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각자의 하루
(102/145)
102화. 각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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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각자의 하루
2023.01.21.
세실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로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하리의 시선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이 잘하는 거라고는 남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들고 있던 오래된 단검을 공중에 던졌다가 받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보기 그것도 잘 못 하는 것 같군.”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간절하게 애원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로만 협박하던 사람들과 달리 눈앞에 있는 여자는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막스의 마음을 돌려놓겠습니다, 다른 방법도 있으니…….”
“미안하지만 다음은 필요 없어.”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여자의 몸을 관통했다.
아름다웠던 여자의 몸이 단검을 중심으로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나마 제물로라도 쓸 수 있어 다행이야.”
하리는 숨이 끊어진 세실리아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흑마법은 많은 양의 피와 영혼이 필요했다.
게다가 요 몇 달간 흑마법을 사용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검에 보관해 둔 영혼의 힘이 많이 바닥났다.
“비상사태가 아니었다면 그냥 기억만 없애고 돌려보냈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어.”
고개를 숙여 짧게 조의를 표한 하리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던졌다.
“이번에도 실패야.”
“그녀에게 기대가 컸는데, 아쉽군요.”
말과 달리 나타난 남자는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리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가 꿈꾸던 세계는 완벽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트랙을 벗어난 말처럼 세계가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윈터스 소공작과 메니실 영애의 파혼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년 이상 빠른 파국, 거기에 황태자의 예상치 못한 결혼까지.
아주 작은 빗나감이었는데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갔다.
“이유가 뭘까. 대체 뭐가 바뀐 걸까.”
하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이 세실리아만 보아도 그랬다.
윈터스 소공작과 메니실 영애가 다시 약혼한 김에 이후 스토리의 중요 분기점인 여자를 구해야만 했다.
어째서인지 꿈에서 막시밀리안을 유혹했을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해서 다른 나라로 떠나 있었다.
그 대타로 다이애나라는 다른 여자를 세웠지만, 허무하게 잡혀 버렸고, 세실리아도 쓸모가 없어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 뭘 알고 있는 것처럼 다 방해하다니.”
그녀의 반걸음 뒤에 있던 남자가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혹시 다른 ‘꿈꾸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리……가.”
하리는 처음에는 부인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완벽하게, 그녀가 꾸는 꿈과 반대될 수는 없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한다는 건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
하리의 까만 눈이 남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남자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리 님.”
“이름은?”
“제이나 윈터스, 지금의 황태자비입니다.”
그의 말에 하리는 턱을 쓸었다.
본래 그녀의 꿈에서 제이나란 여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 갑자기 황태자와 결혼한 데다가 메니실 영애와 친해지기까지 했지.”
게다가 변장한 다이애나를 잡은 것도 그녀였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단 확인을 해야겠어. 지금 그들은…….”
순간, 하리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먼 곳에 있는 황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가 검을 썼어.”
“이런……. 설마 황태자입니까?”
“아니, 그 힘으로는 황태자에게 해를 끼치기엔 무리일 거야.”
“그럼……. 황제겠군요.”
하리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공작성에 잠입한 기사는 어떻게 되었지?”
“얼마 전에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쩌면 소공작에게 잡혔을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중 둘이나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의 힘은 신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이 둘이나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탑주에게 붙잡히고, 황태자에게 뜻밖의 반격을 당한 것이다.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상대가 흑마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는…… 단원을 잃어서는 안 돼.”
인원이 많지 않은 디에스 기사단으로서는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일단 공작성으로는 청소부를 보내. 우리는 황성으로 돌아간다.”
* * *
나타니엘과 제이나의 수배령은 제국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공작성에도 날아들었다.
막시밀리안은 참담한 소식에 이마를 짚었다.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 있습니다.”
데이먼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공작의 서신을 건넸다.
사실은 황후가 윈터스 공작가를 후작가로 강등시키고 영지를 빼앗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달랐다.
‘우리 아가씨가 뭘 잘못했다고!’
처음 제이나가 황태자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윈터스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망나니 공녀님이 황태자의 속을 긁지 않길.
기분파에 제멋대로 사는 그녀가 혹시라도 황태자의 비위를 거슬러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둘이 잘 맞은 것인지 결혼 생활은 평온하게 굴러갔다.
오히려 일부 귀족들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후처 제도에 대한 반발 덕분에 부부의 인기가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제 행복하게 사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벌어진 사건에 공작성은 초상집 분위기나 다를 바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왜 이렇게 일이 복잡해지는지.”
“공작님께서는 어찌하겠다고 하십니까?”
“본인이 알아서 찾아볼 테니 나에겐 신경 쓰지 말라 하시더군.”
공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혹 반역에라도 엮인다면, 수장인 그가 전부 업고 가기 위한 방법이리라.
