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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 (104/145)


104화.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
2023.01.28.



 
폭탄 선언을 한 주제에 나타니엘은 평온하게 훈련을 계속했다.

점심때가 되자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나타니엘을 안고 언덕을 내려갔다.

마을에 도착하자 역시나 여기저기 나타니엘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훠이, 훠이! 다들 가서 일 안 해?”

다행히 이번엔 아군이 나타났다.

마리가 소리를 치며 사람들을 쫓아내 준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들을 모은 덕인지 마리가 마을의 실질적 촌장을 맡고 있었다.

기웃거리던 사람들을 퇴치하자 마리가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러지.”

그녀와 함께, 우리 부부가 머무르고 있는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 크지 않지만 나와 새끼 용이 된 나타니엘이 지내기엔 적당한 크기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타니엘은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나와 마리는 식탁에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좀 지저분하지?”

이곳에 와서 내가 한 일이라곤 새끼 용의 옷을 만든 것뿐이어서 안은 천과 실로 엉망이었다.


“에이,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마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여기저기 널려 있는 천 쪼가리를 주워 한곳에 모아 주었다.

간단한 청소를 끝낸 그녀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즘 결계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결계 근처에?”

“예. 어제 빌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레인저 몇이 주변을 뒤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으로 지켜지고 있으니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게……. 빌의 말로는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해서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 누구도 우리가 히에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별히 이쪽에 대단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과 몇 주 정도 휴가를 보낸 곳이니까.

게다가 이 숲은 히에라에서 꽤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였다.


‘어쩌면, 내 동선을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추적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황후의 사람이든가.


“일단 모두에게 마을이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전해 줘.”

“정말 그래도 될까요? 만일 윈터스 공작님이 보낸 사람들이면 어떻게 하죠?”

마리 역시 나와 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저주를 온전히 풀기 전까지는 이 마을의 존재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단단히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마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의 존재가 적어도 지금은 윈터스 공작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린 듯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우리가 꼭 저주를 푸는 법을 찾아낼게.”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원작 그대로의 전개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비 전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껏 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희는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는걸요.”

마리는 몇 번이고 신경 쓰지 말라 말하고는 가져온 감자를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문가에 서서 멀어지는 마리의 모습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는 갔나?”

“네, 잘 잤어요?”

“응…….”

나타니엘은 뽀르르 날아와 내 품에 꼭 안겼다.

이 모습이 되고 나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날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안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까 낮에 한 말 말이에요.”

“응.”

“역시 여기에 계속 숨어서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자 나타니엘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마치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궁둥이를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어 갔다.


“여기서 숨어서 지낸다고 해도 분명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하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겠죠.”

“어떤 아쉬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요.”

이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어느 누군가는 이들을 엑스트라라 무시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들 역시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걸 깨달았다.

작지만 치열하게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팍팍한 삶이 나와 나타니엘의 도움으로 조금 나아지기를 원했다.


“우리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는 몰라요. 어쩌면 헨리 황자와 황후가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당신과 내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겠죠.”

내 말에 나타니엘은 한참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렇게 대단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우물쭈물하며 대답한 나타니엘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다.

태어났을 때부터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진 그였다.

어쩌면 그에게도 황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럼 나타니엘도 생각해 봐요.”

“뭘?”

“정말로 황제가 되어서 이 나라를 멋지게 만들고 싶은 건지요.”

“난…….”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어요. 단! 제 의견하고는 상관없이 오직 나타니엘의 생각만 이야기해 줘야 해요.”

“만일 그대와 생각이 다르면 어떻게 하려고?”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땐 왜 그런지 서로 이야기해 보고 합의점을 찾아야죠.”

내 말에 나타니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제의 자리를 마다해도 상관없다니 그대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나타니엘도 저에게 그렇게 말했잖아요. 부부는 원래 닮는 거 아니겠어요?”

나 역시 웃으며 그를 꼭 안았다.

나타니엘은 모른다 했지만, 나는 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나라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


 

* * *

아나이스가 방에 갇혀 헨리도 킬리언도 만나지 못한 지 벌써 2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황후는 첫날 아나이스에게 다녀간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몇 주간의 감금 생활은 아나이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불안함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두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제이나와 나타니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지독한 패배 의식이 그녀를 갉아먹었다.

