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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폭풍 전야 (96/145)


96화. 폭풍 전야
2022.12.31.


새해를 여는 제사를 드리는 신년제.

이미 새해가 되고도 한참 지났지만, 황제는 행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가 휴가를 갔다 온 사이, 황후가 준비를 많이 해 준 덕에 내가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괜히 안 했다가 말이 나오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시기상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내 감상과는 상관없이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킬리언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재빨리 아나이스에게 소식을 알렸다.


“곧 킬리언 경이 돌아올 거래요.”

“언제요?”

“아마 신년제 직전일 것 같아요.”

“그렇구나…….”

아나이스는 생각에 잠긴 듯 잠깐 말이 없었다. 나는 살짝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자리를 좀 만들어 줄까요?”

“자, 자리요?”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늘 창백한 낯빛이었던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게 발갛게 익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 모르세요?”

다시 한번 용기를 북돋아 주자, 이번에는 황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나는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하며 열심히 아나이스를 놀려 댔다.


 

* * *

마틴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뜻하지 않은 초고속 승진으로 황태자의 최측근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 무서운데, 상사가 하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거라고요?”

“그래. 그대는 내 수석 보좌관이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예……. 축하드립니다, 전하.”

“준비해 둘 것이 많을 거야.”

“예.”

나타니엘은 마틴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제이나가 한번 써 보라고 강요해서 보좌관 자리에 앉힌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도 잘하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믿음직스러워졌다. 그래서 이런 비밀스러운 말까지 꺼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황후의 사병 문제다.”

“푸흡.”

마틴은 상상도 못 한 발언에 마시던 물을 뿜었다.


“사, 사병이요? 어떻게 그걸…….”

더러운 광경을 본 나타니엘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별말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천천히 찾아서 없앨까 했는데 일이 급하게 되어서 말이야.”

마틴은 황태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위치를 알려 주신다면 바로 증거를 찾아오겠습니다.”

“아, 증거를 찾아올 필요는 없어. 그들이 머물고 있는 정확한 장소만 찾아서 내게 알려 주면 돼.”

마틴은 나타니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된다면 가장 위협적인 대상은 지금 황후의 세력이었다.

증거를 찾아 정식으로 군대를 동원한다면, 이 건은 그들을 단숨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예? 하지만 그러면…….”

“내가 개인적으로 손볼 일이다.”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닫았다.

마틴은 어렴풋이 그가 황제를 위해 황후 문제를 적당히 뭉개고 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효심이 깊으시구나.’

보좌관들 사이에서 나타니엘은 폭군 지망생에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간형 마물이라고 불렸는데…….


“저만 믿어 주십시오.”

마틴은 가슴을 탕탕 치며 공언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듣고 난 뒤, 바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의 말에 의하면 분명 꽤 큰 병력일 텐데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흠…….”

마틴은 주변 숲과 마을을 모조리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그는 나타니엘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

마틴의 보고를 받은 나타니엘은 턱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예전 헨리에게서 들은 병력이 과장되어 있든지, 그것도 아니면 위치를 잘못 알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는 신년제의 시작 일주일 전, 제사를 주관할 신전에 가 있어야만 했다.


“일단 정보를 더 찾아보도록 해. 급한 일이 있다면 바로 내게 연락하고.”

“하지만 곧 신전으로 들어가시지 않습니까? 연락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그렇다면 황태자비에게 보고하도록. 그리고 조만간 마탑주가 돌아올 터이니 그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마탑주가 저희를 도와줄까요?”

“아마도.”

그가 아는 킬리언이라면 기꺼이 이런 일에 참여하고도 남았다.


‘묘하게 제이나처럼 오지랖이 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좀 더 편하게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나타니엘은 마물이 된 자들의 저주를 푸는 완벽한 해법을 찾기 위해 그와 몇 번 연락을 했다.

그때마다 질릴 정도로 자신에게 들이대는 모습이 좀 어이가 없기는 했다.


“아무튼 잘 부탁하지.”

나타니엘은 마틴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마틴은 감격에 젖어 양손을 꼭 맞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전하께서 날 믿고 계셔!’

절대 얻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신뢰에 양어깨가 무거워졌다.

마틴은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시키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 * *

이른 아침, 제대로 차려입은 난 킬리언을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나타니엘도 함께 나오는 게 맞았지만, 아나이스의 체면을 위해 그를 빼고 나만 맞이하기로 했다.


‘좀 삐진 것 같긴 하지만.’

제사를 주관할 나타니엘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이런 작은 일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킬리언은 내 개인적인 부탁으로 친정 가문의 안전을 위해 움직여 준 것이니 내가 나오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자기만 빼놓자 토라져서 뺨을 부풀리고 있던 나타니엘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가져다줘야겠다.’

