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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애증의 결말 (99/145)


99화. 애증의 결말
2023.01.11.



 
황후는 멍한 얼굴로 찻잔만 들고 있었다.

공왕도, 다른 제국의 황태자도 아니고 마탑주라고?

개인적으로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진 자라고 하나 사병 하나 없는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와 아나이스의 결혼이라니!


“밀리아, 우리 아나이스가 벌써 결혼할 상대를 데려오다니 대단하지 않소?”

“이미 결혼식장까지 갔다가 파혼도 했는데 이게 뭐가 대수라고요.”

황후의 싸늘한 말에 방 안이 얼어붙었다.

아나이스는 고개를 푹 숙였고, 황제 역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킬리언이 파혼을 알고 없던 일로 물릴까 걱정했다.


“황녀 전하께 아픈 기억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킬리언은 대범하게 아나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제이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킬리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마탑주께서 어찌나 황녀 전하를 쫓아다니던지 제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황후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런 밀리아를 모른 척하며 제이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폐하.”

“또? 오늘 이렇게 날 놀라게 했는데, 더 놀라게 할 일이 있다고?”

황제는 활짝 웃으며 제이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그렇게 대답한 제이나가 힐끗 황후의 얼굴을 보았다.

밀리아는 불길한 느낌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헨리 황자를 유학 보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유학이라니요, 헨리는 아직 어립니다!”

황후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하지만 필립스는 제이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유학이라. 킬리언 경이 추천서라도 써 줄 생각인가?”

황제는 은근히 둘째 아들이 마탑에 들어가 제국에 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제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헨리 전하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 보셨는지요?”

“헨리가 피아노를?”

“예. 제가 예술에 뛰어난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나 헨리 전하의 연주는 신이 내린 축복처럼 들렸습니다.”

“호오, 그래?”

황제는 눈을 반짝였다. 막내에 대한 칭찬이 기꺼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밀리아를 잘 알았다.

지금은 몸을 사리고 있지만, 그녀의 욕심으로 언제고 헨리를 앞세워 나타니엘의 황권을 위협할 날이 올 것이다.


“유학, 유학이라. 괜찮은 생각이군.”

“폐하! 저는 헨리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황후가 소리치자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이 킬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두 분 폐하의 첫 휴양지로 프리체 공국을 선택하시는 건 어떤지요? 아마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공국을?”

“예, 폐하.”

황후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사실은 넷이서 전부 짜고, 자신을 앞에 두고 장난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티 타임이 끝날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일을 더 빨리 진행시켜야 했다.

* * *

드디어 신년제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마차를 타고 대신전으로 향하며 요 며칠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일을 해냈다.

아나이스와 킬리언의 결혼은 올여름쯤으로 잡았다.

그리고 헨리 황자의 유학 준비도 시작했다.

요즘 황자는 새로운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느라 자주 놀러 오지도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황후의 반발이 생각보다 약했다. 마치 태연한 척하면서 뒤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야망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비 전하.”

마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대신전 뒤쪽으로 난 황족만 출입 가능한 입구였다.

안전을 위해 일부러 이쪽으로 들어갔다.

지난 수확제 때는 나타니엘과 함께 와서 굳이 사용하지 않았던 출입구였다.


“비 전하. 이쪽입니다.”

사제 하나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대신전 내부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확제보다 더 많이 참석한 것 같았다.


‘그때 보여 준 성력 때문인가.’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성력을 받으면 행운이 뒤따르고 몸이 건강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물론 진짜일 리는 없지만, 다들 구경에 진심인 건 확실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황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황후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나는 별말 없이 황제와 황후 뒷자리에 앉았다.

곧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니엘이 나왔다.

신년제는 일 년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제사로, 주관하는 사람의 풍요를 기원하는 노래가 백미였다.


‘응?’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들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었다.

설마 하는 순간 높고 청아한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렸다.


‘세상에…….’

나타니엘은 놀라울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다.

음이 이상한 것은 둘째 치고 박자마저 달라서 내가 알던 그 노래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예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노래였다.


‘이래서 다들 귀마개를 가져온 거구나!’

다들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니엘의 노래를 감상하는 척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드디어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형식적인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타니엘은 꽤 뿌듯한 얼굴로 제단을 내려왔다.

하얗게 질린 신관들이 나와서 마무리를 하고 끝이 났다.

잠시 후,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나타니엘이 내 앞에 나타났다.


“후, 드디어 끝났군.”

“잘하셨어요.”

나는 어색한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나타니엘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그가 황제가 되면 이 괴상한 노래를 듣는 일도 없겠지.

