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용과 만나다
(110/145)
110화. 용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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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용과 만나다
2023.02.18.
불과 문 하나 너머에 완전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한여름의 숲처럼 녹음이 짙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 이런 게 공작성 지하에…….”
인생의 반을 살았던 집 발밑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공작성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문이 있는 것뿐일세.”
나타니엘은 아버지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늘하고 축축했던 공기가 따뜻하고 포근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안쪽에 다른 존재가 느껴진다.”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타니엘이 내 옆으로 날아왔다.
“이상한 놈일지도 몰라.”
“이상한 놈이었으면 벌써 공작성이 날아가지 않았을까요?”
내 말에 그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졌다.
우리는 나타니엘의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는 내내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 공간의 주인은 서식지와 상관없이 예쁜 꽃과 식물들을 가져와 꾸며 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식물은 있는데 동물은 하나도 없네.”
그 흔한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을 발견했다.
“어…….”
그리고 그 너머에 모래사장과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남부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우리는 조심스럽게 바다 쪽으로 향했다.
앞에 파라솔을 세우고 선베드에 누워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긴 머리카락의 여자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저 사람이 용인 걸까?’
우리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 그녀의 붉은 눈이 우리를 향했다.
“저 꼬맹이는 뭐야?”
그녀가 용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재수 없는 말투가 정말 나타니엘을 꼭 빼다 박았다.
“뭐야?”
상대의 도발에 나타니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찮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앞으로 나서려는 그의 모자를 잡아당겼다.
“저 혹시, 시네스트라 님이 아니신지…….”
나는 재빨리 양손을 모으고 몸을 굽혔다.
여자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흠흠. 날 알아보다니, 넌 마음에 드는구나.”
역시 나타니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성격이다. 나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시네스트라의 가호를 받고 있는 제국의 황태자비, 제이나 시네스트라라고 합니다.”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는 에이드리언 윈터스입니다.”
내 모습에 아버지도 재빨리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우리 둘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 시네스트라다.”
시네스트라는 우리를 쓰윽 훑어보더니 나타니엘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나타니엘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결국 그녀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작은 나타니엘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찔러 보고 건드렸다.
“아직 한참 꼬맹이구만.”
그렇게 말하는 시네스트라도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만 그런 거겠지.’
그녀의 정체가 사실 제국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살았던 용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무시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타니엘도 그걸 알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서 온 거다.”
“원래 모습?”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원래 모습이잖아.”
“예?”
우리의 시선이 바로 나타니엘을 향했다.
“원래 용이었는데 마력으로 사람 모습으로 살았던 거 몰라?”
시네스트라는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 * *
막시밀리안은 디에스 기사단의 청소부에게서 얻어 낸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받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내용이 많군.”
“데려온 기술자가 솜씨가 좋았습니다.”
보고하는 데이먼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 하리라는 여자는 정체가 대체 뭐지?”
“일종의 예언자로 판단됩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고, 거기에 맞춰서 제국을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미친 자로군.”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국의 역사를 좌지우지한다는 비밀결사가 고작 꿈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영 미심쩍었다.
‘잠깐.’
막시밀리안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렸다.
꿈에서 보았던 테레사의 죽음을 막기 위해 현실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꿈속에서 어머니와 손잡고 자신을 유혹했던 여자는 미리 결혼시키고, 근근이 연락하던 어머니와도 아예 연을 끊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나타났지.’
심지어 결혼시킨 바로 그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마치 자신이 꾸었던 꿈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골치 아프게 되었군.”
고작 꿈이 아니라 진짜 미래의 정보였다.
창과 방패의 싸움과 다름없었다.
서로 같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이쪽이 피하면 다른 방법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막시밀리안의 승리였다. 그는 다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테레사도 살아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테레사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꿈이 끊어졌어.’
막시밀리안의 꿈은 테레사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날 이후의 미래는 이미지가 얼핏 떠오르는 정도였지, 단 한 번도 뚜렷하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꿈에서 본 테레사의 죽음까지 남은 기한은 열흘.
‘황실 문제도 있어서 테레사를 지키는 게 더 복잡해질 수도 있어.’
꿈속에서 테레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번 죽었다.
매번 배신을 당하고 상처받은 그녀는 병으로 죽기도 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어떤 생에서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살해당하기도 했다.
마치 세상이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테레사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라.’
지금까지 꾸었던 꿈과 현재 다른 점은 하나였다.
테레사에게 성력이라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것.
마치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힘이었다.
“그리고, 침입했던 흑마법사와 청소부에게서 이런 걸 찾아냈습니다.”
데이먼은 책상 위에 검은색 마석이 꽂힌 작은 반지 두 개를 올렸다.
“처음에는 흑마법사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청소부의 몸을 뒤지니 그 역시 이 반지를 갖고 있더군요.”
