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용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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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용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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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용의 운명
2023.03.25.
테레사는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막시밀리안이 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설마, 나…….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 부끄러워서 밤새 이불을 차느라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제 무사히 황태자가 궁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머릿속은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로 가득 찼다.
“테레사 님, 식사 시간입니다.”
문을 두들기는 하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원래대로라면 리 부인이 자신을 부르러 왔겠지만, 어제 일 때문인지 다른 사람을 보낸 것 같았다.
‘하필 공작님이 수도로 가셔서…….’
윈터스 공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향한 탓에 식사 자리에 둘밖에 없었다.
테레사는 긴장한 채로 식당으로 향했다. 막시밀리안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은 잘 보냈어?”
“어, 어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푹 쉬어.”
“응.”
테레사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식사를 시작했다.
왜 이렇게 머릿속이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마음은 전부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주쯤에 수도로 돌아가는 건 어때?”
“응?”
“제이나가 곧 황후가 될 텐데 일손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렇지.”
막시밀리안은 다음 계획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을 끝내고 테레사는 방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앉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추운 북부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와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겨울이 끝난 거구나.”
제도로 돌아가면 온통 봄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이 추웠던 북부의 겨울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따스하고 화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감정은 금방 잊힐 것이라고, 테레사는 생각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문을 벌컥 열고 리 부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테레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감이 순식간에 몸을 지배했다.
“비, 비 전하께서……!”
* * *
그날, 나타니엘은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귀족들이 트레비아 후작가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온 것이다.
“으으……. 대체 이 사람들은 잠도 없나 봐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제이나가 빵을 베어 물며 투덜거렸다.
나타니엘도 주스를 쭈욱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득이 되는 일이라면 아주 열심이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금방 다녀올게.”
“네에……. 저도 일단 급한 업무는 처리하고 있을게요.”
그녀의 인사를 받고 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많은 삭제 귀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트레비아 후작가에서 떨어질 이권들을 노리고 있었다.
희망과 기대가 가득한 얼굴들을 보며 나타니엘은 가볍게 혀를 찼다.
저들의 기대를 채워 준다는 사실이 묘하게 거슬렸다.
“회의를 시작하지.”
나타니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길고 지루한 회의였지만, 나타니엘은 인내심 있게 참아 주었다.
끝이 있긴 할까 싶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밖에서 급하게 마틴이 자신을 찾았다.
나타니엘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밀리아 님이 자해 소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진정시키러 가셨고요.”
“하……. 혼자 갔나?”
“주변에 기사들이 있긴 합니다.”
“일단 내가 가 보지.”
나타니엘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황태자 전하!”
“아나이스.”
그는 헨리의 손을 잡고 달려오던 아나이스를 마주쳤다.
“어머니가 헨리를 보여 달라고 해서요.”
“내가 안고 가지.”
나타니엘은 헨리를 덥석 들어 올리고 아나이스와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것 같은데 불안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화, 황녀 전하?”
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황녀를 보았다.
“분명 방금 황녀 전하가 안으로…….”
기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나타니엘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용할 생각조차 못 했다.
정신없이 달리자 저 멀리 문이 활짝 열린 황후 방이 보였다.
그리고…….
“제이나!”
아나이스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뒤로 물러서자 제이나의 복부에서 피가 쏟아졌다.
서서히 뒤로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헨리를 내려놓고 제이나에게 달려갔다.
“제이나, 제이나!”
손에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가득했다.
늘 건강해 보이던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안 돼. 내 말 들려? 제이나.”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몸에서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그녀의 몸 위에 쓰러졌다.
‘아파.’
마치 제 심장이 뜯겨 나간 것처럼 아팠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바닥이 없는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듯 괴롭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인간에 대한 실망이 그를 덮쳤다. 머릿속에서 스러져 가는 제이나의 모습이 반복되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눈앞에서 상대를 잃은 충격은 견고했던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충분했다.
“아, 아아아아.”
흐느낌은 비명으로, 슬픔은 분노로 순식간에 변했다.
나타니엘의 몸이 검붉은 빛으로 둘러싸였다.
“오, 오라버니!”
뒤늦게 달려온 아나이스의 부름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텅 빈 붉은 눈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방 안 가득 붉은 빛이 차올랐다.
황후궁의 벽과 지붕이 부서지고, 커다란 빛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 드래곤…….”
