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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용을 찾아서 (109/145)


109화. 용을 찾아서
2023.02.15.



 
꽤 엄숙한 선언이었지만, 하찮은 모습 덕에 웃음만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자꾸 웃지 마.”

“그치만, 너무 귀여운걸요.”

“…….”

나는 삐진 것 같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벌려 신호를 주자 뽀르르 날아와서 품에 안겼다.

아닌 척하면서 이럴 때는 또 귀여움을 마음껏 사용한다니까.

나는 작은 등을 토닥이며 공작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 모습도 좋지만, 황제가 되려면 사람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죠.”

“뭐……. 그래야겠지.”

하다못해 커다랗고 멋진 용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같은 모습으로는 황태자의 위엄은커녕 용의 위엄도 바닥에 떨어질 판이다.

나타니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는 방법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직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응.”

나는 그를 위로하며 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곧 공작성에 도착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책을 읽는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를 침대 위에 재웠다.

산책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하는 연습을 해서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금방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가씨, 안에 계신가요?”

잠시 후, 리 부인이 급하게 문을 두들기며 나를 찾았다.

문을 열자 살짝 상기된 표정의 그녀가 말했다.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네. 어서 가 보세요,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집무실로 달려갔다.

무사히 도착하셨다니,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멀리서 달려오는 날 보고 기사들이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안쪽에 그리운 인영이 서 있었다.


“아버지!”

놀란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문가에 서서 눈가를 닦아 냈다.


“왜, 왜 울고 그러는 게야.”

아버지의 당황한 음성이 가까이서 들렸다. 크고 거친 손이 어깨를 토닥여 주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제이나.”

오랜만에 아버지 품에 안겼다.

어색해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 이 기분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은 그간 자각하지 못했던 불안함을 녹여 주었다.

* * *

어느 정도 내가 안정되자 막시밀리안은 다른 사람들을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오랜만에 윈터스 공작가 사람들만 남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아버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대체 어디 가신 게냐.”

“아, 그게…….”

막시밀리안은 힐끗 내 눈치를 보았다.

무언의 눈빛이었지만, 설명은 너에게 맡긴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곤해서 자고 있어요.”

“뭐? 황태자 전하께서 피곤이란 걸 아신다고?”

이상한 곳에서 놀라는 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나타니엘은 먼치킨에 가까운 모습이니까.

밤을 지새우고 일한 다음 날에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는 나타니엘 탓에 고통에 시달리는 관료들의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 모습의 나타니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버지, 놀라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 설마 황태자 전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몸에 문제가 생긴 건 맞긴 하지만 아버지가 상상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은…….”

나는 그간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열심히 설명해 드렸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아버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니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네 말이 사실이면…….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겨우 말을 내뱉었지만, 곧 침묵이 이어졌다.


“그, 그래서 지금은 주무시고 계신다고?”

“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은 진짜 용을 찾아서 물어볼 거고.”

“네.”

“너무 허무맹랑한 거 같은데……. 진짜 용이 있다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버지 역시 다른 사람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마법이 난무하고 마물이 튀어나오는 판타지 세계라지만, 용의 존재는 신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이 세계는 신의 힘인 성력이 사라져 있고, 마석을 이용하지 않으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덕에 신에 대해서는 지구와 별다를 것 없는 인식 수준을 갖고 있었다.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그저 종교로서 믿는 정도로.


“게다가 지금 믿을 만한 건 용뿐이라서요. 일단 제가 고서에서 찾은 장소로 사람을 보내긴 했어요.”

내 말에 막시밀리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찾아보긴 했는데, 두 곳은 흔적이 없었고 나머지 한 곳은 마법으로 막혀 있어서 접근이 어렵다고 일단 돌아왔어.”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나타니엘뿐이었다.


“그럼 나타니엘을 데리고 가는 건 어떨까?”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그런데 좀 멀어서.”

건강한 기사들이 움직이는 데도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나타니엘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하니, 나도 함께 움직인다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빠르게 이동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나와 막시밀리안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조용히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할아버지가 용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하신 적이 있었지.”

“할아버지께서요?”

“그땐 그냥 전설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기대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일단 말씀을 해 보세요.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내 재촉에 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작성 지하에 있는 미궁에 용이 사는 방이 있다고 하셨다.”

“고, 공작성에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 * *



“오랜만이군, 공작. 무사히 탈출한 걸 축하하네.”

“예, 예.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버지는 복잡한 얼굴로 내가 안고 있는 걸 보셨다.

거기엔 얼마 전 완성한 후드티를 입고 있는 나타니엘이 있었다.

