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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아직 안 죽었다고요! (121/145)


121화 아직 안 죽었다고요!
2023.03.29.



“시, 시네스트라?”

갑자기 황궁 하늘에 나타난 용을 보며 윈터스 공작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노망이 났거나.


“고,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사색이 된 마틴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벌어진 일을 쏟아냈다.


“황태자 전하께서 밀리아 님을 말리겠다고 가셨는데, 갑자기 황후궁이 무너지고 용이 나타나서…….”

나타니엘이 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둘은 어렵지 않게 용과 나타니엘의 연관성을 떠올렸다.


“설마 저게 황태자 전하란 말이냐?”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요만하지 않습니까.”

마틴은 손으로 자신이 봤던 나타니엘의 크기를 가늠하며 반론을 펼쳤다.

공작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입을 쩍 벌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 게 보였다.


“엎드려!”

공작의 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몸을 숙였다.

쾅, 소리와 함께 브레스가 황후궁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하지만 곧 검푸른 막에 흡수되었다.

바짝 약이 올랐는지 용이 굉음을 내며 한 번 더 브레스를 내뿜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기, 기사들을 황후궁으로 보내야 합니다. 거기에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 모두 계신다고요!”

“그걸 왜 이렇게 늦게 말해!”

공작은 근처에 있던 기사들과 함께 황후궁으로 향했다.

몇 번 브레스를 날린 용은 지쳤는지 다행히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황급히 황후궁에 도착한 공작은 의외로 멀쩡한 사람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나이스와 황후, 헨리까지 뒤늦게 나타난 킬리언 덕분에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들 사이에서 죽어 가는 제 딸을 발견하고 기절 직전이 되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작의 물음에 대답할 만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때 아나이스가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비 전하의 상태가 위중하니, 일단 의사를 찾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하겠습니다.”

차분한 아나이스의 설득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일단 가까운 황제의 궁으로 피한 뒤, 제이나를 손님 방에 눕히고 의사를 불러 살피게 했다.

최고위 황족 대부분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이상, 그다음 권력자라 할 수 있는 공작과 황녀, 마탑주가 방에 모여 대책을 논의해야 했다.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아나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아까 보신 용은 황태자 전하가 맞습니다.”

설마 했던 공작은 아나이스의 확언에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올렸다. 그녀는 잠깐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비 전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마력이 폭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마탑주의 의견은 그렇습니다.”

“킬리언 경, 다시 돌아올 방법은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용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요.”

공작은 곧바로 시네스트라를 떠올렸다.

같은 용이라면 도와줄 방법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


“말하지 않았지만, 저희 공작성에 고대 용이 있습니다.”

“고대 용이라니요. 설마 시네스트라를 말하는 건가요?”

“예. 그녀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일단 사람을 보내야겠네요.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윈터스 가문이 갖고 있는 포탈은 한 방향으로만 이동 가능했다.

즉 공작성에서 수도로는 올 수 있지만, 수도에서 공작성으로는 갈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5일은 걸릴 것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킬리언이 앞으로 나섰다.


“제 마력이라면 단숨에 그 거리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 가서 소공작에게 전하면 되겠지요?”

“네.”

아나이스는 고마움에 어쩔 줄 몰랐다.

킬리언은 언제나 그녀에게 도움만 주었다. 자신이 마치 짐이 된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황녀님.”

그는 아나이스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빛무리와 함께 킬리언의 형태가 흩어졌다. 순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진 것이다.


“흐흠. 그동안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지요.”

“네.”

“황녀 전하께서는 일단 궁을 정리하십시오. 저는 귀족들을 진정시키고 시간을 끌겠습니다.”

“시간이요?”

“저걸 황태자 전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 그 마탑주가 브레스를 막아 준 일은 황태자 전하께서 하신 거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무너진 건물 잔해에 갇혀서 구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발표하겠습니다.”

“아. 네…….”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알고 있었다. 그 브레스를 막아 준 건 킬리언이 아니었다.

아나이스는 방금 제 앞에서 바스러진 남자를 떠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그의 양팔이 부서져 나갔다. 두 번째 브레스에 그는 욕설을 내뱉더니, 자신을 돌아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뭐라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이 정리되면 가족을 찾아 사례해야지.’

목숨을 걸고 자신과 어머니를 지켜 준 사람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아나이스는 몇 번이고 기억을 곱씹었다.

어쩐지 마음이 쓰라렸다.

* * *

아나이스와 윈터스 공작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공작은 기사들과 함께 무너진 황성에서 사람을 구출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테레사와 함께 킬리언이 포탈을 타고 함께 돌아왔다.


“시네스트라는?”

“그녀는 직접 이 일을 도와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은 조언 몇 가지를 해 주었습니다.”

킬리언의 대답에 공작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조언이라도 해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시밀리안은 이 위험한 곳에 테레사를 보낸 게냐.”

“시네스트라 님이 제가 필요할 거라고 하셨어요. 비 전하는 어디에 계시죠?”

“위층 침실에 있단다.”

셋은 제이나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테레사는 시네스트라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네게 성력이 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너 때문에 비틀린 일들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을 터이니.

