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용용이를 소개합니다 (106/145)


106화. 용용이를 소개합니다
2023.02.04.



 
남자는 자신의 일 처리 능력에 자신 있었다.

뛰어난 능력 덕에 업무에 실패한 자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할 지위까지 얻었으니.

살려 달라 매달리거나 죽고 싶지 않다고 도망치는 흑마법사들을 비웃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번에도 별일 없이 업무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너희 기사단은 의리도 없는 인간들이군.”

양팔이 뒤로 꺾인 채 기둥에 묶인 남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에 몸을 떨었다.

짙은 보랏빛 눈은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음울한 기색이 느껴졌다.

평범한 인간에게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다.”

막시밀리안은 무심한 얼굴로 디에스 기사단에서 파견한 청소부를 내려다보았다.

꿈에서 본 것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소가 수도의 공작저가 아니라, 북부의 공작성이라는 것뿐이다.

꿈속에서는 포로로 잡힌 단원을 제거하기 위해 이 남자가 공작저에 잠입했었다.


“글쎄, 그런 자신감은 접어 두지 그래.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생각보다 강건한 막시밀리안의 태도에 남자는 당황했다.

잠입하기 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성주에 대한 조사도 철저히 해 뒀다.

그가 알아본 바로는 윈터스 소공작은 깔끔한 일 처리로 정평이 나 있었다.

설령 적을 잡더라도 배후를 캐기 위해 지저분한 짓을 하진 않을 사람이라는 보고서도 받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라서.”

하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막시밀리안의 분위기는 보고 받은 것과 달랐다.

남자는 놀라서 입 안에 있는 독을 삼키려 했다.


“이것도 그때와 똑같군.”

이번에도 막시밀리안이 빨랐다. 그는 남자의 턱을 잡고 힘을 주었다.


“크윽.”

그리고 익숙하게 어금니 안쪽에 숨겨져 있던 독약을 꺼냈다.

자결을 시도하려는 남자를 막은 그는 사람을 불렀다.


“배후에 대해 철저히 캐내. 지난번의 마법사처럼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예, 소공작님.”

부하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 막시밀리안은 밖으로 나왔다.

청소부가 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지난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온몸이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올라가서 쉴까 하는 생각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시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공작님, 마틴 경이 찾았습니다.”

“그가? 곧 내려가지.”

아버지가 급하게 도망시킨 황태자의 보좌관은 황후의 사병을 뒤쫓고 있었다.

아버지가 제이나를 찾느라 추적대를 다 사용하고 있어서, 황후 쪽 사병의 흔적을 찾을 여력은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둬야지.’

윈터스 공작가가 가진 사병은 꽤 많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북에서 내려오는 마물을 막기 위해 전방에 배치된 탓에 평소에는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에서도 그 위험성을 인지한 탓에 공작가의 사병임에도 그 최종 통솔권자에는 황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황제 자리가 비어 있는 초유의 상황.


‘이쪽에서 황태자를 먼저 찾아 보호하면, 전방의 병사를 포함해 우리 사병을 움직일 명분을 찾을 수 있어.’

막시밀리안은 최후의 방법으로 항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숨겨진 방으로 향했다.

초췌한 얼굴의 마틴이 종이 더미 사이에 앉아 있었다.


“날 찾았다고.”

“예.”

자리에서 일어난 마틴은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뭘 좀 찾았나?”

“이걸 봐 주십시오.”

벽에 붙은 지도로 다가간 마틴은 핀으로 꽂아 둔 곳을 짚었다.


“소공작님의 도움으로 흑마법을 탐지한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 무리로 나뉜 핀들은 어찌 보면 무질서하게 흩어진 것처럼 보였다.


“배열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이렇게 보면.”

마틴은 두 가지 색 펜으로 가까이 붙어 있는 핀들끼리만 이었다.


“황후의 사병은 둘로 나눠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히에라로, 다른 하나는 수도 남부로 향하고 있군.”

황성이 있는 수도 북부 대신 남부로 기사단을 보내는 이유는 뻔했다.

거기엔 윈터스 공작저가 있었다.


“예. 아무래도 공작님을 인질로 잡아 저희 발을 묶고,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를 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제이나의 흔적을 찾았는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수상한 능력을 지닌 디에스 기사단이 황후에게 붙었을 것이다.

과거의 막시밀리안이었다면 이대로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아버지께 당장 수도를 탈출하시라고 연락하지.”

“히에라로 가는 병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쪽에는 소규모 기사단을 보낸다.”

이미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오고 있으니 이쪽도 방법이 없다.

소공작은 북부를 지키고 있는 기사단을 제외하고, 다른 기사단을 히에라로 보내기로 했다.


“반드시 제이나와 황태자 전하를 찾아야만 해.”

제발 먼저 찾을 수 있길 바라며.

* * *

나는 몸을 숨기는 반지를 손에 끼고 결계 밖으로 나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리의 도움을 받아 약초꾼 옷을 입고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혹시 들키더라도 아닌 척하기 위해 금발도 갈색으로 염색까지 해 두었다.

소리 죽여 정체 모를 자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공터로 향했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공터에 모여 앉아 있었다.


‘어디서 온 걸까.’

난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몸을 숙였다.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는 들렸다.


“대체 비 전하는 어디에 숨어 계시는 거야.”

“어렸을 때도 혼이 나시면 어찌나 잘 숨으셨는지 공작님께서 화를 많이 내셨지.”

