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이제 운명을 결정할 때 (111/145)


111화. 이제 운명을 결정할 때
2023.02.22.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설마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건가?”

조그마한 얼굴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얄밉기 짝이 없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시네스트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 좋아. 황족이 여기까지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 옆에 섰다.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은 누가 봐도 새로운 디저트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주섬주섬 짐을 싸서 앞장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가 볼까?”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포탈을 열었다.

동그란 차원 문 반대편에 낯익은 윈터스 공작성 내부가 보였다.

순간 이동은 나타니엘도 쉽게 할 수 없는 고급 마법이었다.

준비 과정도 필요하고, 좌표 계산 같은 복잡한 작업도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사전 준비 없이 해낸 것이다.

심지어 나타니엘조차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빤히 보고 있었다.


“뭐 해? 안 가고.”

그리고 우리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 건너로 넘어가 버렸다.


“잠, 잠깐만요!”

갑자기 등장한 시네스트라의 모습에 반대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책 없는 것도 닮았군.”

주어는 안 들렸지만,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입을 꾹 닫았다.

우리는 난리가 난 사람들을 말리기 위해 재빨리 차원 문을 넘어갔다.

* * *

다행히 우리의 등장으로 소동은 가라앉았다.

대신 그사이에 기분이 나빠진 시네스트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파티셰를 불러야만 했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구야?”

막시밀리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네스트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용.”

“진짜? 저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시선이 다시 시네스트라에게 향했다.


“테레사를 보러 왔어.”

“테레사를?”

“용은 성력이 다 사라졌다고 알고 있더라고. 근데 테레사한테 그 힘이 있으니까 궁금했나 봐. 게다가 그 성력이 나타니엘을 도와줄 수 있대.”

“테레사에게서 성력을 없앨 수도 있는 건가?”

“그건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도움을 받지 않을까?”

“흐음…….”

막시밀리안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진짜 용 맞아?”

“마탑주가 세운 방어 체계를 뚫고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나타니엘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나타니엘의 인기가 엄청난 건, 그 외모가 전해 내려오는 시네스트라와 비슷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확실히……. 누가 봐도 남매같이 닮긴 했군.”

막시밀리안은 리 부인을 불러 테레사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명했다.

나는 기사들과 대치 중인 시네스트라에게 다가갔다.


“응접실로 가시죠, 다과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막시밀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파티셰에게 제일 자신 있는 디저트로 최선을 다하라고 전해 줘.”

내 말에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타니엘과 성격까지 닮았다는 생각 탓이겠지.

* * *



“여기 있습니다.”

공작성의 파티셰가 초조한 얼굴로 공작가 사람들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처음 보는 귀빈에게 닿아 있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레몬 머랭 타르트를 포크로 잘라서 입에 넣었다.


“맛있다.”

사르륵 녹아내리는 표정에 우리 모두 안심했다.

파티셰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비틀거렸다.

그런 그를 안타깝다는 듯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타르트가 입에 맞나요, 시네스트라 님?”

“흠, 생각보다 맛있군.”

덤덤해 보이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포크를 든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한 조각을 다 비운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테이블에 남은 타르트를 전부 올렸다.

풀이 죽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거렸다.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그녀는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나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사람들을 물렸다.

시종들이 물러나자 모습을 숨기고 있던 나타니엘이 마법을 거둬들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 역시 타르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도 타르트 한 조각을 덜어 주자 테레사가 도착했다.

밖에서 정원을 관리하고 있던 탓에 그녀는 씻고 옷을 갈아입느라 늦었다.


“막스, 무슨 일…….”

문을 열고 들어온 테레사는 새로 나타난 인물을 보고 깜짝 놀라 멈췄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

나타니엘과 똑같이 생겨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시네스트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레사의 앞에 섰다.


“누, 누구세요?”

눈 색이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테레사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시네스트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물러서는 테레사에게 달라붙었다.


“허, 허…….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막시밀리안이 나섰다.


“물러서 주십시오.”

시네스트라는 막시밀리안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선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남은 타르트를 다 먹었다.


“너희 말이 맞구나. 진짜 성녀가 남아 있었어.”