곧 고대 용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꼬리까지 살랑거리는 모습은 치명적일 정도로 귀여웠다.


“그럼 지하 감옥으로 가 볼까.”

“정확히는 지하 미궁입니다.”

나타니엘의 말을 친절하게 정정해 준 아버지는 직접 앞장섰다.

막시밀리안은 다른 볼일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와 나, 나타니엘만 지하로 향했다.


“공작성에 이런 음침한 공간이 있다니. 대체 윈터스 가문의 선조는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용과 계약하고 싶다고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선조를 둔 분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타니엘의 작은 등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다 어깨가 더 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유치한 기 싸움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내려갔다.

습하고 어두운 감옥을 지나가자 갑자기 공기가 묘하게 상쾌해졌다.

나타니엘 역시 느꼈는지 꼬리를 움직이는 것이 빨라졌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군.”

“어딘가 공기가 들어오는 곳이 있을 겁니다.”

방금까지 기 싸움을 하더니 둘은 어느새 신이 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기억과 나타니엘의 동물적인 감각에 의지해서 미궁을 걸어갔다.

중간중간, 길을 잃을 때를 대비해서 작은 마석을 떨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깐 쉬도록 하지.”

“벌써 점심시간도 지났군요. 여기서 잠깐 먹고 움직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미궁이 어두컴컴한 탓에 시간 감각이 둔해진 나머지 식사시간까지 놓쳤다.

푸릇푸릇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피크닉도 아니고, 어둠 속 등불에 의지한 점심은 정말 이상했다.

우리는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고 잠깐 휴식을 취했다.

나타니엘은 근처를 더 살펴보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가 네 걱정을 다 하시는구나.”

“음?”

“이 아비는 네가 지쳤는지도 몰랐지 뭐냐. 이렇게 오래 같이 걸어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생각도 못 했고.”

잠깐 쉬자고 한 게 날 위해서 한 말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배려에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쯧. 황실만 아니었다면 괜찮은 결혼이었을 텐데.”

“아버지도 참, 자꾸 왜 그러세요.”

“너도 네 딸이 결혼해서 고생만 하는 걸 봐 봐라. 사위가 예뻐 보이는지.”

눈까지 샐쭉해져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결혼 후에 고생하긴 했지만, 굳이 사태의 원흉을 꼽자면 나타니엘이 아니라 오라버니와 아버지 아닌가!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난장판이 벌어질 걸 알았기에 그냥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께서 좀 늦으시는구나. 혹시 길을 잃으신 건 아니냐?”

“그럴 리가 없어요.”

“쪼그마한 게 영……. 어린애 같아서 미덥지가 못하단 말이지.”

“그래도 귀엽잖아요.”

“그래, 귀엽긴…… 하지.”

아버지도 나타니엘의 외모는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음에 뭘 입히면 좋을지 의견을 나눴다.


“황성으로 다시 돌아가면 용일 때 쓰는 왕관을 맞춰도 좋을 거 같지 않아요?”

“털 달린 빨간 망토까지 두르면 꽤 위엄 있고 귀여워 보이겠군.”

전혀 위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귀엽게 보일 건 확실했다.

우리는 왕관에 어떤 보석을 넣어 만들면 잘 어울릴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조금만 더 가면 특이한 파동의 마력이……. 제이나?”

뒤늦게 나타난 나타니엘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우리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생각했던 옷들을 상상 속에서 그에게 입혀 보았다.


“뭐, 뭐야. 왜 둘 다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듯, 나타니엘은 뒤로 물러서며 사나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별일 아닙니다.”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나타니엘의 의심을 차단했다.

그리고 우리는 몰래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재빨리 나타니엘을 안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럼 어서 가요. 거의 다 온 거 아니에요?”

“으응.”

나타니엘은 뭔가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했다.

그의 말마따나 30분 정도 더 걷자 갑자기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이상한 글자가 가득한 문이 있었다.


“제이나, 읽을 수 있겠나?”

“아니요. 이건……. 처음 보는 글자예요.”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가까이로 날아갔다.

아버지도 나서서 문을 살피면서 무슨 장치가 없는지 확인했다.

밀어도 보고, 당겨도 봤지만, 쉽게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예전에 추리 소설에서 본 것을 떠올리며 문을 두드렸다.

반대편이 진짜 비어 있다면 소리가 울릴 것이다.

통통, 하는 맑은 소리가 공터에 울렸다.


“확실히 뒤가 비어 있나 봐요. 사람을 불러서 여길 부수는 게 더 나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세상에.”

활짝 열린 문 바깥쪽은 녹음이 가득한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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