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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황태자의 소중한 (119/145)


119화 황태자의 소중한
2023.03.22.



 


“나 역시 그렇게 어머니가 미웠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땐 무슨 감정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거 같다.”

나타니엘의 말에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헨리가 상처받을 걸 걱정한 것이다.

그 어린아이가 원치 않았던 정치적인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을까 봐.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해……!”

나는 앉아 있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응.”

“조금만 더 같이 생각해 봐요.”

우리는 아나이스도 헨리도 모두 행복해질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다.

가능하면 밀리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 * *

의사에게 진료를 본 막시밀리안은 제 옆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테레사를 보았다.


“왜 그래?”

“팔이…….”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한쪽 팔에 장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검을 뽑지 않은 채로 너무 과격하게 움직인 탓이었다.

게다가 그 검에 흑마법까지 걸려 있었으니 팔이 썩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가볍게 팔을 흔들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했으니 팔 하나쯤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이 일로 테레사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파르스름한 멍 자국이 남은 테레사의 목에 닿았다.


“목은 괜찮아?”

“응…….”

반면 테레사의 시선은 그의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만든 것이 제 탓인 것 같아서.

처음에 도움을 요청했을 땐, 막시밀리안을 철저하게 이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상처 준 만큼, 이제는 자신이 상처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상처를 주고 나자 더 주눅이 드는 것은 테레사 자신이었다.


‘난…… 막시밀리안이 행복하길 바라.’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감정은 서서히 씻겨 나가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데 서툴렀다.

오히려 가식적으로 완벽한 남자인 양 연기하는 데 능숙했다.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진심을 보이면 당황하고, 어려워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결국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것이 서툴고 어설퍼도,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이 진심으로 행동했다는 걸 깨달았다.


“테레사…….”

막시밀리안의 부름에 테레사는 정신을 차렸다.


“으, 응?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너 양손에…….”

테레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스한 흰 빛이 손을 감싸고 있었다.


“성력을 다루는 데 좀 익숙해졌나 봐.”

“자, 잠깐만.”

테레사는 허둥지둥 그 빛을 막시밀리안이 다친 팔에 가져다 댔다.

모름지기 성력이라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하는 효력이 있으니까.

다행히 빛은 막시밀리안의 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어때?”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반응을 보며 팔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것 봐!”

휘적휘적 움직이던 그의 팔을 테레사가 붙잡았다.

그리고 붕대를 풀어 환부를 살폈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걸 보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완전히 나아서.”

“그러게. 다 테레사 덕분이야.”

“손도 이리 줘.”

맨손으로 결계를 내리친 탓에 막시밀리안의 양손도 엉망이었다.

그가 군말 없이 손을 내밀자, 테레사는 능숙하게 성력을 다뤄 치료해 주었다.


“어때?”

“진짜 대단하다. 이것 봐.”

막시밀리안은 양손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고 말끔해진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보여 주었다.


“하아…….”

“걱정했어?”

“당연하지,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서 엄청 신경 쓰였단 말이야.”

투덜거리듯 뱉어 내고 나서 테레사는 입을 막았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 준 건 막시밀리안이었는데, 너무 말이 심했던 건 아닐까.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있지, 막스…….”

“응.”

“오늘 구해 줘서 고마워.”

“아니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

막시밀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테레사의 죽음이 가까워지던 순간, 그는 왜 꿈속에서 매번 애를 써도 그녀가 죽었는지 알아차렸다.

살 수 있을 때도 테레사는 쉽게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더는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나 현실은 꿈과 달랐고, 이제 테레사에겐 다른 목표가 많이 생겼다.


“그러니 테레사, 이제 안심하고 나와 파혼해도 돼.”

이 일의 시작이 자신이었으니, 이 일을 끝내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막시밀리안은 테레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거절당했다고요?”

“그게……. 지금 내 정신상태가 불안정하다며 거절당했네.”

밀리아의 말에 연은 입술을 물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하리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에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하리가 실패한 이상 더는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잠, 잠깐. 어떻게 하려고…….”

그녀를 무시하려던 연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막무가내인 여자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제가 헨리 황자의 모습으로 변해서 황태자에게 다가갈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진짜 헨리 황자는 보이면 안 되겠지요.”

“뭐, 뭐? 우리 애 모습으로 나타니엘을 죽이겠다는 거야?”

“예. 그것밖에 없습니다. 당신 덕분에 황태자 주변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황후는 잠깐 고민했다.

