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도주하는 한 사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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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도주하는 한 사람,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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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도주하는 한 사람, 한 마리
2023.02.08.
나타니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래요…….”
황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수도 밖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거나 평생 감금당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유모에게 듣기로는 황궁 자체가 용과 계약한 증거라고 하더군.”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초대 황제가 용, 시네스트라의 이름을 받기 위해 황성을 대륙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었다는.
“용은 황성이 마음에 들어서 황제에게 자신의 이름과 힘을 나눠 주었다고 했어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성을 불결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했죠.”
불결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됐다.
말 그대로 성의 청결을 유지해야 된다는 설과 사용자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한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성한 땅에서 피를 흘리면 안 된다고도 하고요.”
“그래. 아마 그것 때문에 내 힘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만일 황제의 죽음 때문에 이 일이 벌어진 거라면, 사태 수습이 요원해 보였다.
흘린 피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지금 믿을 만한 건, 황실 서고에 있는 고대 용에 관한 고서야. 다른 데에 복사본이 없을 테니 확인하려면 황성으로 가는 수밖에…….”
“그건 너무 위험해요!”
원래 모습으로, 자유롭게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로 간다 해도 반대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는걸. 이 모습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건 그대도 알잖아.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타니엘이 말한 용에 관한 책은 전부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히…….’
그리고 곧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용에 대한 정보나 용을 소환하는 방법이 아니라, 용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추측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대 용을 직접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
“예전에, 나타니엘을 원래대로 돌아오게 해 보려고 책을 읽었던 적 있잖아요.”
“아…….”
“사실 그땐, 뭐 이런 쓸데없는 추측을 하나 했거든요. 부른다고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고.”
“정말 용이 거기에 있을까?”
“소환하거나 흩어져 있는 정보를 모으는 것보단 직접 찾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죠.”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그 용은 어디로 간 거지?”
초대 황제가 죽고 나서 용은 북부로 향했다. 여기까진 확실한 사실이었다.
정확히 어딜 갔는지부터가 추측이었다.
“일단 우리 공작성으로 가야 해요.”
시네스트라는 험준한 북부 산맥에 숨어 있다.
* * *
다음 날 새벽.
우리는 해가 뜨기 전, 애매한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다.
올 때 입었던 움직이기 편한 복장과 신발을 갖추고, 머리를 틀어 올려 모자 속에 숨겼다.
어제 무리한 마법을 사용한 탓인지 잠에 취한 나타니엘을 보자기에 담아 몸에 단단히 묶었다.
산이라 새벽은 아직 쌀쌀한 탓에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이제 가시게요?”
“응.”
몰래 배웅 나온 마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웃었다.
“다음에는 꼭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올게.”
“그런 건 나중에 해 주셔도 되어요. 몸만 건강하시면…….”
눈물까지 글썽이는 마리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곳에서 몇 주간 숨어 지내는 동안 마리가 얼마나 잘해 줬는지 떠올렸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잘 숨어 있어야 해.”
“다음엔 황후 폐하가 돼서 오셔야 해요.”
그녀의 눈물 섞인 농담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마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무언가를 내어 주었다.
“이, 이건 단검이에요. 혹시 모르니까 꼭 가져가세요.”
그녀는 내 손바닥만 한 단검을 건네주었다. 검은색 가죽 검집이 최고급품은 아니지만, 꽤 좋은 물건임을 보여 주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녀가 꽤 무리했다는 게 느껴졌다.
“잘 쓸게.”
나는 허리띠에 단검을 고정시키고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등을 몇 번 두들기고 몸을 돌렸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다시 모인 기사단은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가장 의심을 덜 받을 상인으로 변장하고 산을 넘기로 했다.
가벼운 가죽 갑옷만 제외하면 마을 사람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낡고 허름한 차림인 그들은 누가 봐도 상인처럼 보였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어제 무리했는지 아직 자고 계셔.”
나는 앞에 묶어 둔 보자기를 살짝 두들겼다.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아직 일어날 기색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결계 끝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잖아. 그때까지만 주무시게 할 거야.”
의심스러워하는 노기사를 의식한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나타니엘의 실력이 미덥지 못한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 거대한 마을을 지키는 마법도 모두 나타니엘의 힘인데.
“출발!”
노기사의 외침에 상단을 가장한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이동 장치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나타니엘이 결계를 임시로 열면 나가기로 했다.
최단 거리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다들 말없이 묵묵히 길을 걸었다.
멀리 결계의 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배에 묶어 둔 보자기가 꿈틀거렸다.
“나타니엘, 일어났어요?”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뒤쪽에 있던 기사 하나가 귀여움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나타니엘이 매섭게 노려보자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앓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 이마를 비벼 왔다.
