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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지고의 자리 (125/145)


125화 지고의 자리
2023.04.12.



 
나타니엘은 아나이스를 데리고 유리 온실로 향했다.

온실 내부는 흰색 레이스와 장미로 장식해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동그란 테이블에는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테레사와 제이나도 있었고, 예쁘게 차려입은 헨리도 앉아 있었다. 앞질러 왔는지 카시안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킬리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아나이스의 손을 잡고 그에게 향했다.


“내 동생들을 잘 부탁하네.”

킬리언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타니엘이 아나이스의 손을 그에게 건네며 살짝 속삭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해라. 넌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제국의 황녀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한 나타니엘의 말에 아나이스는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들의 마음을 의심하고 웅크렸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울지 마라. 기쁜 날이니까.”

나타니엘은 무뚝뚝한 얼굴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의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킬리언의 모습이 보였다.

아나이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망설임 없이 킬리언의 손을 잡았다.

더는 다른 사람의 애정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굳게 믿어 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


“저 행복해질 거예요. 그 누구보다 더요.”

아나이스의 말에 나타니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드레스를 입은 아나이스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약혼식장에 막 왔을 때는 눈물을 글썽거려서 깜짝 놀랐지만.

킬리언은 기쁨을 숨기지 않고 약혼식 내내 웃고 있었다.

사람이 적어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시안과 나타니엘의 묘한 조합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동문서답하는 듯하지만, 놀랍게도 잘 이어지는 대화가 신기하기만 했다.


“황자님, 왜 그러세요?”

나는 옆에서 그런 아나이스와 킬리언을 물끄러미 보는 헨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까지는 즐거워 보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누님이 결혼을 한다고 절 미워하시진 않겠죠?”

“당연히 아니죠.”

아나이스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걸까?

어쩐지 딱 나이대에 어울리는 귀여운 생각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뀐 거지, 전하에 대한 사랑이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누님이 제일 좋은데…….”

아이의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헨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헨리 전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바뀔걸요.”

내 말에 헨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의미를 알아차릴 때까지 아직 한참 남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왔을 때, 오늘 일을 다시 이야기해 줄 생각을 하며 나는 미소 지었다.

* * *

나타니엘과 나는 빠른 대관식을 위해 밀리아가 준비해 둔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시간도 부족했거니와 나타니엘이 그런 행사에 자존심을 세울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테레사와 카시안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제 장례식이 코앞이었다.

밀리아의 억지 때문에 오랫동안 선황제는 제대로 된 안식도 얻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밀리아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카시안의 물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밀리아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대관식이 가까워지면서 그녀를 처벌하라는 목소리도 커졌다.


“나타니엘은 트레비아 후작가를 백작가로 강등하고,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는 걸로 끝낼 생각인 것 같아.”

밀리아에 대한 처벌은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인 나타니엘이 그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큰 처벌이긴 하지만, 좀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에요.”

테레사의 말에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나라도 헨리를 생각하는 나타니엘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비 전하.”

별궁에 가둔 밀리아를 감시하러 붙여 둔 하녀가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내 물음에 가까이 다가온 하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밀리아 님께서 자결을 시도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테레사와 카시안을 돌려보낸 뒤, 곧바로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은 황성의 외진 곳에 있었지만, 해가 잘 드는 양지에 위치했다.

수수한 단층 건물인 별궁 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침실 앞에서 대기하던 하녀는 날 보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밀리아 님은?”

“해독제를 드시고 막 깨어나셨습니다.”

“내가 왔다고 알려 드리렴.”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곧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오시라 하였습니다.”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벌겋게 변한 밀리아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의 하녀를 물리고 의자를 침대 옆으로 가져와 앉았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편하게 이야기하시죠.”

“날 비웃으러 온 건가?”

그 말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왜 밀리아 님을 비웃겠어요. 우리 사이에 뭐 그리 대단한 감정이 있었다고요.”

밀리아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게 아무 감정도 없다고?”

“제가 선황제 폐하께 대단한 충성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 혈족도 아니었으니까요.”

“내가 네 목숨을 노렸는데도?”

“결국은 실패하셨죠.”

내 말에 밀리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목까지 벌게진 모습은 꼭 내게 원한이 있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원래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녀가 적대시하던 사람은 나타니엘이지 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꼭 원수는 나인 것처럼 괴롭혔지.’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 밀리아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내 말에 그녀의 등이 움찔거렸다.


“앞으로 오늘 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날 죽일 생각이잖아. 너희 따위에게 욕을 당하느니…….”

“나타니엘은 당신을 살려 둘 생각이에요.”

밀리아는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역죄를 저지른 그녀를 살려 둘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당신이 얌전히 지내는 거예요.”

그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내, 내게 왜 그런 걸 바라는 거지?”

