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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덫에 걸리다 (114/145)


114화. 덫에 걸리다
2023.03.04.



 
연은 아나이스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하더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모습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았다.


‘황제의 모습으로 밀리아를 찾아갔으니 날 닮았을 리가 없지만.’

연의 능력은 외형을 바꾸는 것이었다.

중요한 순간순간, 역사에 개입했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존재들은 모두 연이었다.

죽은 선황후를 독살한 사람도, 테레사에게 다가갔던 드미트리 백작도 연이었다.

그리고 아나이스의 생물학적 아버지 역시.


“후우…….”

아나이스는 그들이 노리고 있던 마도구에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책을 꺼내서 열었다. 안쪽에 있는 장치를 몇 번 건드리더니 다시 책을 꽂아 넣고 밖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연이 어둠 속에서 나왔다.

아나이스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이상해.’

긴 생을 살며 그의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하리가 꿈꾸는 미래를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것.

멋대로 뻗어 나가는 세계를 정형화시키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인연, 감정, 가족 같은 현실과 관련된 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번 마도구를 손으로 훑었다.

그저 자리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한 건지,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연은 뚜껑을 열어 안의 마석을 갈아 끼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계속 꺼림칙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만일 이대로라면 아나이스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아니, 이미 늦은 걸지도 모르지.’

연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숨기며 자리를 떴다.

단 한 번도 자신의 핏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 방 안에서 파르스름한 낯빛의 아나이스를 보는 순간, 그녀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잊은 줄 알았던 죄책감이 싹텄다.

연은 죄책감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 * *

요 며칠 밀리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통에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내일이면 나타니엘이 돌아올 예정이기에 업무를 일찍 마쳐서 다행이었다.


‘피곤해.’

그녀는 내일의 결전을 위해 헨리를 보러 가기로 했다.

자신과 필립스 사이의 진짜 아이.

아나이스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 황실의 피를 이은 아이였다.

밀리아는 황후가 된 이후 모든 순간을 헨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달려왔다.

자신이 지은 부정을 묻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녀를 무시했던 선황후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 네가 아무리 난리 쳐 봤자 황제가 되는 건 내 아들이야. 넌 내가 죽어도 영원히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없어.

병마와 싸우면서도 선황후는 밀리아를 비웃고 깎아내렸다.

심지어 필립스마저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 헨리는 황제의 재목이 못 돼. 그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냥 원하는 걸 하도록 두게.

같은 아들인데 어째서 헨리에게만 저렇게 박할 수 있을까.

밀리아는 이를 갈았다.

헨리가 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보아라.

결국, 이긴 것은 자신이었다.

나타니엘을 쳐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뿌듯함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헨리의 침실에 도착한 그녀는 시종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전하께 내가 왔다고 전하게.”

“예, 폐하.”

시종장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 황후의 방문을 알렸다.

밀리아는 안으로 들어가 제 완성작을 보았다.


“오, 오셨어요, 어마마마.”

헨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밀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바쁜지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쯤은 찾아왔다.


‘얼마 전에 찾아오셨는데…….’

헨리는 밀리아가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어머니에게서 피 냄새를 맡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이리 와 봐요, 헨리.”

밀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헨리는 머뭇거리다가 어머니의 품에 살짝 안겼다.

밀리아는 그런 헨리를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헨리. 이제 곧 폐하라고 불러 드릴 날이 오겠군요.”

아이의 보송한 향기에 밀리아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십수 년간 꿈꿔 오던 미래가 드디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으, 으윽.”

“황자?”

헨리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당황한 밀리아는 황자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왜 그래요? 어디 몸이 안 좋기라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헨리가 도망치듯 황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시선을 돌렸다.


“헨리?”

“저,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예요.”

“황의를 불러야겠어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니.

황후는 그간 일이 바빠 신경 써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을 빠져나가려던 황후의 옷자락을 헨리가 꽉 붙들었다.


“괘,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밀리아는 가만히 아이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한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유달리 경계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헨리. 어미에게 마음이 상한 것이 있는 겁니까?”

