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반격의 시작
(108/145)
108화. 반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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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반격의 시작
2023.02.11.
짧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잔디밭에 툭 떨어졌다.
“으, 으으…….”
처음 겪어 보는 순간 이동 마법은 최악이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울렁거리는 게 멀미에 시달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괜찮나?”
나타니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속이 좀 안 좋아서……. 나타니엘은 괜찮아요?”
“나도 별로야.”
우리는 가까운 나무 둥치에 앉아서 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히에라보다 더 서늘한 바람이 우리가 제국의 최북단에 도착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지.”
미리 연락했으니 사람을 보내 줄 것이라 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재빨리 그를 품에 넣고 나무 뒤에 숨었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달려오는 통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테레사! 오라버니!”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자 제일 앞에 있던 말이 더 빠르게 달려왔다.
우리 바로 앞에서 선 말에서 사람이 구르듯 내려 달려왔다.
“제이나!”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테레사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 숨어 있던 나타니엘이 꽥 소리를 내며 눌리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그녀가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끌어안는 통에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곧 오라버니까지 도착해서 눈물을 훌쩍이며 내 등과 어깨를 토닥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난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막시밀리안의 말에 테레사는 더 큰 소리로 울며 날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타니엘이 납작하게 눌리게 생겼다.
“자, 잠깐. 테레사, 잠깐만 뒤로 물러서 줄래요?”
“아, 아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흑.”
내 말에 테레사는 훌쩍이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안고 있던 보자기를 살짝 풀었다.
“죽는 줄 알았네.”
품에서 튀어나온 나타니엘이 투덜거리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용이 된 나타니엘을 처음 보는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뭐야.”
손가락질까지 하며 기겁하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에 나타니엘의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였다.
혹시 그가 사고를 칠까, 재빨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셔.”
“어?”
사실 그대로를 알려 준 것뿐인데 반응이 좋지 않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타니엘의 날갯짓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 * *
나타니엘을 숨긴 채로 일단 우리는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오라버니의 개인 집무실에 있는 의자에 앉자 숨어 있던 나타니엘이 품에서 기어 나와 테이블 위에 앉았다.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에는 아침이 미리 차려져 있었는데, 버터 냄새가 나는 갓 구운 빵과 잼, 그리고 커피와 주스가 놓여 있었다.
“아침도 먹지 못했을 거 같아서 미리 준비했어요. 일단 드세요.”
테레사는 빵을 찢는 나타니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내게 아침을 권했다.
나는 그가 건넨 빵에 잼을 발라서 돌려주고 부드러운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행복해.’
얼마 만에 먹는 따뜻한 빵인가.
게다가 지금 시기에 곡물을 얻기는 더 어려우니 그들에게 얻어먹는 것도 미안했다.
이전의 삶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편안했는지 새삼스레 알 것 같다.
“참,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어요?”
“지금쯤 수도를 탈출하고 계실 거야. 널 찾으러 기사단을 보내면서, 아버지를 탈출시킬 사람도 보냈거든.”
막시밀리안은 입가에 잼을 묻힌 채 빵을 먹고 있는 나타니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냅킨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 주고 말했다.
“저기, 둘 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데요.”
“아!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테레사가 먼저 사과하자 막시밀리안도 뒷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대들 같은 사람이 처음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생각보다 관대한 나타니엘의 반응에 둘 다 민망한 듯 뺨을 붉혔다.
빵을 다 먹고 빨대로 주스까지 마시자 나타니엘은 좀 졸려 보였다.
“좀 쉬어요.”
“으응…….”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나타니엘을 쿠션 위에 올려 주었다.
우리는 따로 차를 마시면서 차마 그의 앞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체, 전하께서는 왜 저런 모습인 거야?”
“음, 말하자면 긴데…….”
나는 그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니엘을 만났을 때부터, 추측이지만 황제의 죽음으로 황성이 오염되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까지.
“그럼 영영 저런 모습으로 사셔야 하는 건…….”
막시밀리안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잘 자고 있는 나타니엘을 보았다.
아무래도 새끼 용이 된 황태자가 영 미덥지 못한 것 같았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그게 뭔데?”
“용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내 말에 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요, 용은 전설이라고 들었는걸요.”
“하지만 나타니엘은 진짜 존재하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이라고 생각하며 신성시했지만, 이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타니엘로 인해 용과 인간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는 존재가 있다는 게 증명됐다.
게다가 테레사의 신성력 역시 신의 힘 중 일부이니 전설인 줄 알았던 이야기의 대부분은 ‘진짜’였던 것이다.
“만일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땐 나타니엘이 마력을 다시 모을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황후가 세력을 다 장악하기 전에 빨리 치는 것이 유리했다.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나타니엘이 원래대로 돌아와 사람들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타니엘이 전면에 나서면 흔들릴 귀족도 많을 테고, 무엇보다 제국민들은 나타니엘을 황후보다 더 좋아하니까요.”
“그 방법이 희생이 적긴 하지.”