투덜거리는 그들의 목소리엔 나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어렵지 않게 공작저를 지키던 기사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반지의 마법을 풀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갑자기 나타난 내 존재에 기사들이 놀라서 검을 뽑았다.

난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을 풀고 얼굴을 보여 주었다.


“아, 아가씨!”

어린 시절, 가까이서 날 돌봐주었던 노기사 하나가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소리를 지른 그는 재빨리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비 전하!”

어느새 기사들이 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사하셨군요.”

“공작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공작성으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공작성으로?”

“예, 가까운 곳에 소공작님이 순간 이동 장치를 설치해 두셨습니다. 거기까지만 가시면…….”

“수, 순간 이동 장치까지?”

순간 이동엔 막대한 양의 마석이 필요했다.

마석은 좋은 마도구였지만, 일회성이었기 때문에 단가가 너무 비싸서 순간 이동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전해 들은 수도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제아무리 황후라도 윈터스 공작가를 견제만 하고 함부로 찍어 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그분만 계시면 이렇게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을 텐데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당하신 건?”

“아, 아니야. 전하는 아주 건강하셔.”

몸은 아주 건강했다.

작고 하찮아져서 문제지.


‘공작성에 숨으려면 나타니엘의 본모습을 알려야 해.’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타인에게 용의 모습을 보여 주는 데 거리낌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


“그분은 워낙 독특하시잖아.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셔.”

“예…….”

이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오늘은 일단 헤어지고 내일 산 뒤쪽에서 만나 순간 이동 장치로 향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찾았다!”

“공작가의 기사다!”

순간, 저 멀리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분위기상 황후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사색이 되어 내 주변을 둘러쌌다.

황후 쪽에서 여길 찾다니.

나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숨을 참았다.

그때였다.


“뭐, 뭐야?”

“방금까지 저기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앞에 두고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나무 위에서 새끼 용 모습의 나타니엘이 의미심장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따라와.”

그는 손짓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다. 난 목소리를 낮추고 기사단을 이끌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결계 안으로 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불리해.’

아버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기사들을 보냈겠지만, 상대는 신경 쓰지 않고 많은 수의 병사를 보냈을 것이다.

조심조심 마을 근처까지 오자 마음이 놓였다.

높은 곳에서 모습을 숨긴 채 날아오는 나타니엘까지 확인한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신호를 주었다.


“비 전하, 뭐 하시는…….”

그 순간 나타니엘이 마을로 들어가는 결계를 열었다. 놀란 기사들에게 몸을 숙여 속삭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라는 여자를 찾아. 내가 들여보냈다고 하면 될 거야.”

“비 전하는요?”

나는 나타니엘이랑 같이 들어가야 했으니 일단 기사들을 들여보내야 했다.


“먼저 들어가.”

“하지만.”

“금방 따라갈 거야.”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결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가 나타니엘을 불렀다.

뽀르르 날아와서 품에 폭 안기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대체 여긴 왜 왔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으면서 왜 화를 내는 건데.”

“나타니엘이 위험할 뻔했으니까 그렇죠!”

“흥, 힘이 돌아왔으니까 나온 거지.”

어휴, 엉덩이를 때려 줄 수도 없고.

나는 그를 한번 째려봐 주고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까 이야기 들었죠? 당신만 있으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을 거래요.”

“응.”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은…….”

“그게 제일 어려운가 보네요.”

하긴 최근에야 할 줄 알게 된 거 보면, 그게 제일 어려운 마법일 수도 있다.


“그 모습으로 정체를 밝혀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숨겨 봤자지.”

오히려 사람일 때보다 새끼 용 모습을 다들 더 좋아하는 것 같다며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을로 돌아왔다.

모두에게 나타니엘을 소개해 줄 시간이 왔다.

* * *

기사들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작고 깜찍하지만 눈매가 험악한 소동물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아니지, 이분이, 아니 이 용이 황태자 전하라고요?”

“맞아.”

그들은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나타니엘을 보았다.

눈을 비비면서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확인까지 했다.


“본인 맞으니까 그만 의심해.”

나타니엘의 목소리에 담긴 위압감에 기사들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럼……. 궁에서 도망치신 이유가?”

“이런 모습인 데다가 그땐 마법도 사용하지 못했거든.”

내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살인범으로 몰아세울 생각이었는데, 상대가 운 좋게 마법도 못 쓰는 상태라면?

그냥 죽이고 끝내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럼 이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실 수는 없는 겁니까?”

“노력하고 있다.”

나타니엘의 말에 기사들은 살짝 실망한 기색이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모르는 척하며 내일 일정을 논의했다.

이제 나타니엘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결계의 반대편 끝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나가기로 했다.

거기서 조금만 가면 임시로 설치한 순간 이동 장치가 있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기사들을 마을에 있는 숙소로 돌려보내고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왜요?”

천하의 나타니엘이 이렇게 약한 모습이라니.

정말 영영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황성에는 오랫동안 지켜 온 불문율이 있지.”

“아…….”

황성에서는 함부로 피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제국을 유지해 온 그 긴 시간 동안 완벽하게 지켜졌을 리가 없다.


“내란도 몇 번 있었고, 시종들 간의 살인 사건도 있었잖아요. 그땐 멀쩡했는데…….”

“예전과 다른 건 하나야.”

나타니엘은 짧은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며 중얼거렸다.


“용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이 살해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