“어쩌면 상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일지도 모르겠군.”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분석을 의뢰하는 게…….”
막시밀리안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앙증맞은 생김새를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인간은 시각의 동물이라는 고대 격언이 맞았다.
그 포악한 황태자를 보호해야 할 소동물 정도로 인식하는 걸 보면.
“그나저나 아가씨와 공작님은 미궁에서 괜찮으실까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은데.”
“자꾸 아가씨라고 하지 마. 황태자비라고.”
“죄송합니다, 입에 붙어서.”
데이먼뿐만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안도, 리 부인도 심지어 공작마저 종종 제이나를 황태자비가 아닌 윈터스 공작 영애로 대할 때가 있었다.
“이 일만 잘 마무리가 된다면 곧 황후가 되겠지.”
“말괄량이였던 아가씨께서 제국을 다스리신다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하지만 썩 잘 어울리기도 했다.
특히 황성에서 빠져나와 히에라로 도망친 과정을 떠올리면, 평범한 귀족 영애라고는 생각지 못할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이곳에 온 뒤 종종 회의할 때면 제이나의 신선한 시각에 놀라기도 했다.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잘할 것 같아.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막시밀리안은 쓰게 웃으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동생과 테레사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시네스트라는 우리를 건물 안쪽으로 데려갔다.
고풍스러운 신전 스타일의 외관과 달리 내부는 세련된 모습이었다.
역시나 공간을 이동했는지 창밖으로 가지 위에 눈이 남아 있는 침엽수가 보였다.
“이쪽으로 앉아.”
시네스트라는 자리를 권하고 코코아가 담긴 머그를 우리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접시에는 초콜릿이 박힌 쿠키까지 놓여 있었다.
‘좋아하는 음료수도 둘이 똑같아.’
그냥 용들의 취향이 단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와 아버지는 컵을 손난로처럼 쓰는 것에 비해 나타니엘과 시네스트라는 이미 반쯤 컵을 비운 상태였다.
통통한 앞발로 쿠키를 들고 먹는 나타니엘과 한입에 쿠키를 털어 넣는 시네스트라를 보며 아버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황성에서 황제가 살해당했다 그거지?”
“예. 그 뒤로 나타니엘이 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요.”
우리의 말에 그녀는 남은 코코아를 단숨에 마시고 대답해 주었다.
“너희들이 생각한 대로 땅이 더럽혀져서 그런 건 아니고, 마법진이 손상된 것뿐이야.”
“마법진이 손상되었다고요?”
그녀에 설명에 의하면 이랬다.
용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꽤 많은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마력은 자연물에서 나오는 것이라 대도시인 수도에서는 얻을 수 있는 마력이 적었다.
“그래서 마력을 모으는 마법진을 황성에 그렸고, 마법진에 모인 마력과 나를 연동시켜서 거기서 얻는 마력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남은 거지.”
그리고 그 마력은 용의 피에만 반응한다고 했다.
즉, 용의 힘을 진하게 타고날수록 마법진에 모인 마력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황족이 그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모든 용이 그 마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는 거고. 나타니엘 같은 경우가 좀 특이한 거지.”
시네스트라는 신기하다는 듯 그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직 새끼 용이니, 마력도 부족하고 운용에도 능숙하지 못하니까 그 마법진에 많이 의존했을 거다.”
“그럼, 이번에 나타니엘이 인간의 모습으로 못 돌아간 이유가…….”
“황제가 죽을 때 피 일부가 마법진에 덧씌워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 같군.”
“방법이 없을까요?”
성질 급한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바로 해결책을 요구했다.
시네스트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이 해결하길 기다려 주는 거야. 여기처럼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다 보면 마력이 금방 모이지.”
“얼마나 걸릴까?”
나타니엘의 물음에 시네스트라는 곰곰이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말했다.
“네 속도라면 한 10년?”
“너무 늦어!”
“이것도 빠른 건데.”
나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으음, 없는 건 아닌데.”
약간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성녀가 있다면 가능해. 물론 성력이 있는 진짜 성녀 말이야.”
“성력은 마력과 반대되는 힘 아닌가?”
“원래 우주의 힘은 하나였단다, 꼬맹아.”
“꼬……!”
화를 내려던 나타니엘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성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혹시 도와줄 수 있으신가요?”
“지금 같은 시기에 성력이 있는 자를 알고 있다고?”
오히려 놀라는 건 그녀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고수하던 시네스트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 성녀가 존재한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진짜 존재해요. 저희랑 같이 가신다면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시네스트라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나는 온갖 말로 그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그간 나타니엘과 함께 지내면서 익힌 스킬을 이용하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마음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코코아보다 몇 배는 맛있는 음료수도 있고, 쿠키보다 훨씬 맛있는 디저트도 있어요.”
시네스트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어쩐지 익숙한 눈빛이라 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