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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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그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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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그의 마지막
2023.01.14.
신년제가 끝나고 마틴과 아버지는 황후가 갖고 있다는 사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살폈다.
하지만 소득은 크지 않았다.
종종 킬리언이 도와주었는데도 그랬다.
게다가 요즘 나타니엘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가 미리미리 업무를 익혀야 한다며 엄청난 양의 서류를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황위 계승을 준비하고, 밤에는 황후의 뒷조사를 하나 정신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있는 나타니엘을 흔들어 깨웠다.
“나타니엘, 일어나요.”
“우웅…….”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가고 잠에 가득 취한 빨간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는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몇 시지?”
“벌써 저녁때예요.”
“좀 더 잘래.”
“뭐라도 먹고 자요.”
아침에 돌아왔을 때 먹은 주스 외에는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었다.
나는 강경하게 나타니엘을 일으켰다.
“빨리요!”
결국 억지로 몸을 일으킨 그는 반쯤 졸며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빵을 뜯어 입에 넣어 주고, 수프를 떠서 먹여 주자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었다.
“이따 폐하를 만나야 해.”
“또요?”
“부르실 일이 있다는데……. 뭐 비밀리에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아암.”
길게 하품을 하며 나타니엘이 내 품에 폭 쓰러졌다.
“사병의 흔적은 좀 찾았어요?”
“찾긴 찾았다. 지금 마틴이 공작의 수하들과 추적 중일 거야.”
“그거 다행이네요.”
“응.”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등을 도닥여 주었다.
나타니엘은 기분이 좋은지 뺨을 어깨에 문질렀다.
“폐하께 가야 한다면서요.”
“응.”
결국, 한참을 미적거리던 나타니엘은 황제가 보낸 시종장이 오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 * *
나타니엘은 저녁 늦게 자신을 부르는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다.
특별히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자주 부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음 주 중에 있는 예산 회의에 네가 참석했으면 하는데.”
황제는 얼굴을 찡그리며 보고서를 유심히 보는 나타니엘을 살폈다.
얼마 전까지 해도 가족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거리감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감정이 풍부해지고, 말이 늘어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타인에서 그래도 내 아들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변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곧 제가 맡을 일이니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이 길게 하품을 했다.
보기 드물게 피곤함이 엿보였다.
“요즘 몸이 영 안 좋은가 보구나.”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자서 그렇습니다.”
나타니엘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한창때지. 이런 늦은 시간에 부른 내가 미안하구나.”
무언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타니엘은 귀찮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 돌아가거라. 황태자비가 기다리겠다.”
딱히 제이나가 잠도 안 자며 자신을 기다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이 지겨운 업무에서 탈출한다는 생각에 나타니엘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서재에 홀로 남은 황제는 서둘러 돌아가는 나타니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며칠 전, 황후와 싸우고 나서 한 번도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이제 가 봐야겠지.”
황후가 먼저 와서 잘못했다 읍소하면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그녀의 야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약한 헨리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나타니엘은 완벽한 황제감이었다.
“헨리는 한참 부족하지.”
“우리 헨리는 부족하지 않아요.”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황제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구냐!”
“폐하.”
“밀리아?”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밀리아의 모습에 황제는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언제 들어온 게요? 말도 없이.”
“폐하께서 예전에 제게 비밀 통로를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오래전, 전 황후가 살아 있는 시절의 이야기였다.
필립스는 황후 몰래 밀리아와 집무실에서 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 속상해하는 밀리아를 위해 비밀 통로로 내려가 황후의 방을 구경시켜 주고는 했다.
- 이게 언젠가 다 네 것이 될 것이다, 밀리아.
달콤한 사탕발림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밀리아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전부 제 것이 되었지만, 전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 오래된 길을 대체 왜…….”
필립스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날카로운 경고음이 귓속을 울렸다.
“잠깐. 거기 멈춰 서시오.”
황제는 더듬더듬 벽을 짚었다.
고대 용의 피를 옅게 이어받았지만, 어쨌거나 그도 용의 후예였다.
그가 가진 능력은 위험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아직 목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제가 폐하 말씀을 왜 들어야 하나요.”
황후는 천천히 필립스에게 다가갔다.
오래된 단검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필립스는 어쩐지 그것이 눈에 익었다.
“잠, 잠깐. 황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요!”
“폐하, 전 평생 폐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황후는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으며 필립스에게 다가갔다.
밀리아는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저 그런 귀족가의 자제로 소개했다.
