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안식이여 오라!
(118/145)
118화 안식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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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안식이여 오라!
2023.03.18.
막시밀리안이 검을 힘껏 휘두른 순간, 하리는 결계를 치기 위해 풀어 둔 마력을 모두 흡수했다.
그리고 몸을 순식간에 옆방으로 옮겼다.
“꺄, 꺄악!”
그저 살기 위해 방을 옮겼을 뿐인데 마침 그곳에 테레사가 있었다.
하리는 피를 너무 흘려서 눈앞이 어질어질한 것을 참으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단검이…….’
검이 없으니 단숨에 죽일 수 없었다.
하리는 테레사의 몸 위에 타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테레사!”
테레사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막시밀리안이 하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하리 쪽이 더 빨랐다.
그녀는 회수했던 마력을 다시 풀어 그들의 주변에 돔 형태의 작은 결계를 쳤다.
“안 돼, 테레사!”
막시밀리안은 들고 있던 검을 힘껏 결계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검은 결계 표면에 가는 금만 남기고 반으로 부러졌다. 막시밀리안은 검을 집어 던지고 주먹으로 결계를 때리기 시작했다.
“테레사, 테레사!”
몇 분만 더 버틴다면 드디어 그 지옥 같은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만 막는다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렇게 끝낼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주먹이 너덜너덜해져서 피가 흐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금이 간 곳을 내리쳤다.
* * *
“죽어, 죽어!”
테레사는 제 위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까맣고 붉은 눈은 마치 지옥의 불꽃 같았다.
“너만 제때 죽었다면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커, 컥!”
“황태자가 이상해진 것도, 널 죽이기 위해 마법에 희생된 사람들도, 전부 네가 숨고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야.”
하리는 테레사를 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발버둥 치던 테레사도 서서히 설득되기 시작했다.
“넌 여기서 죽어야만 해.”
주변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결국, 피할 수 없었던 걸까.’
사실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정말로 죽어야만 했을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미안해요.’
모두 자신을 위해 애를 썼는데 결국 이렇게 끝이 다가왔다.
숨어 있는 동안 검이라도 배울 걸 그랬다.
그깟 정원이 뭐라고 그렇게 매달렸을까.
“테레사, 테레사!”
저 멀리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시밀리안의 목소리.
한때, 그녀의 전부였던 막시밀리안.
그와 헤어지고 나서 테레사는 많은 일을 겪었다.
제이나를 위해 가문의 미래를 걸기도 했고, 반쯤 잊고 있던 사교계를 열심히 들락거리기도 했다.
화려한 파티를 열기도 했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즐거운 기억들이었다.
막시밀리안과의 시간도, 아낌없이 사랑했기에 아쉽지 않았다.
“테레사, 포기하지 마! 나랑 내년에 정원을 다시 보기로 했잖아!”
“아.”
그와 함께 자신이 가꾼 유리 정원을 보기로 했었지.
“카시안이랑 공국에 놀러 가기로 하고, 헨리 황자의 연주회를 보기로 했잖아. 아나이스 황녀의 결혼식도…….”
제이나가 언젠가 가질 아이의 대모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려 주는 작위를 받기로 했지.
‘아직, 아직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점점 멀어져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테레사는 마법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지가 돌아오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리는 죽어 가던 테레사의 몸에 반투명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 말도 안 돼.”
빛은 서서히 그녀의 몸에서 하리에게로 옮겨 가더니 결계 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결계가 부서졌다.
“서, 성녀가…….”
하리는 멍한 눈으로 테레사를 보았다.
“커흑.”
“테레사!”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 달려갔다. 기침하며 숨을 쉬는 그녀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검날을 하리에게 던졌다.
“꺄아아악!”
검 조각은 그녀의 종아리에 박혔다.
하리는 도망치려 했지만 몸에 남은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명을 들은 기사들이 막시밀리안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공작님!”
“암살자다. 지하 감옥에 넣어 놔.”
명령을 내린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꿈속에서 테레사가 죽고 나면 반사적으로 확인하던 버릇이 남은 것이다.
드디어 꿈에서 본 시간이 지났다.
막시밀리안은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응?”
“더는 널 위협할 사람은 없을 거야.”
그의 말에 테레사는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달간 시달렸던 긴장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테레사 님!”
뒤늦게 나타난 리 부인이 다급하게 테레사에게 달려왔다.
테레사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진짜 리 부인이 맞는 거죠?”
“예?”
리 부인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사람들을 불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테레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막시밀리안의 손을 보았다.
양손은 너덜너덜해져서 피범벅이었고, 팔에는 아직 단검이 박혀 있었다.
“너, 손이!”
“아아.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막시밀리안은 웃으며 손을 뒤로 숨겼다.
“의사, 의사를 불러요!”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리 부인은 그제야 막시밀리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하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얌전히 감옥에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하리는 그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자신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다.
하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자를 확인했다.
“시네스트라.”
