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신년제 (97/145)


97화. 신년제
2023.01.04.


놀란 나와는 상관없이 나타니엘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이 사실은 아마 나만 알고 있을 거야. 아나이스의 출신에 대해서는 마탑에서 보증까지 받았으니까.”

황실이 제대로 된 친자 확인 절차도 없이 밖에서 낳은 아이를 쉽게 입적시킬 리가 없었다.

당연히 마탑의 도움을 받았고, 아나이스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고 황족이 된 것이다.

마법사들을 속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디에스 기사단이라면 황제 폐하의 친딸로 위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조차도 아나이스가 마법을 배울 수 없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진 몰랐으니까.”

나타니엘의 말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어째서 황후가 아나이스를 싫어하는지.

자신이 지은 죄가 눈앞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니 얼마나 눈에 거슬렸을까.


“오히려 잘되었어요. 귀족 가문이나 타국 왕실로 시집간다면,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서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상대적으로 신분제가 느슨한 공국으로 시집가는 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귀족도 아닌 마탑주이니 신분 문제에서도 훨씬 자유로웠다.


“그대는 킬리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복잡한 얼굴을 한 나타니엘이 물었다. 나는 지금껏 보아 온 아나이스와 킬리언을 떠올렸다.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웠던 아나이스는 헨리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 킬리언은…….


“킬리언 경은 좀 이상하긴 한데 좋은 사람은 맞는 것 같아요. 게다가 아나이스 황녀님이 좋아하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황녀님한텐 곧 황제가 될 오라버니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나는 그의 몸을 툭 치며 말했다.

나타니엘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나이스도, 헨리도 둘 다 내 동생이지.”

그리고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의 넓은 가슴에 톡 머리를 댔다. 등을 끌어안는 손이 크고 따뜻하다.


“내가 없는 동안 말썽 부리지 말고.”

“말썽은 누가 부렸는데요. 나타니엘이나 신전에서 얌전히 있으라고요.”

결혼 후 이렇게 멀리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서 눈가로, 뺨으로 내려오는 따뜻한 체온이 달콤했다.


“아, 아직 낮인데…….”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간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오늘 하루 정도는 놀아도 되겠지.”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뿐이에요.”

“기꺼이.”

나타니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어쩐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 * *

공작성에 있는 데이먼에게서 첩자를 잡아냈다는 소식을 들은 막시밀리안은 안도했다.


“다시 돌아가자고 해야겠지.”

그는 멍하니 히에라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제이나가 돌아간 이후,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언제나 테레사를 최우선으로 둔다고 믿었던 자신의 행동이 너무 일방적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테레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미움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종종 느껴지는 테레사의 냉랭한 시선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곁에 있어 기뻤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이 많았다.

막시밀리안은 자꾸만 테레사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한심해.”

그는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며칠 전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한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후우…….”

두통이 밀려왔다. 잔뜩 예민해진 데다가 신경 쓸 일까지 많아지면서 요즘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막시밀리안은 성에서 가져온 서류를 모두 처리하고 긴 소파에 드러누웠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녀들과 가벼운 산책을 하던 테레사도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성에서 편지가 왔다고?”

“예, 테레사 님.”

연락이 올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첩자를 잡았다는 소식일 것이다.

테레사는 들뜰 수밖에 없었다.

공작성의 온실을 꾸밀 생각으로 잔뜩 들떠 있다가 갑자기 히에라에 오게 되었으니, 실망이 컸다.

하고 싶은 일이 공작성에 있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고민하던 그녀는 막시밀리안에게 직접 말해 보기로 했다.


“소공작님은 어디에 계시니?”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그렇구나.”

그녀는 앞으로의 일정도 물어볼 겸, 막시밀리안을 보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들겼지만,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문을 두들겨 보던 테레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문을 열었다.


“아.”

스르륵 열린 문틈 사이로 삭막할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된 집무실 안이 보였다.

테레사는 다시 한번 막시밀리안을 불렀다.


“막스?”

한때 입에 붙었던 애칭으로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에 가려져 있던 소파에 가로로 길게 누워 잠이 든 막시밀리안이 있었다.

평온한 그의 얼굴은 꼭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 보였다.


“원래 이랬었나?”

테레사는 문득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나가 떠나고 나서 그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정확히는 접점이 없었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고, 막시밀리안은 늘 바빠 보였다.

그의 방은 늘 자정이 되어서야 불이 꺼졌고, 집무실은 새벽같이 불이 켜졌다.


‘잠은 잘 자고 있는 건가?’

전부터 막시밀리안이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 더 무리하는 게 느껴졌다.

워낙 예민했던 그였기에 이렇게 누가 들어와도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으응…….”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반듯했던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끙끙거리는 모습에 테레사는 당황했다.


