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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성녀와 검과 마법 (122/145)


122화 성녀와 검과 마법
2023.04.01.



 


“사실 누워 있는 사이에 다른 시네스트라를 만났거든요.”

난 놀란 사람들에게 꿈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검은 대체 뭘까요.”

일반적인 검으로는 용에게 상처는커녕 흠집도 내기 힘들었다.


‘아니지.’

저번에 갔던 히에라에 용을 잡았다는 검을 모셔 둔 신전이 있었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용을 신성시하는 제국에 그런 게 있었다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히에라의 신전에 보관된 검이 있어요. 옛날에 폭주하던 용을 봉인했다는 검이에요.”

“히에라에?”

아버지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거기 신관이 좀 이상한 물건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

“네, 저도 용을 모시는 신전에 그런 검이 있다는 게 이상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우리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번에도 킬리언이 수고해 주었다.

그의 마력으로 단번에 검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갖고 있던 마석을 거의 다 사용해서 검을 나타니엘에게까지 날리는 건 불가능했다.


“윈터스 공작저에 남아 있는 마석을 모아 보죠.”

“비 전하, 그건 테레사 양을 데리러 갈 때 거의 다 썼습니다. 계산해 보니 필요한 마력량에 비해 개수가 아주 아슬아슬하게 부족합니다만…….”

어디 마석이 나올 만한 구석이 없을까, 궁리하던 나는 벽을 보았다.


“황제의 침실 벽엔 마석이 들어가 있잖아요.”

“아! 그래, 폐하께서 암살이 두렵다며 예전에 그렇게 벽을 만드셨지.”

정확히는 암살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감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겠지만.

나는 당장 시종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비 전하.”

“지금 당장,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 벽을 뜯어 마석을 채취하게.”

“예?”

시종장이 놀란 표정으로 다시 명령을 확인했다. 강경한 내 말에 시종들은 벽에서 마석을 캐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죠?”

“예…….”

킬리언은 쌓여 있는 마석 덩어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역시 황제가 이 정도로 집어넣었을 줄은 몰랐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서로 이렇게 못 믿고 살 거였으면 대체 왜 결혼까지 한 거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관계였다.

덕분에 마석을 얻게 되었지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황태자 전하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겁니까? 성력과 마력은 완전히 다른 힘인데.”

“그, 그건…….”

킬리언의 순수한 학문적인 질문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런, 제가 곤란한 질문을 드렸군요.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나타니엘이 돌아오면 물어보세요. 아마 킬리언 경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길 엄청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킬리언은 살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무얼 하는지 나타니엘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이쪽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에 별일 없이 사라져서 다행이긴 했다.


“곧 준비가 끝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할 만한 것도 없는걸요.”

나야 그냥 옆에서 지켜만 보고, 상황이 괜찮은지 확인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잘 안 될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킬리언의 말에 난 잠깐 턱을 쓸었다.

평생 살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민하거나 걱정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로 돌아오고 나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고 나 자신을 갉아먹는지 깨달았다.


“그런 걸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 1년 전만 해도 커다란 용과 결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요.”

내 말에 킬리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미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내일을 모르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일 테니까.

* * *

드디어 긴 준비가 끝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여전히 나타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는 어디에 계실까요?”

“글쎄요.”

킬리언의 물음에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이대로 영영 안 오시면 어떻게 하죠?”

“흐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첫날 이후에는 브레스를 쓰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일 첫날처럼 계속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면 사태를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픔의 5단계라는 게 있지 않나.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분노까지는 보였으니까, 이제 협상과 우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불러내야 하지?’

평소 나타니엘을 꼬여 내거나 칭찬할 때면 늘 달콤한 음식을 보상으로 주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타니엘을 그런 걸로…….’

“단걸로 황태자를 끌어내 보지.”

내가 차마 내놓지 못한 의견을 아버지는 단숨에 꺼내 버렸다.


“시네스트라도 단 음식을 좋아하던데. 제도 전체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면 나올지도 모르지.”

“나쁘지 않은 의견이에요.”

여전히 내가 망설이자 아나이스까지 나섰다.


“원래 오라버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단걸 찾고는 하셨어요.”

그녀까지 말을 보태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황태자의 위엄을 지켜 주려 했다고 위로하며.


“용이 나타난 걸 핑계로 기념일을 하나 만들어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제안에 난 잠시 망설였다.

선황제의 장례도 치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무언가를 기념하고 축하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아직 국장도 치르지 않은 상황이라 기념일까진 좀 무리일 것 같아요.”

“그렇다면 신전에서 일을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 말에 아나이스가 의견을 덧붙였다.

꽤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신전에서는 용이 나타난 상황을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어 할 터이니 거절할 것 같지도 않았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비 전하, 제가 신전과 이야기할게요.”

내가 찬성하자 아나이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진하기로 했다.

그간 황후와 신전의 관계가 좋았던 덕에, 아나이스도 고위 신관들과 연이 있어서 일은 쉽게 진행되었다.

