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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도망치는 그들 (101/145)


101화. 도망치는 그들
2023.01.18.



 
반역과 황제의 죽음.

두 단어가 합쳐지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누군가 폐하를 암살한 거야.’

그리고 그 죄를 나타니엘이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열어라!”

기사단장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철컥거리며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타니엘을 품에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쾅, 소리와 함께 견고한 나무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기사들이 침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샅샅이 뒤져라!”

그들은 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집기를 부수고, 침실과 연결된 방문을 열고 뒤졌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찾기 위해 난리인 틈을 타 슬쩍 방을 빠져나왔다.

투명화 마법이 걸린 반지 덕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숨을 참고 조심조심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불안한 표정의 사용인들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를 살해했다고 하더라고요.”

“전하께서요? 그 정도로 욕심이 많은 분이 아니신데…….”

“그러니까요.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곧 황위에 올랐을 텐데 대체 왜 그런 짓을.”

모두 나타니엘의 반역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 상관없이 형국은 우리 쪽에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 뻔했다.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니엘이 황제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다.

게다가 나타니엘은 윈터스 공작가와 몇몇 귀족 가문을 제외하고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황후의 친정 가문이 약해졌다 해도, 지금 당장은 귀족들이 황후를 밀어줄 것이다.


‘몸을 숨기고 나타니엘이 원래대로 돌아오길 기다려야 해.’

잡히면 반대파가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나타니엘을 죽일지도 모른다.

평소와 달리 그는 작고 연약한 상태니까.

어쩌면 이대로 실종된 상태로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


“후우…….”

나는 이전에 나타니엘과 함께 놀러 갈 때 사용했던 샛길을 이용해 황궁을 빠져나왔다.

골목길의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긴 나는 반지를 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긴 나타니엘은 여전히 뜨끈뜨끈하게 열이 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황태자 개인의 범죄이니 윈터스 공작가나 다른 가문에 함부로 반역죄를 묻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황태자의 측근인 마틴이 공작가와 함께 일하고 있으니 친정에 연락하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나타니엘이 정신이 들 때까지 숨어 있을 곳이 필요해.’

다시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나타니엘을 보았다.

축 늘어진 채로 색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걸 보자 가슴이 아팠다.

자주 아픈 사람도 아닌데 왜 이런 걸까.

얼른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몸을 숨길 만한 곳.


‘마을…….’

빌과 마리가 있는 마을이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목적지를 정하자 난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수도에서 나가는 길을 막기 전에 서둘러 말을 구해 도망쳐야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공용 마차 정류소로 향했다.

* * *

아나이스는 하루아침에 바뀐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폐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폐태자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폐태자라니.”

시녀가 나타니엘을 지칭하는 말에 아나이스는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나타니엘은 황위를 걷어찼으면 찼지,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하더라도 몇 달만 기다리면 황제가 될 텐데 이런 위험한 짓을 하다니.


“오라버니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지? 황태자비는?”

“두 분 다 도망치셨습니다. 기사들이 추적하고 있으니 곧 잡힐 겁니다.”

아나이스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나타니엘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지 않는지 의심스러웠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어머니께서는 어디 계시지?”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원로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차기 황제 자리와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참석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이스의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설마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타니엘이 실각하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헨리였다.

그러나 헨리는 아직 어렸고, 무엇보다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 아이가 가장 바라는 것은 공국으로 가 자유롭게 사는 것일 터였다.


“어머니께서 나오시면 내가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 드리렴.”

아나이스의 말에 시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 폐하께서, 당분간 근신하고 계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근신? 내가?”

“예. 아무래도 폐태자 그리고 그 비와 친하게 지냈던 사이이니 공범의 여지가 있다고…….”

“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시면서!”

아나이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설마 했던 것이 점점 진짜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헨리는? 헨리를 보아야겠어.”

“죄송하지만, 헨리 황자님과의 만남도 금지되셨습니다.”

“말도 안 돼.”

어머니께서 자신마저 잘라 내려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뿐만 아니라 킬리언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시녀는 창백하게 질린 아나이스를 방에 두고 나가 버렸다.

아나이스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


‘방법이 있을 거야.’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착각한 걸 수도 있다.

오라버니와 제이나는 늘 엉뚱한 일을 벌이니, 우연의 일치로 밤마실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희망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나이스는 그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 * *



“아, 역시 너무 이상하게 싸다 했어.”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옛말 중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지쳐서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거리는 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털에 윤기도 좀 적어 보이고 퍼석해 보이는 게 나이 든 말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지칠 줄이야.

