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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116/145)


116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2023.03.11.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나이스와 수염이 덥수룩한 평민 남자 한 명이었다.


“황녀, 내 근신하라 말했을 터인데.”

“이 일에 저 역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꼭 참석하고 싶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나이스는 황후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런 황녀의 모습을 처음 본 귀족들은 눈알만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밀리아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녀가 나설 자리가 아닐…….”

“참석을 허가하지.”

황후가 거절하기 전에 나타니엘이 선수를 쳤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아나이스를 빤히 보며 덧붙였다.


“아나이스도 아버지를 잃은 것 아닙니까. 성인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자격이 있습니다.”

나타니엘의 말에 내 뒤에 있는 마법사가 몸을 흠칫 떨었다.


‘응?’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가까이 있어서 그가 잠시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는 입술을 꽉 물고 아나이스를 노려보았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건 알지만,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그리고 그 마도구에 대해서는 저에게도 발언권이 있으니까요.”

황녀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래저래 공방이 오가는 동안 내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황녀 전하랑 무슨 사이인 거지?’

나는 살짝 몸을 틀어 곁눈질로 마법사의 시선을 확인했다.

그 시선은 내내 아나이스에게 닿아 있었다.

내가 남자와 아나이스의 관계를 고민하던 사이, 황후가 마도구 앞으로 향했다.

망설이지 않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걸 보니, 마도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끼고 있던 반지에 마력을 살짝 흘려 넣었다.


“허튼수작하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들리는 마법사의 목소리에 난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미세한 양만 보내면 되는 거라서, 이 남자도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아나이스에게 팔려 있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자 여기…….”

“아니요, 어머니.”

막 마도구를 재생시키려던 황후를 아나이스가 막아섰다.


“그건 제가 가져다 놓은 마도구가 아니잖아요.”

“뭐, 뭐?”

폭탄 발언에 황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타니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나이스에게 물었다.


“가져다 놓았다니? 황후께서는 선황제 폐하께서 손수 마련한 것이라 하셨는데.”

“아닙니다. 어머니가 마련하시고, 제가 황제 폐하 몰래 설치한 것입니다.”

“얘, 얘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

황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마 아나이스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몰, 몰래라니. 혹시 몰라서 내가 폐하께 설치하라 제안드린 것뿐인데.”

황후의 변명에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생활을 중시하는 폐하께서 자신을 감시하는 마도구를 개인적인 영역에 가져다 놓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럼, 황후 폐하께서 선황제 폐하를 감시라도 하셨다는 말입니까?”

“만일 선황제 폐하께서 아셨다면, 그걸 그냥 두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일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황녀의 예상치 못한 행보에 황후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밀리아는 책을 들고 흔들며 관심을 제게로 돌렸다.


“어쨌거나, 이 마도구는 제가 폐하께 추천드린 게 맞아요.”

“그 마도구를 본 사람은 저와 황후 폐하, 그리고 돌아가신 황제 폐하뿐이지요. 벌써 오래전 일이고, 자문을 얻기 위해 마도구를 제작하는 길드 사람을 불러왔어요.”

아나이스가 한 발짝 물러나자 아까 그 덥수룩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도구 제작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그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시종에게 넘겼다. 시종이 가져온 신분증을 귀족들과 황후가 확인했다.


“이 마도구 감정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그의 입회를 요청합니다.”

“그게 좋겠군.”

아나이스의 요청에 황후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시종에게 건넸다. 시종이 그 책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리자 길드장이 다가가 살폈다.


“저 마도구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

“예, 예…….”

나타니엘의 요청에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물건을 살폈다.

이런 자리에 갑자기 불려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감정을 마친 길드장이 조용히 물건을 내려놓았다.


“이, 이건 한 달 이내에 만들어진 신품입니다.”

“뭐?”

“여기 이 렌즈를 보십시오. 상용화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제품입니다.”

그는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갔다. 렌즈며 물건에 사용된 장식 같은 것이 극히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중에 풀린 지 1, 2주밖에 안 되어서 황제의 살해 장면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 그럼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마도구는 어디로 갔단 말이야! 내 분명 10년도 전에 여기에 가져다 둔 걸 보았는데.”

당황한 밀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아나이스는 책장으로 가서 몸을 굽혔다. 그리고 가장 아래 칸, 다른 책들 위에 가로로 눕혀져 있던 책을 꺼냈다.


“여기 있어요. 이게, 제가 어머니께 받은 그 마도구입니다.”

 

 
겉으로는 다를 게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렌즈의 형태를 보면 최소 7년 전에 만들어진 게 틀림없습니다. 요즘엔 거의 사용하지 않거든요.”

길드장이 물러서자 나타니엘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 물건을 확인하면 되겠군요. 어째서인지 마도구가 두 개나 생겼지만 말입니다.”

나타니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단순히 녹화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생도 가능한 듯했다.

