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뜻밖의 안녕
(123/145)
123화 뜻밖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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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뜻밖의 안녕
2023.04.05.
내가 나타니엘을 안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전하!”
아직 새끼 용 모습의 나타니엘은 본 적 없는 아나이스와 킬리언만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잠이 들었나 봐요.”
정확히는 창피해서 잠든 척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죽은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나타니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재빨리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아 버렸다.
- 잠들었다고 해.
그게 그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나는 뻔뻔하게 잠든 척하는 그를 데리고 황태자궁으로 돌아갔다.
가는 내내 아나이스와 킬리언의 시선이 나타니엘에서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니엘이 뽀르르 날아서 이불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뭐예요. 어딜 숨어요.”
“…….”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훌렁 뒤집어 꼬리를 잡아당겼다.
“이, 이거 놔!”
나타니엘은 날개와 다리를 파닥거리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순 없을걸요?”
“끄, 끝까지 모르는 척할 건데!”
너무 거창한 흑역사였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잠시 그를 놓아주었다.
잔뜩 뿔이 난 그가 베개를 주먹으로 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닦았다.
“그나저나 왜 사람 모습으로 안 돌아오는 거예요?”
“어?”
나타니엘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는 몇 번 몸을 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마력이 없는 거예요? 테레사를 불러서 도움을 받으면…….”
“아니, 마력이 없는 건 아니고…….”
“내가 설명하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침대 반대편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시네스트라가 나타났다.
“당신이 여긴 왜…….”
“너희가 일을 충실히 했으니까, 도와주러 온 거야.”
그녀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 모습으로 안 돌아오지?”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야. 넌 제이나의 죽음을 보고 더는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생각이 네 마력을 움직인 거지.”
“그럼, 나타니엘이 완전히 용이 되었다는 거예요?”
놀라서 나타니엘을 돌아보자 그는 담담하니 말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던 것 같았다.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이대로 영영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자, 자. 그렇게 실망할 것 없어. 지금 나타니엘이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용의 힘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지 완전히 용으로 살겠다고 결정해서가 아니니까.”
“그럼 방법이 있단 말인가?”
“내게 힘의 일부를 넘기면 돼.”
시네스트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어 놓았다.
“용의 힘은 용들끼리 나눠 가져야 문제가 생기지 않거든. 괜히 욕심 많은 인간에게 넘겨줘 봤자 이상한 일만 생길 뿐이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니엘의 힘을 받아 가려는 시네스트라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보였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나타니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알겠다. 얼마나 넘기면 되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넘기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느낌이 오면 그때 멈추면 돼.”
시네스트라가 손을 뻗자, 나타니엘이 짧은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검붉은 마력이 천천히 시네스트라에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타니엘은 시네스트라에게서 손을 뗐다.
“너…….”
뭔가 말하려던 나타니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마력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그는 새끼 용의 모습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네 마력의 일부는 이 황성과 이어져 있다고. 그런데 네가 그 황성을 부쉈으니 마력 운용이 잘될 리가 없지.”
“아…….”
모든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시네스트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건물 하나 복원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내가 다시 만들어 줄게. 적당한 핑계는 생각해 뒀어?”
“그, 글쎄요.”
적당한 핑계라.
“용의 축복으로 무너졌던 건물이 돌아왔다?”
“그걸 누가 믿어.”
나타니엘의 대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제도의 광신도들을 못 봐서 그런 것이다.
“아마 믿을걸요.”
“그럼 그거 믿고 고쳐줄게.”
시네스트라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이상했다.
그녀가 이렇게 좋아할 일이 있었던가?
“아, 그리고 고쳐 주는 대신 갖고 싶은 게 있는데.”
“갖고 싶은 거요?”
“응.”
나타니엘의 힘도 가져갔으면서 원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도움 없이는 방법이 없으니 얌전히 있기로 했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도와드릴게요.”
내 대답에 시네스트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리를 갖고 싶어.”
“예?”
뜻밖의 요구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테레사로부터 디에스 기사단의 단장인 하리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완전히 넋이 나간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녀를 풀어 주려는 건가?”
“풀어 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시네스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붙잡았는데.”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나타니엘도 움찔 놀랐다.
왠지 더 물어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건물 고치고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소공작에게 말 좀 전해 주고.”
그녀는 손을 휙휙 흔들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용은 무서운 동물 같아요.”