그 덕에 전속력으로 달리면 마을까지 하루면 도착할 거라는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그래도 네 덕에 수도에서 도망쳤으니 다행이야.”

여기까지 도망치는 데 도움을 준 녀석인데 괜히 미안한 마음에 등을 토닥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말이 고개를 흔들며 푸르릉, 소리를 내며 대답해 주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네.”

공용 마차 정류소 주변에서 말을 사고 그 근처 여행자 쉼터에서 야영에 필요한 물건을 모조리 사 왔다.

나는 여행 초보였고, 지켜 줄 사람도 없으니 모든 건 돈과 아이템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을 피우고, 주변에 짐승이 다가오지 않는 마법이 걸린 마석을 깔았다.

그리고 저녁을 준비했다.

작은 냄비에 수프 가루를 풀고 건조 고기 몇 개를 넣은 뒤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자 불에서 내려 냄비째로 떠먹었다.

간단식인 데다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게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수프를 해치웠다.

그리고 고생한 말에게 먹이와 물까지 주고 뒷정리를 끝냈다.

할 일을 마치고 나자 고요한 숲속에 홀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지난번 나타니엘과 함께 와 봤던 지름길로 가고 있는 덕에 마을도 거치지 않고 잘 도망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내일 중에 마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가장 큰 걱정은 역시 나타니엘이었다.


“대체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

여전히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건지 의식이 없는 나타니엘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튼튼하다며 자신할 땐 언제고.’

어서 눈을 떠야 화라도 내고 짜증이라도 낼 텐데.

자꾸만 시선이 나타니엘이 들어 있는 침낭으로 향했다.


“우응…….”

“나타니엘?”

그의 입에서 드디어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불가에서 벌떡 일어나 침낭으로 향했다.

살짝 들어 올리자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던 나타니엘의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신 좀 들어요?”

조심스럽게 손으로 그의 등을 톡톡 건드리자 커다란 눈이 깜빡거리며 반짝 빛났다.


“여긴, 어디지?”

“괜찮아요? 어디 이상한 데는 없고요?”

그냥 눈을 뜨고 말을 한 것뿐인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혼자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멀쩡히 말하고 움직이는 나타니엘을 보자 그동안 참고 있던 불안이 터졌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영문을 알 리가 없는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자기 정신을 못 차려서 큰일 난 줄 알았어요. 황제 폐하도 돌아가시고, 반역이라고 몰리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타니엘은 내게 설명을 요구하듯 물었다.

나는 안고 있던 그를 내려 주고 눈물을 닦아 내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네…….”

이제 막 부자 사이가 개선되나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나타니엘의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살갑지 않은 사이라도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으리라.


“하아……. 황후가 일을 저지른 거겠군.”

“제 생각도 그래요. 그걸 나타니엘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는 거고요.”

타이밍 좋게 나타니엘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도 큰 문제였다.

마치 하늘이 그녀를 도우려는 것처럼 모든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일을 함부로 저지를 사람은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나타니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황후는 절대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만일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면 황후의 계획은 그대로 뒤집혔을 텐데.”

“그게 이상해요. 이렇게 쉽게 틈을 보일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이 정도로 대범한 짓이라면,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디에스 기사단이 도와준 걸지도 모르죠.”

“그들이? 대체 왜?”

원작에서 나타니엘은 용이 되어 제국을 떠나고, 헨리가 황태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기사단의 패턴을 보면 원작의 내용을 완벽하게 따라가는 것은 포기한 듯 보였다.

대신 큰 줄기만은 비슷하게 흘러가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헨리가 황실을 잇고, 나타니엘이 제국을 떠나는 것이리라.


“그들은 이 세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것 같아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건 확실해요.”

“그 원하는 방향이 헨리가 황제가 되는 거라는 거군.”

나타니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내가 황제 자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게 묻는 말에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늘 자신만만했던 그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은 보기 안 좋았다.

나는 힘을 주어 나타니엘의 말에 반박했다.


“나타니엘은 잘 해낼 거예요. 황제 폐하가 여자 보는 눈은 없지만, 일 잘하는 사람 보는 눈은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내 박력에 밀려난 나타니엘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자리에 그가 맞건 안 맞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대로 도망치며 다닐 수는 없어요. 적어도 나타니엘이 폐하를 해쳤다는 억울한 누명은 벗어야죠.”

“그래, 그대 말이 맞아.”

언제까지 황후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타니엘을 보호하기 위해 황성을 빠져나왔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으니 다시 돌아가야 했다.


“자 그럼 어서 원래 모습으로……. 나타니엘?”

나타니엘은 조그마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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