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역시 이 모습이 좋아
(112/145)
112화. 역시 이 모습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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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역시 이 모습이 좋아
2023.02.25.
나타니엘의 손가락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뺨을 간지럽혔다.
오랜만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온도에 안도감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나도 걱정했다.”
“나타니엘이요?”
“다시는 그대를 만지지 못할까 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치듯 눈가와 뺨에 입술이 닿았다. 지나간 자리는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너무 다행이에요.”
“응.”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기억하고 있던 온도보다 더 뜨거운 손이 급하게 어깨와 허리를 짚었다.
서로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매달렸다.
다시는 이 모습을 놓지 않기 위해서.
* * *
모두가 잠든 밤.
나타니엘은 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피곤했는지 제이나는 여전히 잘 자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만졌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는 몸을 숙여 제이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운을 걸친 나타니엘은 아래층으로 향했다.
노크하자 말끔한 표정의 시네스트라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녀는 가만히 나타니엘을 올려다보다가 옆으로 비켜 주었다.
나타니엘은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모든 걸 알려 줄 수는 없어. 난 인간계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되거든.”
“내가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란 걸 알지 않나?”
가볍게 웃고 있던 시네스트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대는 내게 내 본질은 용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그 말은 내가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뜻인가?”
나타니엘의 물음에 시네스트라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서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용이었지만 넌 아니야.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인간이기도 하고, 용이기도 하지. 지금은 네가 인간이길 원하기 때문에 마력으로 그 모습을 유지한 채 인간의 사고방식을 가진 거고.”
“내가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용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군.”
참으로 편리한 방법이긴 했으나 나타니엘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만일……. 이번처럼 내 의지로 선택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 건가?”
“아마도. 아닐 거라고 확답은 할 수 없어.”
시네스트라의 말에 나타니엘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고대 용이라고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나 보군.”
“그것에 관해서는 난 계약에 따라 말할 수 없어.”
시네스트라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었고,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망설이던 시네스트라는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단, 넌 아주 예외적인 존재라는 걸 말해 주고 싶군. 원래대로라면 대를 거듭할수록 약해졌어야 할 힘이 어떤 이유로 수십 배는 강해진 거라.”
“그게 무슨 뜻이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타니엘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시네스트라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만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용으로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단, 초월자가 되면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 체계로 생각할 뿐.”
나타니엘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사고 체계가 바뀐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이나를 만나기 전의 너는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지 않았나?”
“아…….”
제이나를 만나기 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가끔 연민이나 분노, 짜증을 느끼긴 했으나 그것이 다였다.
대체로 그때그때 기분을 풀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제이나를 만나고 나서 달라졌어.”
“그래. 대체로 지키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변하기 마련이지.”
“당신도 그래서 변한 건가?”
나타니엘의 말에 시네스트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맞아. 나 역시 그랬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었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나타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더는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 뒤로 나타니엘은 마법에 관한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힌트도 묻지 않았다.
시네스트라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고, 나타니엘은 그것에 만족했다.
“조언에 감사하지.”
“그래.”
그녀의 방에서 나온 나타니엘은 조용히 침실로 돌아왔다.
중간에 자신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잘 자고 있는 제이나가 어쩐지 얄미웠다.
그는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가 제이나를 꽉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에게서 늘 나는 좋은 향기에 마음이 놓였다.
“우웅…….”
잠결에 저를 끌어안고 토닥이는 제이나의 손길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은 불안을 잊으려는 듯.
* * *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 억울함을 호소하셨습니다. 우리는 전하께 직접 사건의 진상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황후께선 전하에 대한 수배령을 거두시지요. 직접 궁으로 와서 소명하겠다 하지 않으십니까?”
“황태자라니, 폐태자입니다!”
황후의 일갈에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밀리아는 입술을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귀족들마저 나타니엘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뒤집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분명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인기는 최악이었다.
고압적이고, 그들을 무시하는 나타니엘에 대한 적개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가 바뀌다니.
“일단 헨리 황자 전하의 황위 계승은 잠시 멈추는 것이…….”
“나타니엘, 그자가 폐하를 해쳤단 말입니다! 모든 정황상 증거가 그걸 말하는데 어찌 말도 안 되는 해명을 듣는단 말입니까.”