그는 진짜 헨리를 잠시 숨기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으니…….”

연은 일부러 애매한 말을 사용했다.

마치 자신이 헨리를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연은 쐐기를 박았다.


“아이가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자, 잠깐. 그럼 헨리는 어쩌려고……. 내 말을 다 듣고 가란 말이야!”

연은 소리 지르는 밀리아를 무시하고 방을 빠져나와 지붕을 타고 올라갔다.

황태자가 걸어 둔 마법 때문에 추적을 교란시키는 것도 더는 무리였다.

연의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황태자의 마력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는 남은 마력을 가늠했다.


“완전한 타인으로 변하기엔 무리가 있군.”

마력이 많다면 완전한 가상의 인물로, 그렇지 않다면 완전한 타인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마력도 부족했다.


‘아나이스 황녀로 변해야 하나.’

황태자비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아나이스와 그는 피가 이어져 있으니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연은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는 황후의 방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 *

나타니엘은 장례식과 계승 준비 때문에 귀족들과 회의에 들어갔다.

아침 일찍부터 회의를 시작한 탓에 그는 겨우 빵 하나 먹고 쫓기듯 회의실로 향했다.

나는 일단 밀렸던 일 중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처리하기 시작했다.


“비 전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들어와.”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하녀는 황후궁에서 일하는 아이였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 아니 밀리아 님이 헨리 황자 전하를 보여 달라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아……. 얼마나 심각하지?”

“그게, 화병을 깨서 그걸 들고 자해하겠다며 협박하고 계십니다.”

참담한 말에 얼굴이 굳었다.


“내가 가서 밀리아 님을 진정시켜야겠다. 사람을 보내 아나이스 황녀에게 헨리 황자를 데리고 같이 와 달라 전하거라.”

정신상태가 불안한 황후에게 헨리 황자 혼자 보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나이스가 옆에 있다면 헨리도 조금은 안심하고 황후를 만날지도 모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황후궁으로 향했다.

일 층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비 전하.”

밀리아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사들이 날 보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안에는?”

“그, 불러 달라던 시녀장과 기사 하나가 함께 있긴 합니다.”

“문을 열어 놓고 헨리 황자와 아나이스 황녀가 오면 알려 줘.”

“예.”

“절대 황자 혼자 안으로 들이면 안 되네.”

나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엉망이었다.

창문도 다 깨져 있었고, 커튼이나 이불도 찢겨 있었다.

바닥에는 그녀가 부순 집기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밀리아를 말리려다가 맞은 시녀장이 멀찌감치 떨어져 울고 있었다.


“내가 원한 건 네가 아니야!”

밀리아는 날 발견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평정을 유지한 채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금 황자를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그 위험한 건 내려놓으시죠.”

“헨리가, 이리로 온다고?”

“네. 황자 전하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서운 장면을 보면 분명 놀랄 겁니다.”

내 말에 황후의 눈이 흔들렸다.


“헨리, 헨리가 무사한 걸 내 눈으로 봐야겠어.”

그녀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 뒤를 쫓아오는 것처럼.


‘디에스 기사단인가.’

아직 잡히지 않은 기사 하나가 그녀를 위협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가요?”

“뭐, 뭐?”

“밀리아 님이 디에스 기사단과 연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변론하던 날, 제 뒤에 있던 마법사가 거기 소속이라는 것도요.”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은 밀리아를 설득하고 불안한 그녀의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했다.


“일단 그 위험한 물건은 내려놓고 이야기해요. 저와 나타니엘은 헨리 황자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한순간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잃게 해야겠습니까?”

“아…….”

내 말에 밀리아는 들고 있던 도자기 조각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뒤따라 들어온 기사가 재빨리 조각을 멀리 차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우리, 우리 아이. 헨리 좀 도와……줘.”

울면서 내게 매달리는 모습이 헨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제가 사람을 보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곧 아나이스 황녀와 함께 올 겁니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아나이스와 헨리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헨리 황자를 데려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방에 들어와 있던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검을 뽑고 황후 옆에 섰다.

혹시 허튼짓을 할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뒤로 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아나이스가 보였다.


“황녀 전하, 헨리 황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나이스가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뜨끈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어.”

나는 배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검날이 반쯤 박힌 단검이 보였다.


 
아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냈다.


“컥.”

입에서 울컥 덩어리가 뿜어져 나왔다. 저 멀리 나타니엘과 아나이스가 헨리를 안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나이스?’

어째서 아나이스가 둘이지?

그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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