드디어 녹화된 장면이 공중에 떠오르고, 재생되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황후가 단검을 들고 나타난 장면이 똑똑히 찍혔다.

아나이스는 눈을 감았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타니엘은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욱.”

몇몇 사람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영상이 끝나자 집무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후를 보았다.


“이래도 아니라 하시겠습니까?”

서늘한 온도의 눈이 황후를 향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드디어 모든 것이 밝혀졌다.

* * *



“아가씨, 아직이신가요?”

문밖에서는 여전히 리 부인이 테레사를 부르고 있었다.

테레사는 반지를 잡고 덜덜 떨었다.

디에스 기사단원들이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는 데 쓴다는 반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변에 그자들이 있을 터.

설마 이렇게 가까이 쫓아 들어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 했다.

그게 막시밀리안이든, 데이먼이든, 혹은 진짜 리 부인이든.

그러려면 이 방을 나가야 했다.

우선 저 밖에 있는 사람을 지나쳐야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이 방은 원래 막시밀리안의 방과 하나였다고 했다.

지금은 벽지를 새로 바르고 커튼을 내려 놓았지만, 분명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벽 중간에 문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쳐져 있는 커튼을 걷고 손으로 천천히 벽을 더듬었다.


“여기인가?”

손끝에 닿은 벽의 감각이 달라졌다.

테레사는 반대편으로 밀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테레사 님, 아직이신가요?”

“자, 잠깐만요!”

재촉하는 목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진 테레사는 벽에 몸을 부딪쳤다.

퉁, 하는 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사람이 문고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테레사 님? 테레사 님?”

조금 다급해졌는지 리 부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테레사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순간 몸에 반투명한 흰빛이 흐르고,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상의를 벗고 있던 막시밀리안이 있었다.

당황한 그를 두고 테레사는 재빨리 커튼을 쳐서 문을 가렸다.

갑자기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들고 있던 셔츠로 상체를 가렸다.


“테, 테레……!”

그녀는 후다닥 달려가서 막시밀리안의 입을 막았다.

주변은 둘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빛이 변했다.

테레사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리 부인의 목소리인데, 반지가 진동해서.”

“잘 도망쳤어.”

그렇게 말한 막시밀리안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서랍으로 향했다.

그는 마탑주에게서 받았던 마도구를 꺼냈다.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원래 공작성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덜컹덜컹덜컹.

조용하던 문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창에 있는 커튼을 들어 올려 밖을 살펴보았다.

청명했던 하늘은 마치 밤하늘처럼 아득한 검은색으로 일렁거렸다.


‘결계인가.’

속성으로 마탑주와 나타니엘에게 흑마법을 배워 둔 덕분에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결계 안에 너랑 나, 그리고 저 여자만 들어와 있는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어?”

결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강한 마력으로 깨거나, 시전자가 거둬들이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해.”

“둘 다 불가능한 일이잖아.”

“목에 칼이 들어오면 결계를 지킬 수는 없겠지.”

막시밀리안의 말에 테레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침대 뒤쪽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아무 무늬 없는 단순한 가죽 검집째 손에 쥐고 테레사를 향해 속삭였다.


“내가 저 방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절대 이 방에서 나오지 마.”

그리고 커튼 너머로 넘어갔다.

막시밀리안은 조용해진 문 앞에 섰다.


“테레사 님?”

기괴하게 뒤틀린 목소리는 더 이상 리 부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무리였다.

막시밀리안은 검을 단단히 쥐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지옥 같은 악몽을 꾸었던가.

이번만큼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런.”

장난스러운 얼굴의 여자가 씨익 웃으며 막시밀리안을 맞이했다.


“귀여운 소공작께서 이런 깜찍한 일을 벌일 줄이야.”

“넌 누구지?”

“소공작께 인사드립니다, 소인은 하리라 하옵니다.”

하리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며 허리를 굽혔다.

놀리는 듯한 과장된 모습에도 막시밀리안은 냉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보고서에는 다혈질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시군요.”

그녀의 비아냥에도 막시밀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뽑아 들어 하리에게 겨누었다.


“다시 한번 묻지. 이름이 뭐지?”

“아, 이 순간에도 기사도를 따지시는 걸까요? 말씀드렸듯이 제 이름은 하리입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리가 앞으로 튕겨 나왔다.

손에서 튀어나온 짧은 단검을 쥐고 몸을 숙여 막시밀리안의 턱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평생 기사들을 상대해 온 귀족들이 가장 예측하지 못하는 경로였다.


“쯧.”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검이 더 빨랐다.

그는 검 등으로 단검을 쳐내고 순수한 힘으로 하리를 밀어냈다.

뒤로 주르륵 밀려난 하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놀라는 것도 없이 정확하게 막았어.’

마치 이런 공격을 예상했던 것처럼.

막시밀리안이 검술에 능숙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을 단숨에 막을 정도로 뛰어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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