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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꿈꾸는 자 (117/145)


117화 꿈꾸는 자
2023.03.15.



 
하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꿈에서 그는 테레사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서서히 시들어 가도록 두었다.

성녀가 죽자 인간에게 일말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나타니엘은 용이 되길 선택했다.

그리고 용은 제국에 큰 상처를 내고 떠나 버렸다.

그것이 하리와 기사단이 원하는 마지막이었다.


“하리, 당신이 디에스 기사단의 단장인가?”

“예. 그런 셈이지요.”

“꿈꾸는 자.”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에 하리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자신의 부하들보다 감정 조절이 어려우니, 어찌 한 단체의 수장이라 할 수 있겠나.”

‘꿈꾸는 자’는 절대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이명이었다. 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설마 그들을 붙잡아서 고문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대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이유는 없지.”

그녀는 품에서 다른 검을 꺼냈다.

눈앞의 이 소공작은 보고서와 꿈속에서 보았던 그 막시밀리안과 완전히 다르다.

힘이며 성격까지도.

사실, 꿈의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점점 현실과 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게 시작이었나.’

하리는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수백 년 동안 확정된 미래를 보며 살아왔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날을 모르는 상황이 오자 한 발짝 움직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예전, 꿈을 꾸지 않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제 걱정은 하지 마시죠.”

“아, 미래를 모르면 기사단장은 아무것도 아닌 건가?”

그의 말에 발끈한 하리가 몸을 굴려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양손에 단검을 들고, 막시밀리안의 품을 파고들었다.

단검을 들고 있는 이상 간격을 좁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양손에 들린 단검이 각각 다른 궤적을 그리며 막시밀리안을 향했다.

그의 실력으로 팔과 복부를 노리는 단검을 모두 막기는 어려웠다.


“큭.”

막시밀리안은 한쪽 팔로 단검을 막고 자신의 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찔렀다.

서로 한쪽 팔과 어깨를 주고받았지만, 둘은 계속 검을 부딪쳤다.

어깨를 다치고 단검이 하나뿐인 하리가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말만 기사단장이고 실력은 전혀 아니군.”

그의 빈정거림에 하리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막시밀리안은 이런 잡기에 가까운 검술에 약해야 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휘두를 검의 경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유가 있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말하며 막시밀리안은 힘을 주어 그녀의 검을 강하게 쳐 냈다.

챙, 소리와 함께 단검이 멀리 날아갔다.


“칫.”

하리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몸을 낮췄다.

더는 무기가 남아 있지 않았기에 남은 방법이 몇 없었다.


‘결계를 치느라 흑마법에 사용할 마력을 다 써 버렸어.’

결계를 거두거나, 이대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졌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리는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까만 눈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막시밀리안은 검을 제대로 쥐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 * *

나타니엘의 짙은 살기에 황후가 몸을 떨었다.

내 뒤에 있던 마법사조차 흠칫 놀랄 정도였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달려갔다.


“나타니엘.”

그의 눈이 내게 닿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노만이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달랐다.

정말로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와닿은 걸까.

진한 색의 눈 아래로 슬픔이 엿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올렸다.


“괜찮아요. 우리가 진실을 밝혀 드렸잖아요.”

작게 속삭이자 나타니엘은 시선을 거두더니 원로원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증거가 나왔다. 그대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기,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도 협의할 시간을…….”

황후의 가문은 꽤 오랫동안 귀족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단숨에 모든 것을 쳐 내기엔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가진 세력이 너무 컸다.

나타니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선황제를 시해한 죄로 밀리아 트레비아를 그녀의 침실에 가두어라.”

“안, 안 돼! 아니야,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가 아니야!”

우물쭈물 망설이던 기사들은 나타니엘이 사납게 노려보자 황후를 끌어당겼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황후 폐하. 이렇게 예를 갖춰 드리는 것도 오늘까지입니다. 계속 이러시면 지하 감옥으로 보내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타니엘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황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사들의 손에 끌려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탁 풀렸다.


“그대들은 원로원으로 돌아가 트레비아 후작가와 밀리아에게 선고할 형을 정해 오도록.”

나타니엘은 능숙하게 귀족들에게 해야 할 일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시종장을 불렀다.


“황성 밖에 윈터스 공작가의 기사단이 집결해 있을 것이다. 성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하고 숙소를 내어 주도록.”

