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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과거의 역습 (98/145)


98화. 과거의 역습
2023.01.07.



 
막시밀리안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을 한참을 보았다.

세실리아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막스, 그동안 잘 지냈지?”

비굴한 미소였다.

창백해진 얼굴로 막시밀리안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에게 세실리아는 진정한 애증의 대상이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릴 만큼 증오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애정을 갈구했다.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


“막스, 혹시 이거…….”

마음에 드는 꽃을 발견한 테레사가 그에게 공작성에 가져가도 되는지 물으려 온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시밀리안과 대치 중인 세실리아를 발견했다.


“어머, 네가 테레사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테레사에게 다가가려는 세실리아를 막시밀리안이 막아섰다.


“돌아가십시오, 어머니.”

테레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막시밀리안의 어머니에 대해서라면, 그녀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 착한 제이나가 늘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네 부인이 될 사람인데 인사라도 한번 할 수 있게…….”

“그만 돌아가시라 했습니다.”

들끓는 증오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런 막시밀리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테레사는 조심스럽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자신을 돌아보는 막시밀리안의 시선이 살짝 누그러졌다.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될까?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둬. 나중에 따로라도 가져오면 될 테니까.”

“으응.”

테레사는 마치 세실리아가 없는 것처럼 구는 막시밀리안의 모습이 살짝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었던가?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불렀다.


“밖으로 모셔라.”

“자, 잠깐. 막스, 막스!”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세실리아를 보자 테레사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냉랭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는 막시밀리안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막스, 그……. 오랜만에 뵙는 건데 너무 심한 거 아닐까?”

그녀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테레사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것처럼 세실리아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동정심을 사는 것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처연한 울음소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몸은 눈물에 강력한 호소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건 이전의 막시밀리안에게나 먹히는 작전이었다.


“그렇게 걱정해 줄 필요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테레사, 미안하지만 이건 우리 가족 일이야.”

서늘한 말에 테레사는 몸을 움찔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와 테레사는 그저 표면적인 약혼 관계였고, 그러니 이런 일에는 입을 다무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 부근이 쓰렸다.

마치 그에게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시밀리안을 밀어낸 건 자신이었는데, 이상하게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레사!”

“어?”

테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손수건을 꺼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물을 닦으려다 주저하기를 반복했다.


“내 말이 너무 심했지? 미안. 그러려던 게 아니라.”

틀린 말이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릴까.

예전에는 이보다 더한 모진 말을 들어도 아프지 않았는데.

그녀는 막시밀리안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테레사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나타니엘은 신년제 준비를 위해 신전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가 없다고 내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킬리언과 마음이 통한 뒤 아나이스는 그와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황태자궁으로 찾아왔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기분이 어때요?”

“아직 그냥 얼떨떨하기만 해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나이스는 살짝 뺨을 붉혔다.

사랑에 흠뻑 빠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 전 들은 그녀의 비밀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킬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보다 황녀 전하는 괜찮겠어요?”

“뭐가요?”

“여행에 끌려다니다 보면, 킬리언 경과 만나기 힘들어질 것 아니에요.”

“네?”

방금까지 행복해 보이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얼마 전, 아나이스는 나타니엘에게 황위를 넘길 것이며,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닐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황제에게 직접 들었다.


“제가 폐하께 말해 볼까요?”

“어, 어떤 걸요?”

“킬리언 경과의 결혼이요.”

“결……혼이요?”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사람이 여기 있을 때 결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나이스의 얼굴이 더욱 흐려졌다.

나는 그녀에게 아직 말 못 할 고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헨리는 어떻게 하죠?”

어린 헨리가 황제와 황후와 함께 셋이서만 여행을 다니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럼, 헨리 황자님과 같이 공국으로 가는 건 어때요?”

“헨리랑요?”

“예, 황자님의 실력이라면 예술 학교에 충분히 합격 가능할 것 같아요.”

헨리는 프리체 공국에 예술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늘 유학을 꿈꾸었다.

비현실적인 일 같지만, 만일 아나이스가 가까이에서 돌봐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부모님은 또 부모님들끼리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는 게 나을 수도 있죠.”

“그게, 될까요?”

“일단 한번 이야기해 봐요, 우리. 제가 폐하께 킬리언 경까지 넷이서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 부탁드릴게요.”

