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스파이
(105/145)
105화.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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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스파이
2023.02.01.
킬리언은 제 말에 눈을 반짝이는 아나이스를 보고 아차 싶었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헨리를 보고 싶어서요.”
아나이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드디어 마음껏 음악을 할 수 있다며 기뻐하던 헨리였다.
분명 어머니의 기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드릴게요.”
아나이스가 헨리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는 카시안도 그녀를 두둔하고 앞에 나섰다.
결국, 킬리언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도와드리도록 하죠. 대신 무리한 일을 벌이면 안 됩니다.”
“네, 그럴게요.”
아나이스는 호언장담했지만, 킬리언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저돌적인 황태자비의 모습이 엿보인 탓이었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 * *
해가 지기 시작하자 성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늘.
어딘가에 숨어들기 안성맞춤인 시간대였다.
“다시 나오실 때 저에게 신호를 주시면 됩니다.”
“네.”
가벼운 복장의 아나이스는 헨리가 머무는 방 테라스 아래에 섰다.
숲속에 숨어 있던 킬리언이 마법으로 그녀의 몸을 띄워 주었다.
테라스에 내려선 아나이스는 커튼 사이로 방 안을 살짝 살펴보았다.
“헨리?”
작게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해가 남아 있다지만 이상할 정도로 내부가 어두운 것도 이상했다.
아나이스는 몇 번 창문을 두들기다가 조심스럽게 테라스 문을 열었다.
“헨리, 안에 있니?”
“누님?”
울었는지 잔뜩 잠긴 목소리에 아나이스는 가슴이 아팠다.
“응. 헨리 어디에 있니?”
“누님, 누님!”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헨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아나이스의 치마폭에 안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품에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무슨 일 있었니?”
놀란 아나이스가 헨리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리고 꼭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동생을 안아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왜 이렇게 어두운 데서 이러고 있어. 불 좀 켜도 될까?”
헨리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는 마도구를 조작해서 실내 불을 켰다.
침대에 몇 개 많지도 않던 인형들이 전부 사라졌다.
‘어머니가 다 치워버리셨구나.’
밀리아는 헨리가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을 싫어했다.
아직 아이인데도 인형이나 장난감을 갖고 노는 걸 보면 혼을 내기도 했다.
그나마 아버지나 나타니엘이 선물한 것은 남겨 두었는데 이번 기회에 전부 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 왜 이제야 오셨어요, 누님.”
코를 훌쩍이며 원망하는 헨리의 모습에 아나이스는 미안해졌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헨리만 편애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사랑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있어 헨리는 자신의 욕망을 대신 이뤄 줄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 헨리.”
“그래도 와 주셔서 다행이에요.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아이는 계속 코를 훌쩍이며 억지로 웃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던 헨리가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맞아요?”
“아…….”
아나이스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함께 지내지 않았고, 커서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헨리는 아니었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아버지의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기에 세 남매 중 그를 가장 많이 따르던 아이였다.
아나이스가 받은 충격과 헨리가 받은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정말 돌아가셨어.”
“형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어요.”
헨리의 말에 아나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그러셨을 리가 없지.”
“맞아요, 왜냐면…….”
헨리는 아나이스 눈치를 보다가 손짓으로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아나이스는 몸을 숙여 헨리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어머니에게서 피 냄새가 나요.”
아이가 한 말은 아나이스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이야기였다.
그들의 어머니가, 이 제국의 황후가 황제를 시해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예전에 형님이 마법을 알려 주면서 가르쳐 주셨거든요. 이런 냄새가 나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고요.”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아나이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손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듯, 헨리가 불안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어머니가 아버지를…….”
“쉿.”
아나이스는 헨리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발언이었다.
그녀는 헨리의 양어깨를 잡고 단단히 일렀다.
“지금 한 말, 누나한테 말고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어, 네…….”
“어머니가 물어보셔도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동생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물었다.
“요즘은 뭐 하고 지내? 우리 동생이랑 오랫동안 이야기를 못 해서 누나가 궁금하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 뒤로 헨리는 요즘 늘어난 공부량에 대해 투덜거렸다.
나타니엘과 제이나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고, 어머니가 무섭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가장 바라고 있을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헨리는 다시 음악을 하고 싶지 않니?”
결국, 아나이스가 먼저 물었다.
그녀의 말에 헨리는 가만히 아나이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누님. 이제 실망하는 건 지긋지긋한걸요.”
헨리는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더는 무언가를 꿈꾸고 기대하는 것에 지친 게 보였다.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아이인데.
