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미끼를 던지는 법 (95/145)


95화. 미끼를 던지는 법
2022.12.28.



 
황제의 덤덤한 말에 나타니엘은 미간을 구겼다.

그가 아는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권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먼저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서다니.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뭐, 왜 그러느냐?”

“약 기운이 몸에 남은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샅샅이 확인했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군요.”

“흠흠.”

머쓱해진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턱을 쓸었다.


“나도 이제 인생을 즐겨 볼까 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잘 즐기신 것 같습니다만.”

다이애나를 떠올리면서 대꾸하자 황제는 발끈하며 반박했다.


“아니, 그런 인생 말고!”

“그러시군요.”

“크흠……. 여튼, 황후와 아나이스, 헨리를 데리고 유람이나 떠날까 한다.”

“유람이요?”

뜻밖의 계획에 나타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여행이란 말인가.


“그래. 가족들끼리 사이도 돈독해지고 좋지 않겠느냐?”

“흠.”

나타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자신이 물려받을 자리였으니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제이나가 황후가 되는 건가…….’

이상하게 아직 잡히지 않은 비밀 결사단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물론 자신이 제이나를 지켜 줄 생각이지만, 아직 주변 상황이 완벽하지 않았다.

황후의 사병 문제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신년제가 끝나면 양위식을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달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한 달?”

“예.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 뭐……. 네 뜻이 그러하다면야.”

어차피 한 달이라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나타니엘은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보내 드린 다이애나는 어디에 넣어 두셨습니까?”

“아아!”

그래도 한때 마음을 주었던 여자인데 황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하 감옥에 있을 게다. 괜히 내 선에서 처리했다간 밀리아가 화를 낼 것 같아서 말이야.”

말 속에서 은근히 나타니엘이 처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였다.


‘역시 변하지 않는군.’

나타니엘은 알겠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여자가 매력적인 미끼가 되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홀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황후 폐하.”

냉랭한 얼굴을 한 밀리아가 다이애나를 밟은 채 감옥 안에 서 있었다.


“황태자가 여기는 어쩐 일인지.”

황후의 말에 나타니엘은 힐끗 다이애나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자신의 힘을 직접 보고 난 뒤 거의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폐하께서 밟고 계신 그 여자를 찾으러 왔습니다.”

“어머, 이런.”

밀리아는 우아하지만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제가 직접 처리하러 왔답니다.”

“…….”

나타니엘은 다이애나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이미 죽은 듯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나타니엘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순순히 물러서는 나타니엘을 지켜보던 밀리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시녀장을 보았다.


“잘하셨습니다, 폐하.”

평소와 달리 멍해 보이는 시녀장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는 입술을 물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을 죽여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죽음으로 디에스 기사단의 협력을 얻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정말 내 아이를 황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제가 말했듯이 본래 헨리 황자님이야말로 황제가 될 운명입니다.”

달콤한 유혹은 황후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저는 이 몸에 오래 있기 힘듭니다, 그러니 제가 부탁한 일을 끝까지 해내시길 바랍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녀장의 몸이 휘청거렸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이애나의 시체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폐하, 어서 이곳에서 나가시지요.”

“그 전에 사람을 불러 다이애나의 피를 가져오라 하거라.”

잔인한 명령에 시녀장은 몸을 움찔거렸다. 이 신성한 황궁에서 피를 보는 것도 불길한데 그 피를 모으라니…….


“어서.”

“예, 예!”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 *

나는 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나타니엘과 헨리, 아나이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타니엘이 헨리를 데리고 잠깐 산책을 나간 사이, 나와 아나이스는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별일 없으셨죠?”

“네. 저야 늘 비슷하죠. 비 전하, 휴가는 어떠셨어요?”

“아, 정말 재밌었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헨리 황자님과 놀러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게 많거든요.”

내 말에 아나이스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묻고 싶은 듯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킬리언 경은 언제 돌아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킬리언 경이요?”

설마 아나이스가 먼저 킬리언에 대해 물을 줄은 몰랐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나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양 뺨이 살짝 붉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킬리언 경이 보고 싶으신가 봐요?”

“예?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양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하는 아나이스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일단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신년제쯤에 돌아올 것 같아요.”

“아.”

아닌 척했지만 기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킬리언 경 정도면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겠지.’

제멋대로 파혼한 오라버니 탓에 망신을 제대로 당한 그녀였다. 그래서 제국 내에서 결혼하기가 쉽지 않았다.