거대한 성체 드래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기와 분노로 불타오르는 붉은 눈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 시선을 마주친 아나이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붉은 눈에는 파괴욕이 넘실거렸다.
“누, 누님. 형님이…….”
“헨리, 쉿.”
아나이스는 치마를 찢어 제이나의 배를 감쌌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주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피를 흘려서는 금방 죽을 거야.’
나타니엘이 이성을 잃었으니 지금 제이나와 헨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나타니엘이 용으로 변하면서 황후궁이 반 이상 부서졌기에, 금방이라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킬리언이 준 반지를 만졌다. 급한 일이 생기면 부르라며 주었던 반지였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그때까지 나타니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겠다.
아나이스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이나를 등에 업고 헨리와 함께 중앙 기둥 근처로 향했다. 지진이 나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기둥이니 이 근방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다.
“헨리, 내 말을 잘 들어.”
아나이스는 킬리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반지를 빼서 헨리에게 쥐여 주었다.
“킬리언 경이 곧 올 거야. 그때까지만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지?”
“누, 누님은요!”
눈물 가득한 파란 눈이 아나이스를 향했다. 그녀는 헨리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어머니를 모셔 올게. 아직 안에 계시니까.”
“빠, 빨리 오셔야 해요.”
“응, 걱정하지 말렴.”
아나이스는 헨리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이 된 나타니엘은 성 위를 돌며 날고 있었다.
간간이 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아나이스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처참하게 무너진 황후궁 안에 밀리아가 넋을 놓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용, 용이…….”
주변의 기사와 하녀들은 모두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바닥에 깔린 돌 더미를 피해 밀리아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어서 여기서 나가셔야 해요.”
가녀린 밀리아의 몸을 흔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공중을 날고 있는 거대한 용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어서요. 헨리가 기다리고 있어요!”
“헨리…….”
“그래요, 우리 막내 헨리요. 어머니가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넋이 나가 있던 밀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나이스의 얼굴 위로 필립스의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우, 우욱!”
밀리아가 아나이스를 싫어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아나이스는 무서울 정도로 필립스를 닮아 있었다. 진짜 필립스의 아들인 헨리보다 더.
그래서 아나이스를 볼 때마다 자신의 죄가 떠올라 밀리아는 그녀를 배척하고 학대했다.
“저, 저리 가!”
평소에는 어떻게 해서든 참았던 감정들이 약해진 틈을 타 전부 터져 나왔다.
구토하며 뒷걸음질 치는 밀리아를 보며 아나이스는 입술을 물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
그때 어디선가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에 아나이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빨간 두 눈이 아나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 전하를 죽인 사람은 내 모습을 하고 있었어.’
게다가 밀리아가 이 모든 일을 계획해 두었다.
용의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붉은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나이스는 눈을 질끈 감고 밀리아를 끌어안았다.
‘제발, 누군가……!’
* * *
“어…….”
눈을 뜨자 텅 빈 공간에 서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상황을 떠올렸다.
아나이스에게 칼로 찔렸는데 저 멀리 다른 아나이스가 보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죽은 건가?”
- 아니.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 이쪽이야.
위로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의 시네스트라가 보였다.
“시네스트라 님?”
- 날 만났나 보네?
“예?”
- 난 네가 만난 시네스트라가 아니야.
시네스트라가 둘이란 뜻인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살짝 몸을 내려 내 앞에 섰다.
- 난 세계가 반복되기 전에 존재했던 시네스트라지.
“세계가?”
- 뭐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일단 네가 죽을 것 같아서 이쪽으로 옮겨 둔 거야.
“제가 아직 안 죽었어요?”
- 죽었길 바라?
“아, 아니요…….”
당연히 살아 있길 바라지.
나는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살 수 있는 거죠?”
- 아마도.
“아마도라니. 아닐 수도 있는 건가요?”
- 힘은 거의 다 모였고, 필요한 사람들도 전부 모였단다. 그리고 네가 살아나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죽는다고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요…….”
물론 내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은 있겠지만, 평범한 엑스트라인 내가 죽는다고 세계가 멸망하고 그러진 않을 것이다.
‘나타니엘…….’
얼마 전 아버지를 잃고 많이 약해져 있는데, 내 일로 크게 상심했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 기다리기 심심할 테니 이거라도 보고 있으렴.
시네스트라가 동그란 창을 보여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생명체가 보였다.
“뭐, 뭐야.”
거대한 검은 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