“아니야, 헨리. 아직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낼게.”
아나이스의 말에 헨리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나이스는 헨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다른 아이였다면 가지 말라고 매달릴 수도 있었지만, 헨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 모습이 또 안타까워서 아나이스는 가슴이 아팠다.
“다음에 또 올게.”
그녀는 살짝 웃으며 헨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헨리의 양 볼을 붉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는 손을 흔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저 멀리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주변 바람이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 주었다.
잔디밭 위에 발이 닿자 킬리언이 달려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나이스는 다정한 그의 말에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놀란 킬리언이 아나이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헨리 황자 전하가 많이 안 좋은 건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가족의 밑바닥을 전부 보여 주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킬리언의 옷을 꼭 쥔 채 숨을 골랐다.
아나이스에게도 이 비밀을 남과 나누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새삼 헨리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알려 주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킬리언의 눈을 바라보며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그리고 전 그 증거를 찾을 방법을 알고 있어요.”
* * *
나타니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마을에 온 뒤로 그는 밤이 얼마나 긴지 생생히 느꼈다.
마석을 구하기 어려운 탓에 불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해야 해서 전에 없이 긴 시간을 수면에 사용했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평소 하루에 4~5시간 정도 잤던 때와 달리 요즘은 정신이 너무 맑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잘 자고 있는 제이나를 보았다.
자신에게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된다는 말을 한 뒤, 며칠이 지났다.
그 뒤로 제이나는 별말이 없었다.
어떤 강요도 없이 조용히 제 결심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황제 자리에 어울릴지도 몰라.’
나타니엘은 단 한 번도 제이나처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여태껏 황제가 된다는 건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황제가 된 뒤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제이나의 얼굴을 보던 나타니엘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아침이야.”
전혀 반응이 없었다.
황실에서는 어떻게 일찍 일어났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나타니엘은 힘을 주어 그녀의 등을 탁탁 쳤다.
“우웅.”
휙, 날아오는 그녀의 손을 이번엔 요령 좋게 피했다.
저 손에 날아가 본 지 벌써 몇 번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뺨을 쭈욱 잡아당겼다.
“오늘 일찍 깨워 달라고 하지 않았나.”
“으으…….”
겨우 잠에서 깨어난 제이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러고는 휙 이불 안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으, 으악!”
“10분만요.”
얼굴에 뺨을 비비며 다시 잠이 들려는 제이나를 보며 나타니엘은 어이가 없었다.
“오늘 아침 일찍 결계 밖을 살펴볼 거라고 했잖아.”
“아!”
드디어 오늘의 할 일을 떠올렸는지 제이나의 눈이 반짝 떠졌다.
요 며칠 결계 주변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을 주민들의 행동반경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제이나가 반지를 이용해 몸을 숨기고, 그들을 살피기로 했다.
순식간에 씻고 나온 제이나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모자 안에 숨겼다.
그리고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반지를 꼈다.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요.”
“무슨 소리야. 나도 갈 거야.”
나타니엘은 얼굴을 구기며 반박했다.
그의 반응에 제이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대를 뭘 믿고 혼자 보내.”
아주 솔직한 나타니엘의 반응에 제이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 일 처리가 얼마나 깔끔한데요.”
“그대도 인정하지 않았나? 무언가 하겠다고 나섰다가 엉망진창이 된 적이 많다고.”
“뭐예요?”
결국, 폭발한 제이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타니엘은 그녀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올라탔다.
“절대 혼자 못 보내니까 날 두고 갈 생각하지 마.”
제이나는 손으로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나타니엘을 떼어 냈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천으로 그를 나무 기둥에 묶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법을 사용 못 하는 용용이는 짐이라고요.”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짐이라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취급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짐이라고?”
“그래요. 도망치다가 무능력한 나타니엘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요.”
제이나는 일부러 한껏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
나타니엘의 동그란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그런 나타니엘의 표정을 보며 제이나는 살짝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일이 꼬인다면 적어도 둘 중 한 사람은 집에 남아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녀는 풀이 죽은 나타니엘의 머리를 톡톡 치며 속삭였다.
“그럼 갔다 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요.”
위로하듯 뺨에 입을 맞춰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제껏 희미했던 그의 의욕에 ‘무능력’이란 단어로 불을 붙였다는 사실을 모른 채.
* * *
제이나가 사라진 방 안.
나타니엘은 이를 갈며 마력을 되찾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능력하다고.”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콧대를 콱 밟아 줄 생각으로 활활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