“막스, 막스!”

몸을 흔들어 깨우는데도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테레사 안, 안 돼!”

눈을 번쩍 뜬 막시밀리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테레사를 발견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는 손을 뻗어 테레사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어서.”

그녀의 청량한 향기가 심신을 가라앉혔다.


 
부드러운 머릿결이나 따뜻한 체온은 현실감이 넘쳤다.


‘어?’

아니,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붉어진 테레사의 귓바퀴를 발견하고 후다닥 팔을 거두었다.


“미, 미안.”

꿈이 아니었다.

진짜 그녀를 앞에 두고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둘은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테레사였다.


“그, 어…… 언제 돌아가나 해서.”

“성에서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이니 다음 주 안에 돌아가지 않을까?”

“그렇구나.”

어쩐지 실망하는 기색에 막시밀리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온실을 빨리 보고 싶어서.”

“아아.”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 그 온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떠올렸다.

이렇게 간절해 보이는 테레사를 보니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테레사에게 물었다.


“이곳에도 화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된다면 내일 가 볼래?”

“화원?”

“응. 온천 지대에서 나오는 식물이나 꽃을 키우는 곳이라던데, 어쩌면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할지도 모르지.”

단숨에 밝아지는 테레사의 표정을 보며 막시밀리안은 안도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테레사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바쁘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갑자기 어두워진 테레사의 표정에 막시밀리안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게 부담스럽다면, 다른 사람을 붙여줄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테레사는 그제야 전보다 수척해진 막시밀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건장한 편이었던 몸은 조금 말라 있었고, 뺨도 핏기가 없었다.

잠이 줄어서인지 눈 밑도 어두워 보였다.


“무리하는 것 같아서.”

막시밀리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기쁨에 가득 차 부드럽게 휘어졌다.


“날 걱정해 주는 거야?”

“그야 우린 약혼한 사이니까.”

사실 테레사는 얼마 전까지 막시밀리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제 감정을 살피는 것도 힘들었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고마워.”

막시밀리안의 웃음이 진심처럼 보였다.

테레사는 그 웃음을 멍하니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막시밀리안에게만 영향을 받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듯이, 막시밀리안 역시 테레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둘 다 속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러요.

언젠가 제이나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새삼 눈앞에 있는 막시밀리안이 달라 보였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지 의심스러워졌다.


“오늘 푹 쉬고, 내일 같이 나가자.”

“어, 어.”

“일찍 자러 가지 않으면 내일 혼자 갈 거야.”

테레사의 강경한 말투에 막시밀리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그녀는 방을 빠져나왔다.

설령 그와 파혼하게 되더라도 둘 다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 * *

다음 날.

어제보다 훨씬 말끔한 얼굴의 막시밀리안이 테레사를 반겼다.


“오늘 시간 될까?”

“응.”

그녀의 허락에 내심 안심한 막시밀리안이 남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들은 마차에 올랐다.

수도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히에라에도 슬슬 봄기운이 찾아오고 있었다.

테레사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막시밀리안도 덩달아 기분이 나아졌다.


“도착했습니다, 소공작님.”

마부의 말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거대한 유리온실이 눈앞에 보였다. 제이나가 테레사의 취향일 것 같다며 추천해 준 장소였다.


“들어갈까?”

“응.”

그냥 보아도 테레사는 잔뜩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저런 표정은 처음이라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살았는지 깨달았다.


“막스!”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는 테레사의 모습은 전에 없이 반짝거렸다.

좋아하는 것과 함께하면 저렇게 빛이 나는구나.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따라 온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처음 보는 식물들이 가득했다.

둘은 소담하게 피어 있는 꽃과 향기로운 과일나무를 구경했다.

테레사는 온실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키울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


“이 식물은 물을 많이 주면 뿌리부터 쉽게 썩으니…….”

막시밀리안은 취미도 없고, 재밌지도 않은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열의가 넘치는 테레사를 구경하는 것이 다였다.

생기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지난밤의 악몽을 떨쳐 내기 위해 애를 썼다.


“아, 미안. 재미없었지?”

“아니야. 더 이야기해도 돼. 난 주변을 좀 구경하고 올게.”

중간에 상황을 눈치챈 테레사가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그녀를 말리고 멋대로 온실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테레사에게서 거리를 두고 멀리 빠져나온 그를 누군가가 붙들었다.


“막스.”

심장이 크게 튀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수풀 사이에서 핼쑥한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다.

막시밀리안은 상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머니.”

몇 년 만에 뱉어낸 단어는 아주 어색하기만 했다.

잊고 있던 악몽이 서서히 그가 딛고 서 있던 바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