 계실 겁니다. 테레사 님이 떠나신 뒤부터 거길 직접 관리하시거든요.”

참으로 청승맞은 취미였다.

굳이 리 부인의 안내가 필요 없기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라버니의 취미를 곱씹으며 혼자 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드러운 오전 햇살이 온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라버니!”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막시밀리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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