황후가 소리를 지르자 귀족들은 다시 눈치를 보았다.
사실 그들로서도 헨리 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큰 이득이 없었다.
만일 이 사건이 일 년 전에 벌어졌다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헨리가 황제가 되고, 귀족들도 밀리아의 섭정을 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일 년 사이에 나타니엘의 실력이 드러났다.
평소에도 꼼꼼하고 세심했던 일 처리는 황제가 다이애나에게 빠져 허우적거릴 때 빛을 발했다.
‘제대로 된 황제가 있다면 일이 편하군.’
그들은 그 몇 주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유능한 황제 밑에서 일하면 얼마나 몸과 마음이 편한지.
“왜 말들이 없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여론이 좋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황태자 전하의 소명을 듣고 나서…….”
“여론은 무슨 여론!”
악을 쓰며 화를 내고 있었지만, 밀리아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나타니엘의 인기는 가히 사회현상에 가까웠다.
성력을 발한 추수제를 기점으로 그 인기가 폭발하면서, 제국민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황태자에게 우호적이라는 걸 대부분의 귀족들은 느끼고 있었다.
더 최악은, 언제나 황태자의 대척점에 있던 신전마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신전이 나타니엘의 손을 들어 준다면…….’
제국민들은 제국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더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신과 용이었다.
자신들을 용이 선택한 민족이라 믿었기에 더욱 뭉쳤고, 용의 후예라는 황실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그런 제국민들의 살아 있는 신이라고 불리는 나타니엘을 건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황태자 전하를 불러서 이야기를 듣는 걸로 하고 원로회를 끝내겠습니다.”
그들은 붙잡을 새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 간신배들.”
화를 참고 침실로 돌아온 황후는 시녀장을 불렀다.
“아버지께는 연락이 없는 게야?”
“예, 폐하.”
“대체 아버지까지 왜 이러시는 거야!”
밀리아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나타니엘을 폐태자라 불렀던 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가족인 아버지마저 자꾸만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 불안함을 자극했다.
“하리.”
그녀의 부름에 시녀장의 얼굴이 비틀렸다. 하리가 시녀장을 통해 나타나는 광경이었다.
언제 봐도 기괴한 얼굴이다.
“예, 폐하.”
“황태자에게 반역죄를 물어야 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제 믿을 건 디에스 기사단밖에 없었다.
아버지마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 군사를 움직일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저희도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면서……. 알겠으니 그만 돌아가 봐요.”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말을 들은 하리는 입술을 물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시녀장과 연결을 끊고, 원래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하리는 바닥을 힘껏 걷어찼다.
황태자가 흑마법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난 뒤부터 그의 흔적을 쫓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런 여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여자부터, 빨리 잡아야겠어.”
완벽했던 이야기를 완전히 어그러뜨린 원흉.
황태자비를 제거해야만 했다.
* * *
“생각보다 귀족 원로원에서 우리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 주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궁에 와 변론해 달라고 합니다.”
데이먼의 보고에 나는 안도감이 들어 몸이 풀렸다.
혹시 그들이 내전을 일으킬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은 것 같았다.
“나와 몇몇 사람만 가는 게 낫겠군.”
나타니엘의 말에 데이먼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황태자비 전하도 함께 오시라고 요구했습니다.”
“제이나도?”
어떤 의도로 불러들였는지 뻔했다.
지금 나타니엘에게 유일한 약점은 나뿐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인질로 날 지목한 것이다.
“거절하지.”
“아니요, 전 갈 거예요.”
“제이나.”
내 말에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특히 나타니엘의 격렬한 반대에 나는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잔뜩 화가 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늘게 떨고 있는 손 위에 내 것을 올렸다.
“제가 가지 않으면 정작 우리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거예요. 황후도 쥐는 게 있어야 받아들이죠.”
“그 담보로 널 맡길 생각은 없어.”
“확실한 증거 없이 제게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일단 우린 용의자잖아요. 더 당당하게 나가야 의심받지 않을 거예요.”
내 설득에도 나타니엘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절대 먼저 나서지 않을게요.”
“…….”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도 방법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다른 짓을 하면 진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요.”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다.
난 끝까지 살아남아서 나타니엘과 행복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