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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행복의 시작 (124/145)


124화 행복의 시작
2023.04.08.



 
나타니엘이 들려준 이야기는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마법사들이 시네스트라의 친구들이었다고요?”

“응. 게다가 그들이 사용한 것도 시네스트라의 힘이었더군.”

“세상에. 그래서 하리를 데려가려는 걸까요? 자기 힘을 빼앗은 벌로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나타니엘은 뚱한 표정이었다.

뭔가 시원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그를 쿡 찌르며 물었다.


“그럼 뭔데요?”

“뭐…… 죽음을 초월한 친구를 갖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들이 도망칠 줄은 몰랐고.”

한마디로 친구로서 데려가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괴롭힌 인간들인데 왠지 쉽게 놓아주는 것 같아서 빈정이 상했다.


“역시 오라버니에게 하리를 보내 주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시네스트라 옆에서 행복하게 사는 꼴은 죽어도 못 볼 것 같아요.”

“글쎄, 별로 행복할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나타니엘의 반응이 덤덤했다.

황실도 디에스 기사단에 휘둘렸으니 마음이 좋을 리가 없는데.


“왜요?”

“그들이 훔친 건 용의 힘이다. 인간의 영혼과 몸으로는 전부 감당하기 어렵지.”

그는 때마침 도착한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물통의 용량은 작은데, 그 이상 물을 넣으면 어떻게 되겠어.”

“넘치겠죠?”

“뚜껑을 닫은 채로 계속 넣으면?”

“어…… 터지나요?”

“맞아. 그들의 몸은 터지기 직전이야. 하지만, 영혼은 훔친 용의 힘 덕분에 소멸되지 않고 그 고통을 모두 느끼는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죽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받으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살아야 하는 거지. 그것도 영원히.”

“오……. 그것참 끔찍하긴 하네요.”

며칠 지켜본바, 시네스트라는 괴팍한 용이었다.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가끔 보이는 특이한 사고방식에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도망쳤을 만큼 그자들도 시네스트라가 싫었다는 거 아니야.”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악역의 최후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지, 악역이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발등에 떨어진 아나이스의 약혼식에 집중해야 했다.

* * *

나타니엘은 업무에 복귀하기 직전, 밀리아가 구금되어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여전히 꼿꼿한 태도의 밀리아는 나타니엘이 나타나자 표정이 굳었다.


“여긴 왜 온 거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대체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습니까?”

“욕심?”

“부족할 것 없이 지내지 않았습니까. 아나이스와 헨리도 있고, 권력도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까지 마음잡고 당신만 바라보겠다 했지요.”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겁니까?”

나타니엘은 아무리 생각해도 밀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어려운 길을 선택한 걸까.


“난…….”

밀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내내 헨리를 황제 자리에 올려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 이후는 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간절하게 원한 것 아닙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요.”

밀리아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멈춰 서자 주변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헨리도, 권력도, 그리고 한때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필립스까지.


“나, 난……. 나는 네 어머니가 싫었어.”

자신을 경멸하는 선황후가 너무 싫었다.

그와 먼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었다. 멋대로 끼어들어서 남편을 빼앗아 갔다.

밀리아가 있었어야 할 자리, 누렸어야 할 권력을 모두 가져갔다.


“황후 자리도, 황태자의 생모 자리도 전부 내 것이었어야 했어.”

밀리아는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내게서 전부 훔쳐 간 주제에 날 경멸하고, 무시하고 죽이려 한 그 여자한테서 되찾아 와야 했다고!”

나타니엘은 밀리아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의 어머니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남편은 괴롭히지 못하고 밀리아를 괴롭힌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밀리아를 망가뜨렸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의 말에 밀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것처럼.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제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고작 과거를 이겨 내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은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이유였다면, 이제 되었습니다.”

밀리아는 멀어지는 나타니엘을 붙잡지 못했다.

분노가 빠져나가자 지독한 상실감이 휘몰아쳤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 *

다음 날, 그동안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부르지 못했던 카시안을 궁으로 불렀다.

테레사도 함께 불렀기에 우리 셋은 아주 오랜만에 모두 모일 수 있었다.


“비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응접실에 들어온 카시안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와 나타니엘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미안, 그간 걱정했지?”

“이렇게 무사하신 걸 봐서 다행이에요. 황후, 아니 밀리아가 황궁 출입을 막아 두지 않았다면 바로 왔었을 거예요.”

“너무 늦게 불러서 미안해.”

내 말에 카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모여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에 용이 나타나서 지금 분위기가 엄청 좋아요. 제국민들한테는 이미 황태자 전하가 황제 폐하나 마찬가지예요.”

카시안은 곧 있을 대관식이 중요하다며 두 눈을 반짝였다.