그때 시종이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황녀 전하. 벨리시아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카시안이? 안으로 들이거라.”

제이나를 통해 친하게 지낸 덕에 카시안과는 안면이 있었다.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데면데면한 관계도 아니니 그녀를 만나러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거지?’

덜컥 의심이 들었다.

황제를 시해한 죄로 황태자 부부가 쫓기고 있는 판에 황태자비의 시녀가 황성에 들어올 수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든 아나이스는 옆에 있는 도자기를 들고 문 옆에 섰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황……녀 전하?”

아나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들고 있던 도자기를 힘껏 휘둘렀다.


“꺄아악!”

카시안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재빨리 웅크렸다.

대신 뒤따라오던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그대로 맞았다.


“헉.”

안타깝게도 안면에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상대가 재빨리 팔로 막은 탓에 와장창 소리와 함께 도자기가 부서졌다.


“황녀 전하는 늘 상상 이상이시군요.”

남자가 로브를 벗자 긴 붉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등장에 아나이스는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킬리언 경!”

“잘 지내셨습니까?”

키가 작아 보이게 하기 위해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며 킬리언이 웃었다.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시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났다.


“겨우 황녀 전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 하하. 죄송해요. 카시안의 이름을 대고 누군가 절 노린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 지금 같은 시국에 당당히 절 찾아올 리가 없으니까요.”

아나이스는 멋쩍게 웃으며 카시안을 자리로 안내했다.

킬리언은 황녀의 방을 살폈다.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낮인데도 해가 잘 들지 않아 묘하게 어두웠다.

황녀가 지내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황후가 황자를 지독히도 편애한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킬리언이 느낄 정도로 분명한 태도였다.

그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여자가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킬리언은 남몰래, 그녀와 결혼하면 더 아껴 주고 사랑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킬리언의 다짐을 모르는 아나이스는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예요?”

“아, 킬리언 경의 마법으로 우리 모습을 바꿨거든요. 그리고 시종들에게 이름도 기억에 남지 않는 마법을 걸었는데……. 설마 황녀 전하께서 저희를 의심하실 줄이야.”

덕분에 소중한 목이 날아갈 뻔했다며 카시안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킬리언은 좀 다른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제 마법이 황녀 전하에게 통하지 않았군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킬리언의 말에 아나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건 마법은 단어 자체가 기억에 남지 않는 마법입니다. 설령 시종이 벨리시아 영애가 왔다고 말해도 황녀 전하는 그냥 누군가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고만 생각해야 하거든요.”

킬리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아나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손 좀 올려보시겠어요?”

“왜 그러세요?”

“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의 말에 아나이스는 제 손을 킬리언의 손 위에 올렸다. 곧 부드러운 기운이 손을 타고 서서히 올라왔다.

일전에 나타니엘이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흠.”

아나이스의 마력 회로를 살핀 킬리언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황족들과 친해진 덕에 헨리의 마력 회로를 한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것과 다른 독특한 패턴이 있었다.

나중에 황태자에게 묻자 그 패턴이 마석 없이 자연의 마력을 이용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나이스에게선 그냥 평범한 인간의 것만 느껴지는데…….’

마력 패턴은 대를 이어 물려받는 것으로, 친동생인 헨리와 이렇게 다를 리가 없었다.


‘어쩌면 황제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는 건…….’

오싹한 가정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킬리언은 내색하지 않았다.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을 아나이스에게 전해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황녀 전하에게 제 마법이 통하지 않은 이유가 있군요.”

그 대신 그녀의 장점을 알려 주기로 했다.


“전 마력이 없어서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그러셨어요…….”

“인간이라면 대부분 어느 정도 마력을 갖고 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황녀 전하는 그 마력이 아예 없습니다. 남들과 다른 건 장점이 될 수도 있답니다.”

아나이스는 그가 하는 말이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은 마력을 이용해 현실을 조작하는 것. 그 말은 황녀 전하는 그 어떤 마법에도 현혹되지 않고, 어떤 마도구도 전하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나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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