“내게서 훔쳐 간 힘으로 즐거웠나?”
“아니, 아니야. 난…….”
시네스트라는 하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초대 황제가 죽고 시네스트라가 외로움에 허덕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살갑게 다가온 마법사 둘이 그녀의 힘 중 일부를 훔쳐 도망갔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이런 게 아니었어.”
하리는 무너지듯 울기 시작했다.
그저 불안정한 미래를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시네스트라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용은 잔인한 말로 그들의 걱정을 무시했다.
실로 초월자다운 생각이었으나 어린 마법사였던 하리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땐, 우리가 너무 어려서…….”
처음에는 잔혹하게 구는 시네스트라를 골려 주기 위해서 힘을 훔쳤다.
그러나 둘은 점점 그 힘에 취해 갔다.
시네스트라의 힘은 평범한 마법사인 하리가 갖기엔 너무 강대한 것이었다.
“육체가 부서지고 있어.”
하리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어깨에서도 종아리에서도 피가 아닌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파스스 무너지는 몸을 보며 시네스트라가 혀를 찼다.
“몸이 힘을 견디지 못하나 보군.”
“아파, 너무 아픈데 죽지도 못해.”
하리는 시네스트라 앞에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녀답지 않게 이마를 바닥에 부딪치며 빌었다.
“제발 날 죽여 줘, 내가 이렇게 잘못을 빌게.”
시네스트라는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너희들에게 마음을 내어 주었다. 그의 죽음 이후로 처음으로.”
“알아, 알고 있어. 그런 당신의 마음을 이용한 우리가 나쁜 놈들이었어. 그러니, 제발……. 당신이라면 우릴 죽여 줄 수 있잖아.”
용의 힘을 훔친 마법사, 하리와 연은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죽음이었다.
육체는 부서질 뿐, 죽지 않았다.
그리고 영혼은 부서진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흑마법으로 몸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 제국을 위해 움직인다는 거창한 목표 같은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리의 꿈에서, 폭주한 나타니엘은 거대한 용이 되어 제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힘이라면 자신들도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미래를 확정시키기 위해 지난 수백 년을 필사적으로 살아온 것이다.
무너지는 몸을 흑마법으로 수복하면서.
“미래를 보는 너의 힘은 이미 나를 넘었어, 하리.”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시네스트라는 으스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없었던 성녀가 나타나고, 사라진 줄 알았던 꿈꾸는 자가 더 있지. 그리고 황태자의 힘은 네가 꿈에서 본 것보다 훨씬 강하지 않던가.”
하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네스트라가 자신들의 끝을 내주지 않을 것이란 건 확실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울기 시작했다.
* * *
그날 오후, 트레비아 후작가의 병력이 발각되었다.
마틴의 불굴의 의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나타니엘은 원로원의 동의 없이 곧바로 트레비아 후작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황후에게 통보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생각을 안 하지.”
“그 흑마법사는요?”
난 내 뒤에 있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아직 성내에 있다. 흑마법으로 기척을 지우는지 매번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군.”
나타니엘은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의 집무실에는 처리를 기다리는 서류가 가득했다.
나는 그중 제일 위에 있는 것을 꺼내서 살피기 시작했다.
“밀리아 님이 헨리 황자를 보고 싶어 해요.”
“헨리를?”
“네, 너무 보고 싶다고 식사도 거부해서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인가 보더라고요.”
“그대는 밀리아에게 헨리를 보여 주길 바라나?”
“아니요.”
내 단호한 대답에 나타니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헨리 황자를 보여 주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녀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쩌면 헨리 황자에게 위험한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대 말이 맞군. 우리 중 누구도 밀리아가 황제 폐하를 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을 마친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낮에 한참 울어서 그런지 아직 눈가가 붉었다.
나는 그의 눈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파.”
“너무 울어서 쓰라린가 봐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살짝 뺨을 붉혔다. 다 큰 어른이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흐, 흠.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 문제인데…….”
일단 가장 급한 일은 황제의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야 황위 계승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밀리아가 헨리를 곧바로 황위에 앉히지 못한 것도 장례 절차 때문이었다.
원래는 애도 기간이 훨씬 길었지만 밀리아가 짧게 줄이고 싶어 해서 원로원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일단 기간은 줄인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제국 안팎으로 뒤숭숭하니 그럴 수밖에요. 프리체 공국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에게도 장례식 때까지는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문제는 따로 있어.”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원로원에서 아나이스와 헨리를 두고 말이 많다.”
“아…….”
이미 밀리아와 트레비아 후작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후작가를 가혹하게 처벌할 생각은 없다. 황제 시해는 황후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니. 단 제도 가까이에 사병을 두었으니 그 죄는 물어야지.”
“밀리아 님은요?”
원래대로라면 그 자리에서 교수형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타니엘은 그러지 않고 그녀를 감금했다.
“헨리에게서 어머니를 빼앗고 싶지는 않아.”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