 
그러고 나서 제이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성력에는 기본적으로 치유 능력이 있다고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제이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테레사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물어봤자 알려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어느새 제이나가 누워 있는 침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쓴 약초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차 있었다.

테레사는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로 제이나 옆에 섰다.

그녀의 손을 살짝 잡자 마치 시체처럼 차가웠다.

테레사는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았다. 눈을 감고 성력을 불어넣었다.

천천히, 부드러운 빛이 제이나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그 방법이 뭐냐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제이나가 눈을 떴다.


 

* * *

나는 검은 공간 안에서 나타니엘의 만행을 입을 벌린 채 지켜보았다.


“갑자기 왜 저렇게 막 나가는 거죠?”

원작에서 테레사가 죽었을 땐 그냥 제국을 떠나는 걸로 끝났는데?

날 내려다보던 가짜 시네스트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야 넌 그냥 친구 사이로 끝난 게 아니잖아.

“아.”

그렇다고 저렇게 폭주하며 궁을 부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저나 다들 무사한 거겠죠?”

- 뜻밖의 존재 덕분에.

아래로 내려온 시네스트라는 가만히 내 옆에서 함께 화면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 넌 네가 죽은 거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

“아직 죽은 거 아니라면서요.”

- 거의 죽은 상태이긴 해. 저쪽에 있는 시네스트라가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렸다면 살 수는 있겠네.

“그런 말을 들으니 당신보다 저쪽 시네스트라가 더 신경 쓰입니다만.”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용들의 특기인가 보다.

서로 다른 시네스트라 둘 다 이러는 걸 보면.

어느새 화면은 브레스를 쏘고 공중으로 사라진 나타니엘을 찾아내 비췄다.

그는 넓은 제도의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몰려나온 제국민들은 그의 모습에 열광했다.

전설 속 용이 눈앞에 나타나자 감격한 것 같았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광신도인데 괜찮은 걸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가짜 시네스트라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 하여간, 인간들이란.

“아니, 왜 애먼 인간들에게 그러세요.”

- 같은 인간이라고 편들긴.

그녀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


- 이곳은 어땠어?

다짜고짜 어땠냐고 물으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질문을 정정했다.


- 이 세계로 다시 돌아와서 어땠냐고.

“저는…….”

열심히 살았다.

악녀 제이나로 살았던 첫 번째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뛰어들었고,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

모두가 행복하다면, 나 역시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열심히 살아서 후회는 없어요. 지내는 내내 행복하기도 했고.”

- 잘했네.

시네스트라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예전의 너와는 확실히 달라졌구나.

“사람은 발전하는 동물이라고요.”

우리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구슬프게 울며 빙빙 하늘을 돌기만 했다.

인간의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날 그리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진짜 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 시간이 맞으면.

“시간이 못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 지구로 돌아가겠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구로 돌아가 봤자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몇 없었다. 무엇보다 나타니엘이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 확실하지 않다……. 오, 저길 봐.

가짜 시네스트라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킬리언과 함께 온 테레사가 보였다.


“아니, 이렇게 위험한 곳에 테레사는 왜 온 거야?”

- 그야 널 살리려고 온 거지.

“테레사가요?”

- 그래.

테레사의 성력을 사용하면 치료할 수 있는 걸까?


- 곧 살아날 것 같은데 준비해 둬.

“자, 잠깐만요. 나타니엘을 인간 모습으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다급한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몸이 뒤로 휙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양발에 힘을 주며 버텼다.


‘아직 대답을 다 듣지 못했는데!’

그녀는 나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넌 방법을 다 알고 있어. 검도, 성녀도, 마법도 다 찾았잖니.

“뭐?”

그게 뭐예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뒤로 끌려가면서 나는 비명처럼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래서 그 방법이 뭐냐니까!”

눈을 뜨자 놀란 표정의 아버지와 테레사가 보였다. 그 옆에 아나이스와 킬리언도 보였다.


“헉, 살아났네?”

“제이나!”

아버지가 날 확 끌어안으며 수염으로 까칠해진 뺨을 얼굴에 비벼 댔다.


“으악, 따가워요!”

“따가워도 참아, 요 녀석아. 대체 이 아비를 얼마나 놀라게 해야 속이 풀리겠느냐!”

“죄, 죄송해요.”

눈물 섞인 아버지의 말에 난 얌전히 형벌을 받기로 했다.

테레사도 아나이스도 훌쩍이는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그나저나 나타니엘은…….”

“전하께서는 용이 되어 하늘을 날고 계십니다.”

때마침 삐이― 하는 구슬픈 울음이 저 멀리서 들렸다.

그간 있었던 일을 아나이스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킬리언에게 물었다.


“시네스트라에게 다녀왔다면, 혹시 그녀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은 안 알려주었나요?”

“그분께서는 비 전하가 다 알고 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

이 용도 저 용도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 가짜 시네스트라의 말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 넌 방법을 다 알고 있어, 검도, 성녀도, 마법도 다 찾았잖니.

 
성녀는 테레사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검과 마법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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