그러고는 탁, 포크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시네스트라의 묘한 분위기에 나는 숨을 골랐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성력이 있다면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야. 네가 성녀에게서 성력을 나눠 받으면 되니까.”

“그러기만 하면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가?”

나타니엘의 말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시네스트라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테레사는 시네스트라의 반대편에 가서 앉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영 안 좋았다.

이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네가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던 시네스트라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마력이나 성력이나 하나의 힘에서 나온 것이니까.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대량의 힘을 넣어 주면, 그걸 마력으로 바꾸는 건 몸이 알아서 할 거야.”

그녀의 말에 나타니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꽤 기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테이블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은 나타니엘의 머리 위에 테레사가 손을 올렸다.

시네스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레사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녀의 몸에서 생겨난 반짝이는 흰 빛이 서서히 나타니엘 쪽으로 넘어갔다. 빛은 곧 그의 몸을 감싸더니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정도면 돼.”

시네스트라의 말에 테레사는 나타니엘에게서 손을 떼었다.

나타니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곧, 익숙한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지긋지긋했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타니엘은 미리 준비해 둔 망토를 두르며 투덜거렸다.

몇 주 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했었다.


“정말 황태자 전하셨군.”

옆에 있던 아버지는 눈앞에서 나타니엘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중얼거리셨다. 직접 보아도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몸 여기저기를 움직이다가 시네스트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도와주어서 고맙군.”

“흥,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나타니엘은 그녀의 타박에 입을 꾹 닫았다.

맞는 말이라서 그런가. 아니, 그녀의 압도적인 힘에 놀라서 그냥 조용히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제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요.”

막시밀리안은 서둘러 다음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황후 쪽에서는 이미 저희가 황태자 전하를 찾았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수도에서 탈출하는 시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가 무리하게 아버지를 빼돌린 시점에서 공작가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북부를 지키던 기사들을 이용해 바로 쳤을 것이다.

황후는 지금 황태자가 직접 무대에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타니엘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성명을 발표하는 게 좋긴 하죠. 문제는 그동안 나타니엘이 숨어 있던 시간이 길어서 세간의 의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결백하다는 증거가 없으니…….”

내전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걱정해야만 했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살해당하신 곳이 개인 집무실이라고 그랬지?”

“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기에 녹화 장치가 있어.”

“네?”

경계가 심한 황성에 녹화 장치라니.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는데 그냥 두신 거다. 황후가 설치한 거라서.”

나타니엘은 과거 이야기를 하며 마도구의 출처를 알려 주었다.


“폐하께서 언젠가 지나가듯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

“부부가……. 알 수 없네요.”

나는 황후의 집착과 그 집착에도 꿋꿋이 바람을 피우던 황제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확보하면 지금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겠네요.”

막시밀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네스트라를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 황성에 몰래 잠입하기에 자칭 용이라는 그녀가 가장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난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아. 내가 함부로 손을 댔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

시네스트라는 이미 우리가 할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녀의 반응에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성명부터 발표하지. 황후의 반응을 보고 그다음 계획을 세우는 게 낫겠어.”

“지금 당장은 안 되겠습니까?”

나타니엘의 힘을 기대한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아직 마력이 전부 회복된 게 아니야.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하는데, 그 정도 힘을 모으려면 적어도 2주의 시간이 더 필요해.”

“성명으로 시간을 끌자는 이야기군요.”

내 말에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나타니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대대적으로 공작성으로 들어오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진중한 모습의 나타니엘은 단상에 올라가 황후를 비판하고,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간 공작가와 황후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귀족 중 일부가 만남을 요청하기도 했다.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 피곤해요.”

그의 옆에서 함께 사람들을 상대했던 난 씻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역시, 너무 체력이 약해.”

“전 평균이라니까요.”

볼멘소리를 냈지만 나타니엘은 영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는 나타니엘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언제나처럼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에 반듯한 이마.

보기 좋게 뻗은 짙은 눈썹 아래 열기를 숨긴 붉은 눈동자가 날 담고 있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이 얼굴을 만지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그를 위해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혹은 돌아오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매일 밤 그 걱정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