어쩌면 이게 내가 듣는 그의 마지막 노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만 돌아갈까요?”

“아, 하나만 더.”

나타니엘은 내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가 향한 곳은 윈터스 공작, 아버지의 앞이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버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맞이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기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간 잘 지냈나?”

“예, 전하. 그나저나 저에게 무슨 일이신지요.”

나타니엘은 주변을 살피다가 조용히 몸을 숙이고, 아버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공작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말이야.”

“부탁…… 말씀입니까?”

천하의 나타니엘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다니.

나도 아버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 없이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피력했다.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황위를 넘길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크흡!”

그의 폭탄선언에 아버지는 거세게 기침을 했다.

극비 사항이긴 했지만, 윈터스 공작가는 내 친정 가문이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주변을 한번 살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네. 내 보좌관을 보낼 테니 부탁 좀 할 수 있을까?”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한 나타니엘은 나를 데리고 빠르게 신전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오르자 나는 드디어 그간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조급해하는 이유가 있어요?”

“뭔가 찝찝해서.”

“예?”

“뭘 하나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그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아무 일도 없고, 우리가 가진 패도 많잖아요?”

이렇게 말하는데도 나타니엘의 미간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일단 아나이스 황녀 전하와 킬리언 경의 결혼이 곧 발표될 거예요.”

“그건……. 잘되었군.”

“그리고 헨리 황자 전하의 유학 준비도 시작됐어요.”

“유학?”

나타니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아나이스 황녀가 결혼해서 프리체 공국으로 가면 헨리 황자의 보호자 노릇을 해 줄 수 있잖아요.”

“아, 아아…….”

순간 나타니엘의 낯빛이 흐려졌다.

잠깐이지만 얼굴에 아쉬움이 일렁였다.


“아쉬워요?”

“어?”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는 거잖아요.”

나타니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감정이 깊어진 만큼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괜찮을 거예요.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요.”

“응.”

톡톡 등을 두들겨 주자 어깨 너머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 걱정을 희석시킬 수 있는 건 서로의 온기뿐인 것처럼.


 

* * *

필립스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나타니엘은 황제에 어울리는 태도를 갖추기 시작했고, 황태자비는 제 맘에 쏙 드는 의견만 내놓았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내 사위가 마탑주라니. 이거 정말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 말이야.”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필립스는 와인을 홀짝였다.

요즘 그는 밤이면 밀리아의 방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둘은 헨리를 낳고 난 뒤 서로 각방을 쓴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양위하겠다고 결심하니 새삼 황후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부인, 왜 이렇게 표정이 좋지 않소?”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필립스가 밀리아에게 물었다.


“어린 황자가 홀로 유학 가게 생겼는데 제가 즐거워하겠습니까?”

날카로운 밀리아의 목소리에 필립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헨리를 낳고 나서 밀리아를 자주 찾지 않았는지 떠올랐다.

헨리에 대한 황후의 집착은 그를 진절머리 나게 했다.


“그러면 첫 일 년은 우리도 공국에서 지내면 되지 않겠소? 헨리를 옆에 끼고 그 아이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필립스는 꿈처럼 반짝이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밀리아를 달래듯 말을 이어 갔다.


“얼마 전에 헨리가 직접 작곡한 곡을 들어 봤는데, 다들 극찬을 하더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천재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황자가 광대 노릇이나 했단 말입니까!”

밀리아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건 광대나 하는 짓이었다. 황자가 할 일은 아니다.


“부인!”

“제 아들은 황자입니다. 당신의 피를 타고난 적법한 이 제국의 계승자란 말입니다. 그런 귀한 아이를……!”

“아이가 가진 능력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건 몇 번 있었던 일 아니오? 그대도 나타니엘의 마법을 보여 주는 자리를 만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광대 노릇이라니.”

“그건, 폐하께서도 찬성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밀리아에게는 나타니엘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지만, 필립스에게는 타국 사람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 주는 쇼였다.


“이것도 내가 찬성해서 한 일이오.”

“하지만, 하지만……!”

과거에 벌였던 일들이 그녀의 얄팍한 변명을 무너뜨렸다.

기분이 상한 필립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황제는 끝까지 붙잡지 않는 밀리아에게 실망하며 휙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밀리아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긁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을 벌이기도 전에 모든 게 황태자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디에스 기사단의 하리가 마지막까지 참으며 기다리라고 했지만, 한계였다.

죽은 전 황후의 망령이 마지막까지 밀리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자신이 그 여자에게 ‘또’ 지고 말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짙은 그림자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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