하지만 기회를 얻은 황후가 윈터스가를 쉽게 놓아줄지 의문이었다.
“소공작님, 테레사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리 부인의 알림에 막시밀리안은 데이먼을 내보냈다.
그에게 제이나를 찾는 것 말고도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문을 열고 피곤한 얼굴의 테레사가 들어왔다.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얼굴색이 안 좋았다.
“이쪽으로 앉아.”
막시밀리안은 그녀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집사에게 간단한 다과를 부탁하고 돌아와 반대편에 앉았다.
“혹시, 비 전하께 연락이 왔어?”
“아직 연락이 없네. 미안…….”
“아니야,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테레사의 얼굴이 걱정으로 흐려졌다.
그녀가 아는 나타니엘은 그런 흉악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성도 그러했고, 무엇보다…….
‘귀찮게 도망치고 그럴 성격이 아닌데.’
오히려 지나치게 몰상식해서 제이나가 고생했는데, 이런 상식적인 행보를 보일 리가 없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왜 그렇게 생각해?”
“너무 상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잖아. 행동의 주체가 비 전하처럼 보여서.”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상대의 본질을 꽤 정확히 파악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애정하는 상대에게는 더욱 그랬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막시밀리안은 제이나가 갈 만한 곳을 떠올렸다.
만일 공작가의 힘을 빌릴 거면 벌써 연락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아직 연락이 없는 만큼, 자력으로 도망쳤다는 소리였다.
“제이나가 혼자 숨어 있을 만한 곳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제이나를 숨겨 줄 만한 친분을 가진 사람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제 동생이었지만, 그 모난 성격 탓에 친구라고는 테레사와 카시안 정도가 다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제이나의 시녀 역까지 했으니, 수도에 있는 그들의 가문도 감시 대상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같이 고민하던 테레사는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혹시, 히에라에 있는 게 아닐까?”
“히에라에?”
“그때 별장을 관리하는 하녀들이 부부가 매번 어딘가 놀러 가는 것 같다고 그랬거든.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았다는데, 왠지 둘만 아는 비밀 장소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서.”
“흐음…….”
황태자 부부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녀의 감이 틀릴 수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황태자 전하의 흔적을 쫓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제이나를 쫓는 편이 빠르겠군.”
사람은 움직이면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마석을 이용해 탐지하면 한두 달 전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필요한 건 두 가지였다.
실종자의 피와 마석이었다.
실종자의 피는 가족인 막시밀리안의 것으로 대체하면 되니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추적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마석이었다.
지나간 흔적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많은 양의 마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둘 다 막시밀리안에게 문제 되지 않았다.
“황실의 눈을 피해 조심히 움직여야겠어.”
막시밀리안은 테레사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녀가 안심하길 바라며.
그리고 제 여동생이 무사하길 바라며.
* * *
윈터스 공작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지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황후의 사병을 찾던 마틴을 숨기는 것이었다.
험악한 북쪽에서 사람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아무리 봐도 황제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나타니엘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를 살해하고 실종이라니.
마치 누가 짜고 친 것 같은 상황에 다들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나타니엘과 제이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대체 둘은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이야.”
이대로 도망만 다니다가는 그대로 황제 시해범으로 낙인찍힐 것이 틀림없었다.
어딘가에 잘 숨어 있는 건지 흔적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황후의 끊임없는 의심을 피하면서 사람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하다못해 대강 어느 지역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나을 텐데.’
제이나와 나타니엘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행방을 찾지 못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공작가에서 곱게 자란 제이나가 있으니 도성에서 금방 잡힐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둘의 흔적은 쉽게 찾지 못한 듯했다.
공작은 뒤늦게 단서를 얻었다. 놀랍게도 제이나로 보이는 여자가 그날 새벽 늙은 말을 타고 수도 밖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제 딸이지만 추진력은 정말 자랑하고도 남았다.
“공작님, 소공작이 보낸 전보입니다.”
혼자서 딸의 능력에 대해 뿌듯해하던 공작은 집사가 전달해 준 종이를 받았다.
공작성과 수도의 저택 사이에는 전보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마법 기계가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그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각자 모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보내 온 전보에는 휴가 때 제이나와 나타니엘이 히에라에서 꽤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치 이런 사태를 대비한 것 같았다.
“히에라라…….”
한참 고민하던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점점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일 것이다.
빠르게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공작가뿐만 아니라 공작가의 가신들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
“몸이 날랜 사람 몇을 풀어 히에라 근처 숲을 샅샅이 뒤지도록. 무언가 발견하면, 그게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게 보고하고.”
“예.”
집사는 몸을 숙여 인사를 한 뒤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윈터스 공작은 길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무사하게만 있어 다오, 제이나.”
역시 황실에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