그에게 간식으로 뭘 가져다줄지 고민하던 찰나,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황태자비 전하, 킬리언 경이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명이 떨어지자 킬리언은 예전과 같이 웃는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킬리언 경.”

“이렇게 저를 맞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비 전하.”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한 킬리언이 방 안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찾고 있는 사람이 뻔히 보여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흐, 흐음. 먼저 저희 가문의 일을 도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요.”

“하, 하하하. 천만의 말씀입니다. 윈터스 공작가의 마석 가공 공장을 구경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오라버니가 가문의 극비인 마석 공장을 구경시켜 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다른 곳에서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한 방법이긴 했지만.


‘으휴.’

그렇게 테레사가 걱정되었던 걸까.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잘해 주면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비 전하?”

“아, 미안합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네요.”

킬리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우리는 가볍게 차를 마셨다.

오전 시간이라는 걸 고려해서 훈제 연어와 크림치즈를 올린 요크셔 푸딩이 함께 올라왔다.

킬리언은 내게 공작성에서의 경험이나 테레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노닥거렸다.

워낙 말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귀가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차를 다 마실 즈음,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 혹시 아나이스 황녀 전하는 바쁘신지요?”

“어머, 헨리 황자님이 아니라요?”

둘이 자주 만나는 이유는 원래 헨리 황자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내 말뜻을 알아차린 킬리언은 평소의 뻔뻔한 모습은 버리고 순진하게 얼굴을 붉혔다.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황녀 전하는 황태자궁 후원에 있어요.”

“아…….”

“지금쯤 와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어서 가 보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킬리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꾸벅 내게 인사를 하고는 뛰다시피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소리를 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창가로 향했다.


“어머.”

허둥지둥 뛰어가는 킬리언의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후원 한쪽의 파고라 아래에 앉아 있던 아나이스가 킬리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내외하듯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오, 뭐 하는 거야! 빨리 고백해야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쳤다.


“뭐 해?”

“헉!”

갑자기 뒤에서 들린 나타니엘의 목소리에 나는 후다닥 창문을 가리고 섰다.


“뭐 하는 건데, 거기서?”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수 있을까.

모르는 척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뭐라 변명하기도 애매해졌다.

나는 재빨리 창문에 달린 커튼을 치고 그 앞에 섰다.


“아니, 그…… 그게.”

나타니엘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멈췄다. 빤히 날 내려다보는 모습에 나는 입을 꼭 닫았다.


“비키지 않을 건가?”

“예?”

붉은 눈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나는 아나이스와 킬리언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 것과, 나타니엘과 잘 지내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오늘 아침 킬리언과의 만남 때문에 한 번 다퉜기 때문에 금방 결정되었다.

나는 창문 옆으로 살짝 비켰다.

날 물끄러미 보던 나타니엘이 시선을 돌려 창 앞에 섰다. 그리고 촤악, 소리와 함께 내가 쳐 둔 커튼을 열었다.

갑자기 햇빛이 확 들어와 눈이 부셨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빛에 익숙해지자 창밖이 보였다.


‘오 세상에…….’

타이밍 참 완벽했다.

내가 나타니엘을 막는 사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지 아나이스와 킬리언이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살짝 나타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저게, 잠깐.”

충격을 받은 듯 그가 말을 더듬었다.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창문 밖을 한 번 보기를 반복했다.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죠?”

내 말에 나타니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더니 창문을 열어 버렸다.


“아, 안 돼요!”

나는 당장 뛰어내려서 두 사람에게 달려가려는 나타니엘의 허리를 재빨리 붙잡았다.

나타니엘은 그런 날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었군.”

“하, 하하하…….”

“대체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은 거지?”

“그야, 아나이스 황녀님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사생활?”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이런 게 사생활이라는 거지? 황족의 결혼은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대도 알 텐데.”

“그야 저희도 그렇게 결혼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킬리언 경이 결혼 상대로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대 말이 맞지.”

“그럼 된 거죠.”

그럼에도 나타니엘의 얼굴은 여전히 나빠 보였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킬리언 경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조건이 완벽하다는 것도 알잖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른 느낌이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타니엘은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새 손을 잡고 두 사람은 후원 깊은 쪽으로 사라졌다.

나타니엘은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어쩌면 이게 잘된 걸지도 모르지.”

“뭐,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어요?”

지금 나타니엘의 태도는 내가 생각한 팔불출 오빠의 모습도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 안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타니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나이스는 황제 폐하의 자식이 아니다.”

그가 상상도 못 한 폭탄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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