황후의 말에 아이의 어깨가 튀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밀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게 다 황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이 어미가 전부 해 줄…….”

“아, 아니에요! 어머니에게 마음이 상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좀 그래서.”

헨리는 계속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에게서 여전히 피 냄새가 났다.

아나이스가 절대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을 곱씹었다.

하지만 생리적인 공포와 혐오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어리니 그걸 숨기는 건 더 어려웠다.


“헨리…….”

밀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항상 살갑게 다가오던 헨리가 이러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허함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헨리가 더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럼 이만 쉬도록 해요. 어미는 이만 돌아갈 테니.”

“네, 어머니.”

헨리는 조용히 황후를 배웅했다.

매번 더 있다 가라며 매달리던 아이였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밀리아는 허무한 얼굴로 침실로 돌아와 몸을 눕혔다.


“아.”

침대에 눕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헨리를 만나기 전까지 가득 차 있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달라질 거야.’

모든 걸 다 얻으면 분명 이렇게 어미가 한 일에 감사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사소한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황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수도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거 같기도.’

우릴 향한 시선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안도하는 시선과 의심하는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나타니엘은 윈터스 공작의 조언을 받아 마차의 창문을 열고 제국민들에게 유유히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겉으로는 꽤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성문을 지나 황성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어째, 분위기가 별로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지.”

마차가 멈췄다.

나타니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는 미리 장치를 없앴을 때도 대비해 두었다.


‘대체 저 엉성한 포탈은 누가 만든 거냐고.’

놀랍게도 황성에서 가까운 일반 구역에 나와 나타니엘이 탔던 순간 이동 장치와 비슷한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미리 설치한 거라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한두 달 사이에 만든 거로는 보이지 않았어.’

십 년 정도 전에 만들었다고 하면 믿을 만큼 낡아 보였다.

어쨌거나 만약을 대비해 언제고 순간 이동 장치가 활성화시켜 두었다.

신호를 보내는 건 내가 하기로 했다.

나타니엘에게 배운 마법들이 이런 데에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그만 나가지.”

“네, 네!”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우리를 향했다.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우리를 반기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궁내 사람들이 지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고작 몇 주 사이에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황후에게 시달렸을 테니.’

아주 미묘하지만, 전생에서 을로 살아 본 나는 그 분위기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러지?”

나타니엘은 머뭇거리는 날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힐끗 주변을 살피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황궁 분위기가 확실히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

“네. 다들 지친 것 같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잘 모르겠는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뭐, 평생 남 위에 군림하기만 했던 그가 알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대회의실에서 황후 폐하와 원로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황후가 보낸 기사들이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이고 앞장섰다.

화려한 복도의 끝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일전에 나타니엘이 후처 문제로 난리를 쳤던 그곳이었다.


‘그때 부순 문고리인가.’

문고리 모양은 같았지만, 색이 묘하게 달랐다.

그때 벌어졌던 난장판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타니엘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문을 열어라.”

나타니엘의 말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내 뒤로 중무장한 기사 둘이 바짝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만약을 대비해 날 인질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군, 나타니엘.”

그리고 문이 열린 안쪽, 거대한 탁자의 끝에 황후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만한 표정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은 채로.


“죄를 고하러 왔는가?”

“죄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나타니엘은 낯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로 맞받아쳤다.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자네인데 어찌 부정하는가?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정상 참작하도록 하지.”

“제가 마지막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렇다면 도망친 이유가 무엇인가? 그때 스스로 억울함을 밝히지 않고.”

황후의 말에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새끼 용이 되어서 숨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우리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다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원로원 귀족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마냥 부정적일 줄 알았는데 약간의 호의가 느껴졌다.


“물론일세. 폐하께 벌어진 모든 일을 기록한 증거가 있네.”

나타니엘이 말을 마치자 귀족들이 술렁였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황후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확신이 들었다.

황후가 그 마도구를 기억해 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재빨리 마력을 움직여 신호를 보내려 했다.


“황태자비 전하.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가운 말과 함께 누군가 내 손목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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