외국 사람과 결혼을 하자니, 설령 신분은 맞아도 나이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아주 어리거나 나이 많은 사람밖에 남지 않았으니…….’

어쩌면 권력에 눈이 먼 황후가 외세를 빌리기 위해 나이 많은 황제의 후처로 보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서로 호감이 있어 보이는 아나이스와 킬리언을 빨리 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킬리언 경은 좋은 사람이죠.”

“그런……가요.”

“그럼요.”

성격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쁜 마음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주 높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마탑주라는 독특한 자리는 황제의 욕심을 충분히 채워 주고도 남으리라.


“혹 그가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폐하께 살짝 말해 볼까요?”

“하지만, 킬리언 경이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는데.”

흐음.

아직 서로 제대로 이야기도 안 해 봤나 보네.

귀여운 아나이스의 모습에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킬리언 경이 이번에 돌아오면 직접 물어봐요.”

“제, 제가요?”

“그럼요.”

“하지만, 전 여자고……. 그런 걸 물어보면 좀 그렇지 않나요?”

“뭐 어때요. 안 맞으면 빨리 정리해야죠.”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가는 일이 이상하게 꼬일지도 몰랐다.

이런 조언을 킬리언에게 해 줄 수는 없으니, 아나이스라도 부추겨 두어야 했다.


“제가 장담하건대, 킬리언 경이 거절할 일은 절대 없어요.”

나는 아나이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모르세요?”

내 말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이 붉어진 채로.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은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헨리와 아나이스가 돌아가고 침대에 누운 우리는, 이제는 익숙해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아까 아버지가 부르셔서 나한테 황제 자리를 넘겨주고 싶다고 하시더군.”

“폐하께서요?”

원작에서도 넘겨주지 않았던 황위를 갑자기 왜?


“그때 납치당하고 나서 인생에 환멸을 느끼셨나,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고 하시네.”

“오……. 그런 생각을 다 하셨군요.”

환멸을 느끼기에는 인생을 너무 즐긴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결심은 좋은 것 같았다.


“언제쯤 넘길 거라고 하시던가요?”

“신년제가 끝나고 한 달 뒤.”

“그렇게나 빨리요?”

“응.”

황제가 나타니엘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하였으니, 분명 황후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수도 가까이에서 사병까지 키우고 있지 않은가.


“그럼 당장 황후 폐하의 가문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함부로 건드릴 사안도 아니고……. 일단 마틴을 시켜 알아보라 했는데 쉽지 않군.”

“다른 견제 방법이 필요하겠네요.”

“뭐, 내가 가서 전부 제압하는 편이 빠르겠지. 사병이 없는데 반역을 일으킬 수는 없을 테니까.”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고요?”

“은퇴 후를 너무 기대하시더군.”

“아…….”

비록 지나치게 태도가 가볍긴 했지만, 황제는 밀리아를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타니엘의 힘으로 남몰래 사병을 쓸어버린다면, 황후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생각하셨군요.”

“응.”

나는 살짝 웃으며 그의 뺨을 쓸었다.

나타니엘은 내 이마에 입술을 살짝 부딪치며 속삭였다.


“그때, 나에게 아이 이야기를 했을 때.”

“윽.”

부끄러운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타니엘은 잠시 소리 죽여 웃다가 말을 이어 갔다.


“나도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어. 그리고 아버지가 떠오르더군. 비록, 다른 여자와 노느라 바쁘셨겠지만 적어도 날 그대로 받아 주신 분이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나타니엘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다고요.”

“가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몇 가지 있었을 뿐이죠. 하지만 지고의 자리에 앉으신 분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해요.”

나타니엘은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만일 내가 그렇게 변한다면…….”

“나타니엘은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갑자기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어 부담감을 느끼는 걸까? 나타니엘은 오늘 유독 약해 보였다.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달콤한 향이 가득 들어왔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나타니엘은 폐하와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옆에 계속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가 변하지 않게,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내가 옆에 있어 줄 것이다.


“잘 모를 때는 같이 고민도 하고요.”

그에게 어려움이 닥친다면 함께 고민해 주고 해결해 줄 수도 있다.


“누가 나타니엘을 괴롭히면, 저랑 제 아버지가 혼내 줄게요.”

귀족들이 그의 입지를 흔들려고 한다면 공작가를 이용해서라도 그를 지지해 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아내잖아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살짝 일렁거렸다.

달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요요히 빛나는 그 눈은 곧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타니엘은 이미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가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사랑해, 제이나.”

짧은 말 속에 가득한, 뜨거운 감정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보드라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저도 사랑해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