둘은 엄격했던 밀리아의 아버지, 후작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며 사랑을 속삭였다.
“기억하시나요, 폐하? 전 당신이 황태자여서 사랑했던 게 아닙니다.”
그때의 밀리아는 순수했다.
그리고 그 순수했던 마음은 전대 황후에 의해 처참하게 뭉개졌다.
- 넌 필립스의 수많은 정부 중에 하나일 뿐이야.
처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필립스가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고, 마침내 밀리아의 정신이 무너질 즈음.
누군가 그녀에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전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모든 걸 걸었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뭐?”
“당신 아이라고 속일 정도로 절박했죠.”
필립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단 한 번도 아나이스가 제 자식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겠지.’
지금 그의 표정만큼은 밀리아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마지막까지 그를 속였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날 받아들이지 않았어!”
비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는데도 필립스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치 없어져야 할 존재인 것처럼, 목숨을 위협받으며 도망 다녀야만 했다.
“자, 잠깐. 밀리아,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황제는 혼란스러웠다.
밀리아의 말대로라면 아나이스는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친자 확인을 통과했다.
그리고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만일 전 황후가 죽은 뒤, 아나이스마저 없었다면 전 그대로 버려졌겠지요.”
황후는 음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왔다.
“화…… 황후! 잠, 잠깐.”
필립스는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당장 도망쳐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드래곤도 잠들 수 있게 한다는 향이에요. 아마 당신도 어쩔 수 없겠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창가의 유리창 너머 하얀 달빛이 꼭 꿈처럼 느껴졌다.
밀리아는 도망치기 위해 꿈틀거리는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꼭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당신도 그저 인간일 뿐.”
“미, 밀리아…….”
황후는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그의 피가 바닥에 번져 나갔다.
마치 기하학적인 그림을 그리듯 사방으로 퍼지더니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밀리아는 검을 버리고 비밀 통로를 통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방 안을 데우고 있는 벽난로에 옷가지를 집어 던지고 그것이 모두 타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증거가 재로 사그라들자 시녀장을 불러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이냐?”
“예, 황후 폐하.”
“오늘 분명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구나.”
그녀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카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밟으며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드디어 서재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조용히 서 있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폐하께 고하거라.”
“예, 황후 폐하.”
시종장은 문을 몇 번 두들겼다. 하지만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문을 열자 강렬한 혈향이 시종장의 코를 자극했다.
황후는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폐하!”
그리고 마치 잠이 든 듯 죽은 황제의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그의 몸을 흔들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의사를 불러오거라!”
밀리아는 재빨리 의사를 부르라 시키고 황제를 안아 올렸다.
품 안에 들어오는 시신이 비현실적으로 싸늘하게 느껴진다.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아아, 드디어.
밀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 삶을 지옥에 처박은 것은 전대 황후도, 황태자 나타니엘도 아니었다.
습자지보다 얄팍한 사랑에 눈먼 자신과 제멋대로 사람을 휘두르던 필립스였다.
“아, 아아아.”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차갑게 식은 필립스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제 삶을 농락한 자의 죽음에 대한 기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 * *
나타니엘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든 나는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뭐지?’
평소의 침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았는지 옆은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타니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젖혔다.
침대 위에는 오랜만에 새끼 용의 상태인 나타니엘이 쓰러져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를 안아 올려 살짝 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귀를 얼굴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 아주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타니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몇 번 느낀 적이 있었다. 불안감에 몇 번이고 나타니엘을 흔들었다.
창밖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커졌다.
나는 급하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빛?”
아직 새벽인데, 기사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황태자궁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반역자를 잡아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반역자라니?
나는 나타니엘을 품에 안고 드레스 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드레스 사이에 그를 내려놓고 보석함을 뒤졌다.
“찾았다.”
나는 사냥 대회 때 아버지가 빌려주셨던 반지를 끼었다. 그리고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작은 보자기에 나타니엘과 너무 비싸지 않은 보석 몇 개를 집어넣고 몸에 묶었다.
쾅쾅,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드레스 룸을 나온 나는 혹시나 들킬까 숨을 참았다. 그리고 문 바로 옆에 섰다.
“죄인, 나타니엘 시네스트라는 당장 나와라!”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막기 위해 입을 막았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황제를 시해한 죄인, 나타니엘 시네스트라는 나와서 죗값을 치러라!”
황제가 죽었다.
게다가 나타니엘이 그 범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