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증거를 위하여
(113/145)
113화. 증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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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증거를 위하여
2023.03.01.
나타니엘과 약속한 뒤 우리는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내가 가는 만큼, 가는 날짜는 우리가 결정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황후가 황제의 집무실에 설치했던 마도구를 기억해 내고 제거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확보하는 것이 문제였다.
성공하려면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출발 전날, 막시밀리안이 나를 따로 불렀다.
“어서 와. 시간 괜찮지?”
막시밀리안과는 뭔가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비록 그와 한 번의 삶을 같이 살았지만, 이미 지구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게다가 테레사에 관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나와는 묘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 곧 하녀가 차를 내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막시밀리안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한 표정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려 줘야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막시밀리안이 나를 따로 불러서 할 만한 이야기가 있던가?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진지해?”
“꿈이랑 관련된 일이야.”
“테레사와 관련된 꿈을 말하는 거지? 아직도 꾸는 거야?”
상태가 좀 나아졌길래, 더는 그가 꿈을 꾸지 않는 줄 알았다.
놀란 내게 막시밀리안은 지난 몇 달간 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계속 꿈을 꿨어. 조금씩 다르기도 했고, 완전히 다른 내용일 때도 있었지만.”
그의 꿈은 매번 내용이 달랐다고 했다.
비슷한 꿈이었지만,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던 원작과 다른 부분도 많았다.
“얼마 전, 디에스 기사단이 보낸 첩자를 잡았고 그에게서 정보를 좀 얻었는데.”
그는 곤란하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우두머리도 나처럼 꿈을 꾼다더군.”
“오라버니처럼?”
“나랑 달리 그녀는 하나의 고정된 꿈만 꾸는 것 같아.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그 꿈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거라더군.”
그들이 알고 있다는 미래는 내가 알고 있는 원작과 같을 것이다.
“이유가 뭐지?”
“그것까지는 첩자도 모르는 것 같아. 아마도 기사단장이 알고 있겠지.”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막시밀리안이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꿈의 마지막이 늘 같았다는 거야.”
차로 입을 축인 그가 말을 이었다.
“매번 테레사가 죽었어.”
그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말을 쉬었다.
매번 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제야 그의 행동들이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지난번에 그를 세워 두고 테레사를 간절히 원한다면 더 적극적으로 대하라고 화를 냈던 것이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런 미안함은 막시밀리안의 말에 모두 잊혀졌다.
“중요한 건, 너와 황태자 전하가 황후를 만나는 날이 꿈에서 테레사가 죽던 날이라는 거야.”
“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기로 했다.
“일단, 디에스 기사단이 황후에게 붙은 건 확실해. 그러니 이번 변론 자리에도 나올 거고.”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몰랐다.
많지 않은 인원수가 반으로 나뉘는 건, 그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어쩌면 이번 기회만 잘 넘기면 더는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막시밀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지 마. 아마 그쪽도 필사적일 거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테레사를 죽이려 했으니까.”
그리고 헨리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나는 녹화 마도구의 행방이 걱정되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 * *
아나이스는 황궁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시선과 태도에 호의가 담겨 있었다.
마치 지난 시간을 잊어 달라는 것처럼.
머지않아 아나이스는 그 이유를 킬리언에게 듣게 되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하시다고요?”
“예. 그리고 곧 자신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황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아나이스는 몸이 달았다.
마도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중, 나타니엘도 있었다.
전대미문의 마법사인 그가 자주 드나드는 아버지의 집무실에 있는 마도구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나이스.”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나 봐요.”
킬리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정말 거짓말을 못 했다.
딱딱한 얼굴에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굴리는 걸 보면 거짓말하는 게 생생히 보였다.
“물건은 찾고 싶으신가 보군요.”
“네……. 어머니가 언제 기억해 내실지 모르니까요.”
비겁한 생각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려도 소용없을 거라는 걸 느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나이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어쩔 수 없군요.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믿고 지원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일단 계획을, 아나이스?”
킬리언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이 한 말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지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게 없었다.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절 믿어 주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아나이스는 눈물을 훔쳐 냈다.
지금은 울며 감격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계획이 뭐죠?”
반짝이는 아나이스의 눈을 보며 킬리언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아나이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 *
내일이면 황태자 부부가 변론을 위해 수도에 당도한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황후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밀리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상할 정도로 당당하지.”