그날 오후, 신전에서는 용이 나타난 것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초월자께서 우리 제국을 축복하기 위해 걸음하셨습니다. 그분의 강림을 기뻐하며 신전의 물품을 풀겠습니다.]

 
그러면서 창고의 문을 열고 밀가루와 설탕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그것으로 빵과 쿠키를 구웠다.

제도 전체에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축제가 시작된 지 3일째가 되던 날 밤.


“비 전하!”

헐레벌떡 뛰어온 마틴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전하께서 하늘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 * *

우리는 황성의 외진 곳에 있는 높은 탑 위에 모였다.

여전히 용 모습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나타니엘이 보였다.

검을 건네받은 테레사가 거기에 성력을 불어넣었다.

킬리언은 꼼꼼하게 검이 날아갈 경로를 확인하며 수식을 중얼거렸다.

옆에서 가만히 그걸 구경하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걸 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

원리는 나타니엘이 나에게 가르쳐 준 일격 필살 마법과 비슷했는데, 더 복잡하고 어려워 보였다.


“그야, 다들 이렇게 마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다른 방법으로 알려 줬어요.”

이대로라면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정밀도가 많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그를 맞히지 못한 검이 어디로 날아가 없어져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포물선처럼 날아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단숨에 쏘아 올려서 직선으로 날아간다는 느낌으로…….”

나타니엘이 나에게 알려 주었던 마법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킬리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전문적인 영역의 이론을 설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하지요.”

킬리언은 단호한 어조로 의견을 제시했다.


“비 전하께서 검을 날리시면 제가 보조를 하겠습니다.”

“예에?”

“아, 원래 마법 시동보다 마력의 운용이 더 어려운 겁니다. 이번 마법을 예로 들자면, 검이 날아가는 동안 마력량을 제어하는 게 어렵지, 마법 시동 자체는 별거 아니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탑주인 그를 두고 내가 이 마법을 시전한다는 게 영 불안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마력을 사용하셨고, 그걸 비 전하께 알려 주신 거니까요. 마법 시전은 문제없을 겁니다.”

그 뒤로도 킬리언은 나타니엘의 이론이 어떤 것일지 추측하거나, 어떤 점에서 다른 마법 이론과 다른지 한참 떠들어 댔다.

물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결국 보다 못한 아나이스가 나서서 그를 말렸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떴죠?”

“킬리언 경, 나중에 나타니엘하고 이야기하세요.”

그래도 결론만 추려 보면 나타니엘의 마법이 더 정확도가 높다는 말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그의 설득으로 결국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킬리언의 설명에 따라 묵직한 검을 양손으로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알려 준 대로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공중에 띄우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 한 번에 모든 게 달렸다는 생각이 들자 더 긴장되었다.

저 멀리 나타니엘이 날갯짓을 하며 빙글, 도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검 끝을 그에게 맞추었다.

몸집은 컸지만, 꽤 멀리 있어서 잘 맞힐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 내 마법은 빗나간 적 없어.

 
언젠가 마법을 알려 주며 호언장담하던 나타니엘이 떠올랐다.


‘내가 아니라 대마법사인 당신을 믿는 거라고.’

난 숨을 멈추었다가 검을 힘껏 날렸다.

처음 다뤄 보는 대량의 마력이 폭발하듯 검에서 뿜어져 나갔다.

킬리언은 검을 끝까지 바라보며 마력을 조절했다.

일직선으로 주욱 날아간 검이 나타니엘의 옆구리에 쿡 박혀 들어갔다.


“성공이다!”

적어도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용의 비늘을 뚫는 데는 성공했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타니엘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거, 검이 너무 작아서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건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마틴이 의견을 내어 놓았다.


“아니면 성력을 더 넣었어야…….”

그때였다.


“다들 저길 보세요!”

내 외침에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타니엘이 눈부신 하얀 빛에 둘러싸였다.

그러더니 빛이 사방으로 퍼져 별 가루처럼 반짝거리며 제도로 떨어져 내렸다.

수도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나와 눈물을 흘리며 용을 찬양하기 바빴다.


“저기!”

그 빛들 사이로 무언가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나타니엘!”

나는 몸에 남아 있는 마력을 이용해 수색 마법을 사용했다.

가까이서 이질적인 작은 기운이 느껴졌다.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작은 새끼 용이 보였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서 그를 안아 올렸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닐까?


“나타니엘!”

잠시 후, 새끼 용이 부스스 눈을 떴다.


“뭐야, 나 죽은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진짜 죽을 뻔한 건 난데, 지금 다 죽어 가는 소리를 하는 게 나타니엘이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제이나?”

“멋대로 죽이지 말라고요.”

그는 놀랐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곧 눈물을 왈칵 쏟으며 내 품으로 안겨 들었다.


“다시는,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을 잃은 그가 불안해했던 걸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직 튼튼하다니까요.”

“응.”

훌쩍이는 그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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