“응.”
“전 나타니엘이 사람인 게 좋아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어쩐 일로 바른 소리를 하는 나타니엘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
잠시 후, 나타니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아나이스와 킬리언이 찾아왔다.
나타니엘은 굳은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여전히 창피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라버니,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나이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타니엘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 다들 날 도와주어서 고맙다.”
그 대답에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지 몰랐다.
“뭐야, 왜 다들 말이 없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나타니엘 몰래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나이스가 먼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이렇게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음.”
곧 허브차와 과일이 들어왔다.
우리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나이스는 놀라운 말을 꺼냈다.
“이번에 헨리와 함께 공국으로 갈까 해요.”
원래대로라면 헨리는 내년쯤에 필립스, 밀리아와 함께 공국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멈춘 상황이었다.
“그 말은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갈 거라는 뜻인가?”
“아니요. 결혼식은 공국에서 하고 싶어요. 어머니가 저런 상황인데, 황성에서 결혼식을 했다가는 말이 많겠죠.”
그녀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황제를 시해한 밀리아를 살려 두는 것에도 말이 많았다. 거기에 그녀의 딸인 아나이스의 결혼까지 황성에서 강행한다면 분명 반발이 있을 것이다.
“결혼식은 가족 행사인데, 그곳에 가 버리면 황녀님 혼자 참석해야 하잖아요.”
난 아나이스에게 결혼식을 작게라도 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완고했다.
“지금도 후작가와 어머니를 많이 봐주고 계신다는 걸 알아요. 이 이상 잘해 주시면 그걸 이용해서 오라버니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비록 나타니엘이 황태자였지만 황제 시해로 인해 갑작스럽게 계승하게 되었고, 아직 제대로 대관식을 올리지도 못해 어수선했다.
귀족들 중 일부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나타니엘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전부 맞는 말이긴 하군.”
나타니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렇게 아나이스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간다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몇 달 뒤일지, 몇 년 뒤가 될지 몰랐다.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할 말을 마친 아나이스와 킬리언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섭섭해요.”
나는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나타니엘 역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는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훌쩍 커 버린 느낌이에요.”
아나이스가 그런 속 깊은 이야기까지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고민했다.
아나이스는 지금껏 늘 불행만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이제 막 행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역시 아무것도 없이 보내기는 싫었다.
“약혼식.”
“응?”
“약혼식을 하는 건 어때요? 그러면 규모도 작고, 몇 명만 불러서 할 수 있잖아요. 공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고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군.”
“내일 킬리언 경이랑 날짜를 잡죠. 참석할 사람을 정리하고, 유리 정원을 꾸며서 거기서 약혼식을 여는 거예요.”
짧게 식을 올리고 식사와 술자리로 이어지는 스케줄을 잡으면 좋을 것 같았다.
“드레스를 최대한 빨리 구해야 하고, 장식은 간단하게만…….”
한참 계획을 떠들던 나는 나타니엘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분명 소박하게 하자고 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크고 화려한 계획이 된 것 같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의 잔소리를 걱정하던 나는 짧은 말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 그게 다예요?”
“더 혼내 주기라도 바라나?”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타니엘은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쓸더니 토닥거렸다.
“내 부인은 말을 해도 안 들으니까, 내가 더 잘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거든.”
“으…….”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나타니엘이 내 몸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이렇게 건강해서 다행이야. 그때는 정말 큰일이 생긴 줄 알고 놀랐어.”
“너무 과하게 놀랐죠.”
“으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서 심장소리를 듣자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응.”
내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서늘한 체온은 위로가 되었다.
가만히 그 순간을 즐기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왜 그렇게 놀란 거예요?”
“아까?”
“시네스트라 님한테 힘을 넘겨줬을 때요.”
“아……. 그건.”
나타니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그녀의 사념이 흘러들어 왔다.”
* * *
시네스트라는 오랜만에 온 황성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발걸음으로 황후궁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해 몸을 숨긴 채였다.
무너져 내린 건물 앞에 선 시네스트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흐흐흠.”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건물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황후궁이 나타났다.
시네스트라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이곳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기억을 떠올리며.
황후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연. 데리러 왔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시네스트라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연의 영혼을 붙잡았다.
“이제 돌아가자.”
그녀는 홀가분한 얼굴로 황후궁을 나섰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테니, 친구들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시네스트라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