“밀리아 님은 헨리 황자 생각은 전혀 안 하시나 보군요.”

“내가 황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데!”

소리를 지르는 밀리아는 정말로 모든 것이 헨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는 듯 보였다.


“당신은 황자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았어요.”

밀리아는 아버지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필립스는 황제이고, 남편이며,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황자는 당신이나 아나이스 황녀도 잃을까 봐 풀이 죽어 있어요. 여기서 당신이 멋대로 죽는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헨리 황자에게 도움이 될까요?”

밀리아의 눈이 물기로 반짝거렸다.

욕심 많은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헨리 황자를 향한 사랑은 진짜였다.

자기가 바라는 것은 곧 헨리가 원하는 것이라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황자는, 헨리는 어떻게 지내는 거지?”

“잘 지내고 있어요. 곧 공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고요.”

아이를 떠올려서 그런 걸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한참을 울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만 헨리를 보여 줄 수 없겠나?”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그간 그녀에게 많은 배려를 했고, 밀리아는 그 배려를 모두 배반했다.

지금은 그녀를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거기까진 해 줄 수 없어요.”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밀리아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왔다.

방을 나오는 순간에도 숨죽인 밀리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 *

선황제의 장례식은 엄숙히 치러졌다.

전날, 밀리아는 비밀리에 동부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엄격한 감시하에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나이스와 헨리는 귀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장례가 끝난 뒤 잠깐 묘소에 들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장례식이 마무리되고, 대관식이 열릴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왜 이런 행사는 매번 아침에 하는 건지 모르겠군.”

새벽에 일어나면서 나타니엘은 험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좀 쉴 수 있겠죠.”

장례식과 대관식을 모두 준비하느라 반쯤 넋이 나간 난 그의 등을 때리며 내보냈다.


“황태자비 전하,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하녀들의 말에 나 역시 침대에서 나왔다. 황제궁에서 준비하는 나타니엘과 달리, 난 황태자궁에서 준비를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어젯밤부터 황후궁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시네스트라가 궁을 다시 복원시키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시네스트라가 궁에 살았던 건 수백 년도 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구식이었다.

차마 화장실에 대해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내부를 전부 뜯어고치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로 인해 내가 더 바빠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욕실로 향했다.

꽃잎을 띄운 욕조에 몸을 담그자 나타니엘과 결혼하고 입궁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눈앞이 캄캄했는데.’

어느새 일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타니엘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 살겠다던 다짐과 달리 서로 마음을 나누기까지 했다.

만일 누가 과거의 나에게 이런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말해 줬다 해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 전하, 이리로 나오시면 됩니다.”

시간이 촉박한지 하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들을 따라 나가자 대관식에 입을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금실로 자수를 넣은 화려한 흰색 드레스는 보기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무, 무거워.”

“조금만 참으세요.”

드레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웠다. 거기에 머리를 올리고, 질릴 정도로 화려한 황후의 관까지 씌우자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 밀리아 님이 선황후보다 더 화려하게 하고 싶다고 해서 관에 박은 보석이 몇 배는 더 늘어났대요.

 
카시안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이쪽입니다, 비 전하.”

투왈렛 룸을 나와 날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대관식은 본궁의 그레이트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귀족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간단한 즉위 선언으로 끝냈을 행사였다.

하지만 비극적인 선황제의 죽음을 잊게 하기 위해 대관식의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도착했습니다.”

황태자궁과 본궁은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대기실로 향했다.

안에는 이미 준비를 마친 나타니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디자인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얼굴 표정이 왜 그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사실대로 고했다.


“관이 너무 무거워요.”

“…….”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관을 살짝 만져 주었다.


“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었나 싶어서 옆에 있던 거울을 확인했다.


“뭐예요, 완전 다른 관이잖아요.”

“그게 내가 기억하던 모양이야. 어머니가 쓰고 계신 그림을 유심히 봤거든.”

나타니엘이 되살린 원래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고 잘 어울렸다.


“시간 되었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럼 가 볼까?”

가벼운 말투가 꼭 산책을 하자는 것 같았다.


“네.”

난 그의 손을 붙잡으며 일어났다.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밀리아 덕분에 아주 오래전에 끝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시종장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식 자체는 짧아서 다행이야.’

규모는 커졌어도 제국의 대관식은 길지 않았다. 간단한 즉위 선언이 끝이었다.

그레이트 홀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귀족들이 모두 일어섰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홀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준비된 단상 위에 올라가 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 나타니엘 시네스트라가 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나타니엘의 즉위 선언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을 하자니 불안감이 생겼다.

‘내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같은 불안.

그때 나타니엘이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같이해 나갈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제이나 시네스트라가 제국의 황후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가 쏟아졌다.

서로가 있기에 잘해 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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