다행히 오라버니가 믿어 주었다.
그는 사람을 풀어 내가 말한 장소를 찾아 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다시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그간 세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이 자꾸 늦어지는 게 문제야. 이대로라면 황제 자리에 올라도 계속해서 정당성을 위협받을지도 몰라.”
막시밀리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결백하다는 증거가 없다면 반대파가 끊임없이 나타니엘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헨리 황자가 문제가 되겠구나.’
나는 피아노를 치며 행복해하던 어린 소년을 떠올렸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모두가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
황제와 아나이스, 나타니엘도 즐거워했다.
심지어 황후조차 감미로운 소리에 취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모두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테레사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황후는 분명,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며.
* * *
나타니엘이 낮잠에서 깨어나자 막시밀리안이 찾아왔다.
“참,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틴 경 말입니다.”
“아, 아아……. 그가 여기에 와 있나?”
공작령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딱 이곳에 있을 줄이야.
“지금 내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적을수록 좋지. 굳이 그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하지만 나타니엘은 막시밀리안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어째서인지 막시밀리안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번 상태라도 보시는 건 어떤지요.”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안 좋은 일을 당한 건가 싶어 나타니엘이 물었다.
“어디 크게 다쳤나?”
나타니엘의 물음에 막시밀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쳤다기보다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나타니엘의 말대로 지금 그의 모습을 보이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신하로서 마틴을 믿는 것과는 격이 다른 믿음이 필요했다.
고민하던 나타니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뭐 하고 있는지 보러 가도록 하지. 소공작이 도와줄 수 있겠나?”
“아, 제가 말입니까?”
“몸을 숨기면서 계속 날아다니는 건 아직 힘들어서.”
그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타니엘을 들었다.
둘은 곧 마틴이 숨어서 일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복도는 어둡기만 했다.
나타니엘은 높은 곳에 있는 창에서만 빛이 들어오는 것이 어쩐지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 안에 있나?”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자 초췌한 얼굴의 마틴이 나타났다.
나타니엘은 언제나 웃고 다니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던 마틴의 의외의 모습에 당황했다.
“황태자 전하는 찾으셨습니까?”
“아직 소식을 기다리고 있네.”
막시밀리안은 적당히 거짓말을 하며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나타니엘은 마틴이 일하고 있던 책상 위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그가 살핀 서류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황후가 숨겨 놓은 사병의 위치를 드디어 찾은 듯했다.
“이제 좀 쉬면 어떤가.”
“전하께서 어디서 뭘 하고 지내시는지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쉬겠습니까.”
마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제가 황후의 사병을 조금만 더 빨리 찾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다 제 잘못인 것 같아서 죄송할 뿐입니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되네.”
막시밀리안은 풀이 죽은 마틴을 위로하듯 말했다.
그나마 지금 상태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양위 과정이 이렇게 꼬일 줄은…….”
그러면서 구구절절 자신의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마틴 특유의 길고 장황한 이야기였으나 그 속에는 더 빨리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숨어 있었다.
“전하의 최측근으로 승진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졌던 것 같습니다. 더 제대로 일을 했어야…….”
말을 늘어놓던 마틴은 갑자기 테이블 위에 나타난 괴생명체에 입을 다물고 벌떡 일어났다.
눈을 깜빡거리던 그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책상 위를 보았다.
“소공작님, 저게 보이십니까?”
“아.”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나타니엘을 발견한 막시밀리안이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일세.”
“장난……이시죠?”
그러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나타니엘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말 많은 건 여전하군, 마틴.”
앳되지만 확실히 나타니엘의 목소리였다.
놀란 마틴은 다리가 풀렸는지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는 모습이 마치 악마 같은 게, 나타니엘이 확실했다.
“그간 얼마나 해 놨는지 좀 볼까?”
마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 * *
공작성에서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마력을 모으기 위해 나타니엘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꼭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성벽 안쪽에 있는 마을은 아주 평온해서 가끔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면 나타니엘은 몰래 내 뒤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나타니엘, 그거 알아요?”
“응?”
“나타니엘은 항상 어린애들을 보고 있어요.”
“내가 그랬나?”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봐요. 지금도 애들이 놀고 있는 걸 보고 있잖아요.”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의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보면서 무슨 생각 해요?”
지난번에 히에라에서도 이랬던 적이 있어서 아이를 갖고 싶은 건가 하고 착각했었다.
이제는 아닌 걸 알았으니 그가 유독 아이들을 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헨리 황자님 생각해요?”
“그런 것도 있고.”
잠시 뜸을 들이던 나타니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저 아이들이 부러운가요?”
내 물음에 나타니엘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의 옆에서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응.”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빨리 당신과 만났다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을까.
“가끔 보면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도, 불행해 보이는 아이들도 있어.”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나타니엘이 다른 사람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감정이 온전해졌다는 기쁨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모두 행복할 수는 없죠.”
“응. 그래서 그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뭐가요?”
나타니엘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그대와 함께 아이들이 불행해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