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시골살이가 체질
(10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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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시골살이가 체질
2023.01.25.
헨리는 어머니가 무서웠다.
어느 날 그녀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들어와 헨리의 양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 어미 말만 따르세요. 우리 헨리는 제국을 다스리게 될 거랍니다.”
“저, 저는 프리체 공국으로 유학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그를 다그쳤다.
“유학이라니, 곧 제국의 황제가 될 터인데 어딜 간단 말입니까?”
히죽 웃는 어머니의 모습은 동화책에서 나오는 마녀처럼 보였다.
헨리는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럴 때 말을 했다가는 더 호되게 혼이 날 것이 뻔했다.
“오늘부터 황제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황제는 나타니엘 형님이 되는 거라고……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용기를 쥐어짜 내 겨우 말대꾸를 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런 헨리를 보며 웃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네?”
“그리고 폐하를 죽인 사람은 나타니엘이고요.”
“혀, 형님이 아버지를…….”
“그러니 우리 헨리가 황제가 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어딜 가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말입니다.”
헨리는 단 한 번도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당당하게 지내지 않은 적도 없었다. 만일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그건 모두 황후의 탓이었다.
헨리는 밀리아에게 무시당했으며 그녀 앞에서는 당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헨리의 마음을 모른 채, 밀리아는 앞으로 그의 일정을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일단 선황 폐하의 장례를 주관해야 할 겁니다. 내일부터 대신전에 들어가 일주일간 몸을 정화해야 합니다.”
“일주일이나요?”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 뒤에 대관식을 열 겁니다.”
본래대로라면 장례식 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분일초가 아까운 황후가 반역자를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 군을 통솔해야 한다며 대관식을 앞당겼다.
“그러니 이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피아노도 그만두고, 방 안에 있는 인형도 다 버리세요.”
아이의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눈물이 고이더니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밀리아는 잠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약한 틈도 보여 주어서는 안 되었다.
“이제 이렇게 우는 것도 안 됩니다, 헨리. 그 누구의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약점도 보여서는 안 돼요.”
“어, 어머니. 저 정말…….”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밀리아의 차가운 눈빛에 헨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뒤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든, 누구의 앞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황제의 약점을 알게 된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걸 알아 두세요.”
겁에 질린 눈을 보며 밀리아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헨리를 지킬 수 없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방에서 얌전히 사제들을 기다리세요, 헨리.”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밀리아는 다음 회의에 늦을 것 같아 서둘렀다. 문을 여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헨리가 붙들었다.
“아, 아나이스 누님을 보고 싶어요.”
밀리아는 붙잡힌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아나이스는 곧 결혼해서 프리체 공국으로 떠날 사람입니다. 이제 헨리도 서서히 멀어질 준비를 해야죠. 당분간 만나지 마세요.”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헨리의 방에 황후궁의 하녀와 하인들이 밀려들어 왔다.
그들은 죽은 필립스가 선물한 피아노를 꺼내 가고, 침대에 놓여 있던 몇 개 안 되는 인형을 가져갔다.
헨리는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잊고 있었던 체념이라는 감정이 작고 여린 몸을 덮쳤다.
더는 빛나지 않는 파란 눈이 창밖을 향했다.
* * *
헨리의 방에서 나온 황후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와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침대에 앉았다.
“머리 아파…….”
황제가 죽고 난 뒤, 밀리아는 지속적으로 두통에 시달렸다.
마치 죄책감처럼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누구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밀리아는 놀라서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하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물게 화가 난 얼굴의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밀리아의 멱살을 잡았다.
“대체 왜 내 말을 듣지 않은 겁니까!”
“이, 이쪽도 사정이 있었어.”
기세에 눌린 황후가 어설픈 변명을 했다.
“사정이 무엇이든, 저와의 약속을 어기셨으니 도움을 얻기 어려울 겁니다.”
하리는 밀리아를 내동댕이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믿었던 그녀의 배신에 황후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나타니엘이 황제가 되었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저희 일이라고요. 지금껏 당신이 바란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도와주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어.”
하리의 기색이 사나웠다.
하지만 밀리아도 물러설 수 없었다.
후작가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아서일까.
원로원의 반응이 생각보다 호의적이지 않았다.
만일 귀족들이 윈터스 공작가와 야합이라도 한다면 그녀는 끝이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헨리가 황제가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던 건 자네지 않나?”
애걸하듯 매달리자 하리의 눈이 흔들렸다.
밀리아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헨리도 황제가 될 수 없어. 그 아이는 내가 곁에 있어야만 해.”
이처럼 탐욕스러운 자는 하리의 긴 삶 동안 처음 보았다.
“자네에게도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내 아들이 황제가 되지 못하면 나타니엘이 될 텐데, 그가 과연 그대들을 그냥 둘 거라고 생각하나?”
만일 황태자가 평범한 황족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는 지나치게 강했다.
게다가 흑마법의 흔적을 쫓을 수도 있으니 정말로 유서 깊은 기사단을 박살 낼 수도 있었다.
하리는 손을 뻗어 황후의 목을 쥐었다.
검은 마력이 황후의 목을 한 번 휘익 감았다.
“만일 또 쓸데없는 짓을 하면, 그때는 그 목이 몸에 붙어 있지 않을 거야.”