아나이스의 얼굴이 기대감에 젖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미래를 기대해서인지, 이 지옥 같은 황궁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 * *

황후는 갑자기 잡힌 만찬 소식을 들으며 시녀장의 보고를 받았다.


“그래, 지난번에 시킨 일은 잘했겠지?”

“예, 폐하.”

시녀장은 찜찜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에게 고했다.

황궁은 신성한 장소였다.

태고에 존재했던 용의 축복을 받은 땅.

그 땅에서 피를 흘리면, 나라에 큰일이 생기곤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실제로 큰 화가 찾아온지라,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취급하기에는 꺼림직했다.

그래서 황제도, 귀족들도 이 땅에서 피를 보는 것을 꺼렸다.


“그래, 잘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헨리를 황태자로 만드는 일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데.’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다.

필립스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와의 관계에서 가진 아나이스를 황제의 아이라고 우겼다.

친자 감별을 하는 마법사들을 속이기 위해 의심스러운 비밀결사의 손도 잡았다.

그렇게 황후가 된 만큼, 막내 헨리의 존재는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더러운 짓을 한 끝에 낳은 진짜 용의 피를 가진 아이.

그런 헨리가 전 황후의 아들에게 밀린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후 폐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알겠네, 가도록 하지.”

대답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복도에 마음이 편해졌다.

젊은 시절, 전 황후에게 받았던 모욕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식당에 도착한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에게 말했다.


“폐하께 고하거라.”

“예, 황후 폐하.”

시종장이 문을 두들기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서며 황후에게 길을 터 주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제이나와 아나이스, 그리고 킬리언이 있었다.

가족 식사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황후는 인상을 살짝 썼다.


“어서 오시오, 황후. 자리에 앉도록 하지.”

필립스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싱글벙글했다.

황후는 언짢은 마음을 숨긴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폐하.”

꼴 보기 싫은 제이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황후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프리체 공국의 사절 앞인지라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식사 시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가벼운 농담이 왔다 갔다 하고, 황제의 노후 계획을 들은 킬리언이 여행지를 추천하는 한심한 대화가 길어졌다.


“참, 프리체 공국에 추천할 곳은 없나?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하하, 폐하께서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일국의 황제가 연고도 없는 공국에 어떻게 간단 말인가.

황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테이크를 써는 데 집중했다.


“어쩌면 그 소원을 조만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낭랑한 제이나의 목소리에도 황후는 식사를 계속하며, 잘린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 찍었다.


“그래? 우리 황태자비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황제는 제이나에 대한 신뢰가 컸다.

망나니나 다름없던 나타니엘을 변화시킨 사람이 그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식사가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 하하. 그래그래. 다 함께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하자.”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황후의 마음과 달리 모임은 점점 길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옮겨 차까지 나오자 궁금함을 못 참고 황제가 제이나에게 물었다.


“그래, 아까 말한 소원을 이루는 방법이 무엇이냐?”

제이나는 여느 때처럼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해 달라 간청드린 것은, 아나이스 황녀 전하의 혼사 문제 때문입니다.”

황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나이스를 결혼시킬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중이떠중이에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철저하게 헨리에게 이득이 될 만한 남자로 나이에 상관없이 고르려 했다.


“황태자비가 내가 할 일에까지 관심을 갖는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래, 그래. 굳이 아나이스의 문제에까지 신경 쓸 것 없다.”

필립스까지 나서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밀리아는 뿌듯해졌다.

마치 전대 황후를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킬리언이 성큼성큼 황제의 곁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아나이스 황녀 전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황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좋아해?


“뭐, 뭐라?”

황제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킬리언은 아나이스 황녀의 남편감으로는 상상도 못 한 상대였다.

필립스는 고개를 돌려 아나이스를 보았다.

언제나 창백했던 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게 사실이냐?”

“예, 아버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아나이스가 고백했다.

황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프리체 공국의 마탑주라면 공왕에 버금갈 만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의 석학이 모이는 마탑의 주인이기까지 하니 그와 혼사를 맺는다면 제국으로서는 꽤 큰 이득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병 하나 없다는 점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 하하하. 그것참 잘되었구나.”

황제는 큰 소리로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결혼해야지.”

황제는 킬리언의 어깨를 탁탁 치며 기뻐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킬리언 경.”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기뻐하며 아나이스와 킬리언의 행복을 빌었다.

단 한 사람, 황후를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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