우리가 여기까지 준비했는지 몰랐던 귀족들이 일순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안심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서 귀족들에게 고했다.


“공작을 대신하여 말씀드립니다. 윈터스 가문은 황태자 전하의 적법한 승계를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윈터스 공작가가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니, 그들은 황위 승계에 대한 결론도 내려야 할 것이다.


“나 참.”

“무섭구만.”

귀족들은 어수선한 얼굴로 황성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정리하고 뒤를 돌아보자 날 감시하던 마법사가 없었다.

나는 나타니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마법사, 사라졌어요. 어쩌면 황후를 도우려 할지도 몰라요.”

“걱정하지 마. 몰래 추적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이 황성 안에 있다면 절대 놓칠 리가 없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는 내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만 우리 궁으로 돌아가자.”

나타니엘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뜻하지 않았던 외유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 * *

어느새 정원엔 봄꽃이 만발했다.

우리는 천천히 익숙했던 길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었을 땐,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실 줄 알았다면 그날 좀 더 잘해 드릴 걸 그랬다.”

폭풍 같았던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야 그는 감정을 드러냈다.


“나타니엘.”

“하, 돌아가시면 속이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영애들의 마음을 짓밟고, 종종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슴없이 잔인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어린 나타니엘에게 무심해서 어머니에게 학대당하는 걸 방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향한 사랑은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헨리를 걱정해 황후를 견제했고, 아나이스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나타니엘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받아 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손을 뻗어 나타니엘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번 원망만 하다가……. 이제야 좀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둑이 터지듯 후회의 말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의 넓은 등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심장이 아려 왔다.

어깨가 나타니엘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화사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의 어느 날.

우리는 함께 비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황후궁의 침실에 갇힌 밀리아는 방 안의 물건을 부수며 화풀이를 했다.


“대체 디에스 기사단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분명 그들은 헨리가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 당신은 황후가 될 운명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필립스에 지쳐 멀어지려 할 때마다 그들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반드시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리고 하리의 말대로 그녀는 마법처럼 황후가 되었다.

잊고 있던 그들이 헨리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며 다시 나타났을 때, 밀리아는 희열을 느꼈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에 눈앞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다.


“방법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밀리아는 중얼거리며 방 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헨리가 황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승자가 헨리밖에 없어야 했다.


‘나타니엘을 죽일 수만 있다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목숨을 걸고 그를 죽이는 것도 밀리아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 매달렸다.


“내 시녀장을 불러 주게. 그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그러네.”

“그건 안 됩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금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시녀장이 없다면 하리와 접촉하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리가 붙여 준 마법사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왔군!”

황후는 눈을 반짝이며 창을 열었다.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믿을 만한 구석은 그들뿐이었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남자가 몸을 밀어 넣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할 건가!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돼!”

“설마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넣어 두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장 황태자를 죽여 버리게. 그래야 우리 헨리가 자리를 물려받지!”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궁지에 몰려서도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겠다는 열망만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꼭 황태자를 죽여야만 황위를 물려받는 건 아니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은 자세히 알 것 없습니다. 그저 제가 하는 말만 지키면 됩니다.”

황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일을 대신 해 주겠다는 그에게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탁에 응했다.


“내일 헨리 황자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황태자궁에 파란 불꽃이 올라오거든 황자를 데리고 지하로 도망치십시오.”

“하, 하지만 밖에는 기사들이!”

“불꽃이 올라왔을 때, 그들은 이미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황후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다시 창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사라진 창문을 내다보던 밀리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후궁을 빠져나온 마법사는 숲으로 숨어들었다.


‘대체 단장에게서는 왜 연락이 없는 거지?’

지금쯤이면 그쪽 일을 끝내고 황성으로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는 건 임무에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다.

마법사, 연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완성하기로 했다.

그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오직 지금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던 걸지도.”

어쩌면 하리의 꿈에만 얽매여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황태자가 용으로 살아가길 선택한 이유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리의 꿈에서 그것은 테레사였다.

하지만 이번 변론에서 나타니엘을 지켜본 연은 그 꿈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어.’

하리가 본 미래를 읽고 바꾼 사람이자 황태자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제이나 윈터스, 그녀를 죽인다면 나타니엘이 날뛸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하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안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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