밀리아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인지 깨닫자 혐오감이 밀려왔다.
평소의 하리였다면, 이대로 이야기에서 삭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 궤도에 올리려면 이런 자도 도와야만 했다.
* * *
“으으…….”
눈이 너무 부시다.
일어나기 싫은 나는 몸을 돌려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젯밤, 바느질하다가 늦게 잠이 든 탓에 피곤했다.
“일어나라, 제이나.”
탁탁, 등을 치는 작은 짐승이 거슬렸다.
잠결에 손으로 휘젓자 무언가 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눈을 번쩍 뜨고 침대 밑을 내려다보자 작은 용이 차디찬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후다닥 내려와 그의 앞발 사이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헉, 괜찮아요?”
“괜찮겠어?”
대롱대롱 매달려서 꼬리나 흔드는 주제에 짜증을 내 봤자 그저 귀엽고 하찮을 뿐이다.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귀엽다고 하면 화를 내니까.
“배고프죠?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나는 방을 나와 나타니엘을 식탁 위에 올리고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제 끓여서 먹고 남은 스튜를 그릇 두 개에 나눠 담았다.
하나는 나타니엘 앞에 놓아 주고, 다른 하나를 들고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나타니엘은 짧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이제 좀 능숙해졌네.’
처음 수저를 직접 들었을 때는 이리저리 흘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막판에는 제 몸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아 화가 났는지 울기까지 했다.
‘그때도 귀여웠는데.’
여하튼 그때 이후로 밤낮으로 손을 쓰는 연습을 한 덕에 지금은 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설거지까지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도 나가 볼까요?”
“응.”
나타니엘은 짧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서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외투를 입고 작은 가죽 가방을 멘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용님!”
“좋은 아침입니다, 용님!”
“지난밤에는 편안하셨습니까?”
테레사의 성력 덕분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열렬한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정확히는 내 품에 안긴 나타니엘을 향한 것이었다.
‘정말 제국 사람들의 용을 향한 사랑은 엄청나네.’
반짝거리는 주민들의 눈빛에 못 이겨 나타니엘은 짧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날 향해 손을 흔들어 주셨어!”
“무슨 소리야, 나야!”
“나라고!”
별것도 아닌 거로 말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며 난 재빨리 숲으로 향했다.
가벼운 산책 겸, 나타니엘이 마력을 되찾는 훈련을 돕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저쪽.”
나타니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가벼운 비탈을 올라가자 평평한 바위가 여러 개 있는 공터가 나왔다.
나는 그를 제일 큰 바위에 내려 주고 다른 바위에 앉았다.
나타니엘은 몸을 푸르르 흔들더니 눈을 감고 수련에 들어갔다.
나는 반대편에 앉아 가방에서 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단순한 반복 노동을 하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언제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마을에 숨은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 갔다.
일단 살기 위해 궁에서 도망치긴 했지만, 도피 생활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우리 쪽이었다.
마치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힘들어.”
나타니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마력이 흩어졌고 우리는 이곳에 숨어서 지내야만 했다.
그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조금씩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물 마실래요?”
“응.”
나는 챙겨 온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서 뚜껑을 따 나타니엘에게 넘겼다.
작은 손으로 물통을 꼭 잡고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이 귀엽다.
나는 그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나타니엘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통을 탁 내려놓더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만지지 마.”
“왜요?”
귀여움을 받는 느낌이 싫은 거겠지만, 분명 자존심 상해서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나타니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나는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나타니엘을 보았다.
이대로 영영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아직 2주밖에 안 지났고.’
무서운 생각을 떨쳐 내려 고개를 저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전과 달리 부드럽고 청량했다.
이 추운 지방에도 봄이 가까워진 것이다.
‘다들 괜찮을까?’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나와 나타니엘의 생활은 오히려 편안해진 것 같았다.
감시하는 듯한 시선도 없었고, 행동을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평온한 삶이다.
‘행복해.’
지금까지 그 어떤 날보다 지금이 행복했다.
걱정하고 있을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결혼 생활이었다.
전생에서 꿈꾸던,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삶.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이대로 여기 주저앉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제이나?”
“아,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가까이 다가온 나타니엘이 빤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이런 내 마음을 들켰을까 봐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좀 달라 보여.”
“그런가요? 전 늘 비슷한 것 같은데.”
날개를 파닥거려 무릎에 올라온 나타니엘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으악!”
눈앞에 귀여운 얼굴이 가득 찼다.
뾰로통한 표정의 그가 짤막한 손으로 뺨을 꾸욱 눌렀다.
“자꾸 나한테 숨기려고 하지 말아라.”
“아.”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이지만, 그대도 뭔가를 숨기는 데 익숙한 건 아니야.”
“그거 우리 둘 다 욕하는 거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이 빙그레 웃으며 뺨을 놓아주었다.
양 뺨을 양손으로 문지르다가 나는 사실을 고백했다.
“황성의 화려한 삶보다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아서요.”
말해 놓고 나서도 그의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타니엘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대에게 황궁 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요?”
“히에라에서 지낼 때 모습과 황궁에 있을 때 모습이 묘하게 달랐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들어 내게 말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여기에서 지내도 나는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