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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믿음이 필요할 때 (115/145)


115화. 믿음이 필요할 때
2023.03.08.



 
제이나와 나타니엘이 수도로 떠난 후,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일까.

테레사는 그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황태자비 전하 일 때문인가?’

내일이면 황성에서 선황제의 시해에 대한 황태자의 변론이 열린다.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공작성에 오기 전에는, 아니 첫 약혼 때만 해도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매번 당황했었는데.

테레사는 눈으로 무의식중에 막시밀리안의 움직임을 좇았다.

미간을 구긴 채로 손에 들린 책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무슨 책을 보고 있는 걸까?’

그는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예전보다 조금 길어진 듯한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을 산란시켰다.

테레사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공작성에 온 이후로 이런 기분이 들었던 적이 많았다.

꿈 한번 꾼 적도 없는데.

너무 뚫어지게 본 걸까.

자신을 돌아보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테레사?”

“으, 응?”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어, 아니.”

당황한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웠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네가 물어보는 거라면 뭐든 대답해 줄 수 있어.”

막시밀리안은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테레사의 건너편에 앉았다.


“요즘 잠은 잘 자?”

“어?”

테레사의 물음에 막시밀리안은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자연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그를 테레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노려보았다.


“거짓말.”

“어, 어?”

“너 거짓말할 때 눈 못 마주치잖아.”

불퉁한 테레사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곧, 서서히 뺨부터 붉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얼굴을 돌렸다.

귀와 목덜미까지 붉어지자 이제는 테레사도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우린 오래전부터 봤으니까. 그리고 유독 나한테만 그러기도 하고.”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치 자신이 그를 내내 관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둘은 서로 시선도 못 마주친 채, 입을 꾹 닫았다.


“흐, 흠. 괜찮아. 제이나 일 때문에 좀 신경 써서 잠을 못 잔 것뿐이야.”

막시밀리안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어설프게 변명을 시도했다.


‘아주 거짓이 아니긴 하니 들키지는…….’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자기도 테레사가 난처할 때를 알아보니, 그녀 역시 비슷할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시간이 이럴 때 티가 나다니.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괜히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이나의 말대로 테레사는 자신이 모든 걸 지켜 줘야 할 정도로 연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강해졌지.’

순진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테레사는 제이나를 위해, 가문을 위해, 그리고 막시밀리안을 위해 몸을 던지기도 했다.

이제 그녀를 믿어 줘도 되지 않을까.


“사실 정보를 입수했어.”

“무슨 정보?”

아무것도 모르는 테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시밀리안은 그녀 앞에 반지 몇 개를 꺼냈다.


“디에스 기사단 중 몇 명을 붙잡았거든. 그들이 갖고 있던 물건이야.”

특색 없는 매끈한 링 형태의 반지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다.

우연히 같은 걸 낀 사람을 만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황태자 전하의 말씀으로는 서로의 존재를 알려 주는 반지라더군. 기사단원들끼리도 얼굴을 모르니까, 반지에 흑마법을 이용해 마력을 넣으면 독특한 파장을 내보낸다고 했어.”

단원들이 그런 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파악한다고 했다.

얼굴이 한번 드러나면 흑마법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으니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막시밀리안의 설명을 들은 테레사는 디에스 기사단의 비정한 방식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얼마나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걸까.”

“글쎄. 초대 황제 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모르는 거지.”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지 중 하나를 들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끼고 있어. 그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옆에 있을지 모르니까.”

“나, 난 흑마법은 쓸 줄 모르는데.”

“전하께서 도와주셨어. 흑마법사가 주변에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살짝 들어 테레사의 얼굴을 보았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뺨이 붉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소, 손 좀…….”

“아. 어, 어어. 미안.”

막시밀리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늘이랑 내일이 고비일 거야.”

“어?”

“그래서 말인데 그, 내 옆방에서 자는 건 어때?”

물론 방비를 철저히 했다지만 막시밀리안은 영 불안했다.

테레사의 죽음은 내일 예정되어 있었고, 디에스 기사단은 구석에 몰려 있었다.