“선황제께서 그렇게 돌아가셔서 화려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아, 그렇죠. 좀 아쉽긴 하네요. 그런데…….”

카시안은 주변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나이스 황녀님은 어디 계세요?”

“어?”

“아니, 이 자리에 안 계셔서요. 좀 걱정돼서…….”

“어머, 카시안. 아나이스 황녀님과 친해졌구나?”

테레사는 짓궂은 얼굴로 카시안을 쿡 찔렀다.

사실 테레사는 아나이스와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할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 카시안과 해야 할 말도 망설이는 아나이스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런 둘이 황성에 큰일이 터지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에 꽤 친해졌나 보다.


“사실 아나이스 황녀의 약혼식 때문에 불렀어요.”

“약혼식이요?”

원래대로라면 킬리언과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결혼식은 공국에 가서 하기로 했어. 그런데 거기는 나랑 나타니엘이 참석하기 어려우니까.”

내 말에 테레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금 밀리아와 후작가에 대한 분위기가 안 좋아서 약혼식이라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리끼리만 작게 하면 어떨까 해.”

“작게요?”

결혼식 대신이니 크고 화려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정성이라도 가득 쥐여 주고 싶었다.


‘밀리아 님마저 그렇게 되었으니.’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약혼식 날짜는 언제예요?”

“최대한 빨리. 장소는 그냥 황태자궁에서 할까 해. 두 사람이 만난 곳이 여기거든.”

“어머.”

원래대로라면 본궁의 홀에서 열려야 했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어려울 것이 뻔했다.

황족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마저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들 박복한 아나이스의 삶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게 뭐죠?”

카시안은 발랄한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역시 그녀가 있으니 분위기가 밝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웃으며 당장 준비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 * *

아나이스는 헨리와 함께 조용히 지냈다. 약혼자인 킬리언과의 만남도 자제하고 있었다.

헨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황실에서 자란 이상 그럴 리가 없었다.

밤마다 혼자 자지 못하고 아나이스의 침실로 찾아오고는 했다.


‘나야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큰 애정이 없었지만 헨리는 아니니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동생이니 그만큼 상심도 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헨리가 벨리시아 영애와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자신이 헨리를 보러 가지 못하던 시기에 카시안이 그를 돌봐주어서 꽤 가까워졌다.


‘나 말고도 친한 사람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나이스는 소외감을 느꼈다.

게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테레사와 제이나도 꽤 바빠 보였다.

어쩌면 다들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역자의 딸이니 거리를 두는 게 나을지도.’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려 했지만…….


“섭섭하다고 생각하다니, 나 따위가.”

아나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한심함을 탓했다. 처벌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황녀 전하, 킬리언 경이 찾아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라 하세요.”

킬리언에게는 미안할 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함께 온 사절단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마탑주 정도 되는 권력자이니 공국에서도 그의 부인 자리를 바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자꾸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아나이스?”

문을 열고 들어온 킬리언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아나이스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내밀었다.


“잠깐 시간이 된다면, 밖에 나갈까요?”

“시간이야 많지만.”

밖에 나갔다가 괜히 눈총받을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잔뜩 들뜬 킬리언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킬리언과 정원을 산책하던 아나이스는 익숙한 주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여긴 황태자궁으로 가는 길 아닌가요?”

“맞습니다. 비 전하께서 유리 정원에 초대하셨거든요.”

“비 전하께서요?”

“예. 그전에 잠시 들를 곳도 있습니다.”

킬리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황태자궁에 도착하자 하녀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

당황한 아나이스를 두고 킬리언은 자연스럽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쪽입니다, 황녀 전하.”

하녀들은 영문을 모르는 아나이스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긴 목욕이 끝나고 몸에 향기로운 향유까지 바르고 나자 투왈렛 룸으로 안내받았다.

안에는 드레스와 장식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시안이 벌떡 일어났다.


“황녀님, 이리로 오세요.”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나이스를 끌고 와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연한 크림색의 드레스는 고급스러운 광택이 흘렀다.

가슴과 허리 부분을 섬세하게 짠 레이스로 장식해서 단순한 디자인에 화려함을 더했다.


“이것도 해 보세요.”

카시안은 신이 난 얼굴로 이것저것 장신구를 가져와서 황녀에게 대 보기도 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단장을 마친 아나이스의 모습에 카시안은 물론, 수발을 들던 하녀까지 다들 감탄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이게 대체.”

아직도 얼떨떨해하며 아나이스는 주변을 살폈다.

다들 한껏 들뜬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나?”

투왈렛 룸 밖에서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안은 냉큼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나타니엘은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을 아나이스에게 건넸다.


“전하, 이게 다 뭐예요?”

“아직도 모르겠나? 비밀 약혼식이야.”

나타니엘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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