헨리를 유학 보내겠다는 말에 이성을 잃고 황제를 죽인 건 그녀에게 위험 부담이 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타니엘이 몸을 숨기고 도망쳤다.
이건 사실 밀리아의 예상 밖이었다.
정말 천운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이렇게 당당한 이유가 있을 텐데.
‘감시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황후는 순간 숨이 막혔다.
아주 오래전, 필립스를 감시하기 위해 아나이스에게 설치하라고 했던 마도구가 하나 있었다.
“그게 아직도 있던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황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타니엘이 그것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없애야 해.”
그녀는 황급한 발걸음으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어두운색의 망토를 찾는 손이 자꾸만 천에서 미끄러졌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을까.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밀리아가 물건을 없애기 위해 움직이려던 순간.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악!”
황후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자 시녀장의 몸을 빌리지 않은 하리가 서 있었다.
“와, 왔으면 인기척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급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만…….”
그런 밀리아를 보는 하리의 눈에 의심이 일렁였다.
밀리아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다가 곧 눈을 반짝였다.
“자네가 날 도와줘야겠어.”
“그게 무슨 말인지요.”
황후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제가 있던 집무실에 사실상 황족 모두가 아는 감시 마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도 작동할 거야. 아마 나타니엘도 알고 있을 거고! 그걸 믿고 오는 게 틀림없어.”
“대체 당신은…….”
하리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밀리아를 보았다.
그렇게 황제에게 집착해 놓고 제 뜻에 맞지 않는다고 단숨에 죽이는 것도 이상했다.
“마도구 안에 있는 마석만 가져오면 돼. 그럼 나타니엘도 결백을 주장할 수 없을 거야.”
황후의 말에 하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라니?”
“혹, 여분의 마석이 있습니까?”
“아, 아마도 있을 거야.”
“그리고 죽어도 상관없는 노예 하나를 준비해 주세요. 한 시간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황후는 몸을 움찔했다.
역시 인간의 영혼의 힘을 이용한다는 하리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아, 아마 가능할 거야. 그걸로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마석에 새로운 영상을 덧씌울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영상을 틀었는데 당신이 아니라 황태자가 칼을 들고 있는 영상이 나오면……. 꽤 재밌을 것 같지 않습니까?”
마도구의 신뢰도는 복사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마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리의 흑마법은 달랐다.
그녀의 마법에는 한계가 없었다. 단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해.’
그렇게 생각하며 황후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해 건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하리는 마석을 들고 있었다.
“여기 기다리시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고, 고맙군.”
마석은 흑마법을 이용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일이 어렵고 꼬일 때마다 마법처럼 자신 앞에 나타나는 하리가 신처럼 느껴졌다.
“만일 이번 일이 잘 진행되면 그대들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지.”
황후의 말에 하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금전적 지원이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예.”
단호한 하리의 말에 밀리아는 아쉬움을 느꼈다.
저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일이 끝나면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왜 찾아온 거지?”
“아, 내일 그 자리에는 제가 없을 겁니다.”
“뭐? 어째서?”
“이 일 말고도 해결해야 할 게 있어서요.”
어차피 가장 위협적인 문제는 이제 곧 처리될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제 손에 있으니 밀리아는 금방 마음이 가벼워졌다.
“알겠네. 지금까지 도와준 거로도 충분할 것 같군.”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마석도 제가 마도구에 넣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서 주자 밀리아는 방금까지 불안해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리는 그런 황후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물렸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중력이 없는 듯한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고 우아했다.
아래에서 하리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아. 연! 마침 잘 왔어.”
하리는 그에게 마석을 넘기며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황후는 못 말릴 사람이군요.”
“부부가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
하리는 계속 키득거렸다.
“늦어졌으니 난 먼저 갈게. 잘 처리하라고.”
순식간에 사라진 하리의 뒷모습을 보던 연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집무실 창 밑으로 향했다.
가볍게 몸을 날려 창틀에 매달렸다.
손으로 창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어디에 있는지 대충 위치를 들은 덕에 마도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장 사이를 걷던 연은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뭐지?”
그가 펼친 마력에도 걸리지 않는 인간이 있다니.
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황녀……인가.’
꽤 오래전, 황후가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초조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황궁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었기에 하리의 짜증이 극에 다다라 있었다.
하리는 꿈에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어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밀리아가 아이를 갖는 시점이 어긋날지도 몰랐다.
- 제가 하도록 하지요.
그때, 연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