나타니엘과 제이나를 몰아내려던 것도 잘 풀리지 않았으니 약이 바짝 올랐을 것이다.


“성엔 마탑주도 황태자 전하도 없으니 마법으로 몰래 들어온다면 모를 수도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바로 널 도와줄 수 있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막스는 그들이 날 포기하지 않았다고 믿는 거지?”

“응.”

“혹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돼?”

그녀의 물음에 막시밀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꿈에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자신은 테레사에게 끊임없이 거짓을 말했다.

어떨 때는 그녀를 상처 주기 위해, 또 어떨 때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테레사는 약하지 않아.’

약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막시밀리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테레사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비가 오려는지 커튼을 걷어 놨는데도 실내가 어두웠다.


“피곤해.”

어제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꿈에서 매번 죽었다는 자신.

그리고 그 꿈에서 일어난 일은 실현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했다.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노력한 거라니.’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가 제 모든 편의를 봐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를 왜 디에스 기사단이 노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테레사 님, 아침이 준비되었습니다.”

“금방 나갈게.”

리 부인의 목소리에 테레사는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던 테레사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반지를 발견했다.


“어?”

반지가 마치 위험을 알리듯 진동하고 있었다.

* * *



“손대지 마.”

날 붙든 남자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소란 탓에 나타니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무심하게 뒤에 있는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저런 저질 마법사로 절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색하게 웃고 있는 황후의 입가가 경련이 나듯 떨렸다.

자존심이 상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양심에 찔린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나는 다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다.

하지만 많지도 않던 마력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잠깐 손이 잡힌 것뿐인데 그사이에 마력을 묶다니.

어쩌면 디에스 기사단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타니엘의 얼굴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리며 신호를 보냈다.


“눈이 아픈가?”

불행히도 나타니엘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사람들의 시선이나 모았다.


“네? 아,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어색한 연기에도 나타니엘은 말없이 다가와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

“가만히 있어 봐.”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필요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마력이 사라져서 신호를 보낼 수 없어요. 저 남자, 디에스 기사단의 일원인 게 틀림없어요.”

나타니엘은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저 정도 되는 자가 이런 자리에 오다니. 디에스 기사단도 별거 아닌가 보군.”

“방심하다가 큰일 난다고요.”

그의 팔을 흔들자 나타니엘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황후가 마도구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어. 일단 가는 길에 마력을 모아 봐. 간단한 마법이니까 조금만 모아도 가능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었으니 방법이 없었다.

나타니엘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는 황후를 보며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제 이런 귀찮은 기 싸움은 그만하고 제 무죄를 증명하도록 하지요.”

“조, 좋네. 내 선황제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네게 죄를 물을 것이야.”

“일단, 폐하께서 시해당하셨던 집무실로 가시죠.”

나타니엘은 앞장서서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증인으로 참석한 귀족들마저 조용했다.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나타니엘의 힘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생을 최소화하려면 모든 일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괜찮을 거야.’

나타니엘은 일부러 우리가 종종 수련하던 길로 돌아서 걸었다.

나는 마력을 모으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제대로 된 마력을 모으는 건 불가능했다.


‘아슬아슬해.’

그래도 잘 집중하면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황제가 머물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로 올라가는 길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번에 왔을 땐, 분위기 좋았었는데.’

그땐 지금과 달리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었다.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일인데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집무실에 도착한 나타니엘은 천천히 책장을 확인했다.

손가락을 쭉 훑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황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타니엘에게 물었다.


“좀 오래된 기억이라서 그런지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나타니엘이 망설이자 황후가 성큼성큼 걸어서 책장 앞에 섰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훑던 그녀는 정확히 책을 짚고 꺼냈다.

마치 준비된 것 같은 움직임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혹시 이걸 찾나?”

나타니엘을 돌아보는 밀리아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나타니엘은 그런 황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귀족들은 물음에 황후는 의기양양하게 마도구를 만졌다.


“마도구입니다. 폐하께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에 설치해 두신 것이지요.”

“그, 그런 걸 폐하께서?”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밀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마도구에 황제의 죽음이 그대로 담겼을 것이다.

그때였다.


“잠, 잠깐만, 황녀 전하.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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