‘그래. 입만 다물면 귀엽지.’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서 결계 끝에 닿았다.
품에서 꺼내 주자, 나타니엘은 바깥 모양이 흐릿하게 보이는 결계 벽에 손을 올렸다.
“오.”
나타니엘의 마법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인지라 다들 놀란 표정이다.
곧 성인 둘, 셋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통과시키고 나와 나타니엘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결계 밖으로 나오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긴장한 것 같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말이 없었다.
“후우, 다 왔습니다.”
순간 이동 장치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 아래의 동굴 안에 있었다.
몰래 숨어 급하게 만든 탓일까.
마도구라고 하기엔 엉성한 만듦새가 의심스러웠다.
“이거 사용 가능한 거지?”
“예……. 아마도요.”
미덥지 못한 생김새에 나는 나타니엘을 내려다보았다.
“저거 괜찮은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딘지 개운치 못한 느낌이었다.
나는 기사들이 마도구를 켜고 작동을 준비하는 동안 구석으로 들어가 다시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게 생겼어요. 게다가 우릴 찾는 것도 벅찼을 텐데 저런 마도구를 대체 언제 만들어서 설치를…….”
의심의 말을 입 밖으로 쏟아내자 머릿속에 이상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를 모시고 이리로 도망쳐.
상처가 여기저기 난 모습의 막시밀리안이었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고, 더 우울해 보였다.
그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라며, 이걸 이용하면 바로 공작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 테레사를 부탁해.
짧은 부탁과 함께 기억이 끊겼다.
‘이게, 뭐지?’
마치 내 기억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남겨 둔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이나? 무슨 일 있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작에 있던 장면이었던 걸까? 지금 고민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나는 재빨리 생각을 털어냈다.
별것 아니라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순간 이동 장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살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부분은 다 있는 것 같다. 작동만 한다면 문제없을 거야.”
“그건 다행이네요.”
웅웅 소리를 내며 장치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나타니엘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밝은 표정의 노기사는 우릴 향해 웃으며 말했다.
“두 분만 이걸 타고 가시면 됩니다.”
“우리만?”
“예. 두 분이 타고 가시면 저희는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성으로 이동할 겁니다.”
나와 나타니엘은 장치 위에 섰다.
장치의 평평한 바닥에서 기묘한 빛이 반짝거렸다.
순식간에 눈앞이 점멸하더니, 곧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높이 치솟은 성의 모습이 드디어 내가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 같아 안도감이 밀려 들어왔다.
* * *
킬리언을 돌려보낸 아나이스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마침내 황후가 되어 황궁에 입성했을 즈음이었다.
황제는 황후를 잘 찾지 않았다.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밀리아의 히스테릭은 점점 심해졌고, 마침내 그녀는 선을 넘는 결정을 내렸다.
- 이걸 폐하의 집무실에 가져다 놓으렴.
평범한 교양 책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절대 열어 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에도 그녀는 책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건…….
‘영상 녹화 장치였지.’
그 장치는 중간중간에 마석만 갈아 끼우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책의 정체를 알고 고민하던 아나이스는 어머니가 무서워 결국 집무실로 향했다.
어머니가 시킨 대로 선물과 책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작은 선물 상자를 올리고 책을 꽂을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들어올까 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드디어 책을 꽂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 여기서 뭐 하니, 아나이스?
묘하게 차가워 보이는 황제와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서 방금 그녀가 꽂아 둔 책으로 향했다.
아나이스는 그대로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이대로 쫓겨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어디서 뭘 하고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났다.
- 이런, 울지 말거라, 아나이스.
혼을 낼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만져 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다정한 손길에 아나이스는 엉엉 울며 사실대로 말했다.
처음에는 당황해하다가, 그 뒤에는 슬퍼 보이는 눈으로 아버지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그만 돌아가거라. 받은 선물은 잘 쓰도록 하마.
그리고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아나이스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기사들이 자기를 황궁 밖으로 끌어낼 거라는 걱정 탓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나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어머니는 그 영상으로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확인했다.
종종, 아버지가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기도 했다.
처음엔 얌전하게 황궁에서 지내던 황제가 잊혀졌던 타운 하우스를 사용하면서, 그 영상 장치의 존재도 잊혀졌다.
‘아마 어머니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
그러니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하다고 생각한 집무실에서 황제에게 그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역시 그걸 가져와야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킬리언은 위험하다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황제가 죽은 지 2주가 넘어간 만큼 현장을 지키는 기사들의 경계가 느슨해졌을 것이다.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그는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
도와달라는 아나이스의 부탁을 킬리언은 강경하게 거절했다.
위험하다며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숨이 막힐 듯한 황궁에서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제이나뿐이었다.
‘이제 내가 갚을 때가 되었어.’
아나이스는 결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