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돌아가는 길 (94/145)


94화. 돌아가는 길
2022.12.24.



 
제이나는 나타니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예?”

저를 밀어내려는 제이나를 나타니엘은 꼭 끌어안았다.

유치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제이나가 한 번쯤은 이 결혼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타니엘은 제이나의 품에 안긴 채 숨을 참았다.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비슷한 질문을 저도 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결혼한 직후 그녀와 축제에 놀러 갔을 때 들은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이야기했었는지 나타니엘이 기억을 더듬었다.

제이나는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상냥한 목소리, 부드러운 숨결, 따뜻한 체향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드라운 입술이 살짝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그의 뺨에 다시 닿았다.


“아.”

몸 안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욕망은 순식간에 거대하게 타올랐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스파크가 튀듯 몸이 저렸다.

나타니엘은 급하게 제이나를 침대 쪽으로 밀었다.

침대 위로 쓰러진 그녀의 뺨이 붉었다.

제이나의 손도 급하게 나타니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타니엘…….”

그를 부르는 음성에 열기가 일렁거렸다. 나타니엘은 그런 제이나에게 뛰어들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파도가 그에게 밀려왔다.

때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찔하기도 하고, 시간이 멈추길 바랄 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나타니엘은 그녀를 만난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늘 무미건조했던 그의 세계가 향기를 갖고, 색을 띠고,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해졌다.

다시는 그녀가 없던 때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제이나가 보여 준 세계가 너무나 찬란했기에.

* * *

황궁으로 돌아가는 날, 막시밀리안과 테레사가 우리를 배웅 나왔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또 보죠?”

아쉬워하는 테레사를 보자 꼭 가족과 헤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곧 다시 볼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에 황궁으로 돌아가면, 테레사의 목숨을 노리는 디에스 기사단을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다.

아쉬움에 테레사와 몇 번이고 인사를 나눈 다음, 나는 나타니엘을 찾았다.

그러자 한쪽에서 막시밀리안과 대화를 나누던 그가 돌아왔다.


“저도 오라버니와 인사하고 올게요.”

나는 멀리서 내 눈치를 살피는 막시밀리안에게 다가갔다.


“조, 조심해서 가.”

조금 풀 죽은 채 내게 인사하는 모습이 안 돼 보이기도 했다.

그냥 내버려 둘까 했지만, 역시 한 번쯤 제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테레사 언니를 정말 사랑한다면 좀 더 솔직하게 대해 줘요.”

내 말에 막시밀리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지금 두 사람 상황이 예전이랑 완전히 다른 거 알죠?”

“그래서 더 조심하고 있어.”

여전히 기죽어 있는 걸 보니 이제 답답하기까지 했다. 테레사를 상처 줄 때는 당당하더니 지금은 왜 저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상처를 받는 건 오라버니라서 그런 게 아니고요?”

“어?”

“조심한다면서 주변만 빙빙 돌지 말란 말이에요.”

뭔가 찔리는 표정이다.

그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왜 저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눈치 보면서 상대방이 먼저 해 주길 바라지 말고 오라버니가 나서서 진짜 제대로 하란 말이에요.”

“내, 내가 뭘…….”

“뭐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됐는지 물어보고 대안을 제시해 줘야 할 것 아니에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지만, 테레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테레사 언니가 무슨 톡 건드리면 깨질 유리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오라버니랑 파혼했겠죠!”

그새 자존감을 바닥에 처박았나 미적미적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다시 잘해 보고 싶다면, 자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직접 보여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어영부영 굴다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나 버리기 전에 최선을 다하라고요. 테레사 언니가 정말로 오라버니가 싫었다면, 그냥 저한테 지켜 달라고 부탁했겠지 오라버니에게 갔겠어요?”

사실 몰래 테레사에게 내가 지켜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테레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역시 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 고마워.”

머뭇머뭇 고맙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얄미워 보였다.


“그렇다고 너무 밀어붙이진 말고요.”

“응.”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뒤로 돌아 나타니엘에게로 향했다.

이제 진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나타니엘의 반대로 지름길 대신 돌아서 가는 것을 택했다.

그 탓에 지난번보다 며칠 정도 더 걸렸다.

마차가 수도에 들어서자 저 멀리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타니엘의 표정은 영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돌아가서 다시 그 사람들을 마주하려니 골치가 아프군.”

“전, 나타니엘이 그런 생각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타인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라 스트레스는 전혀 받지 않을 줄 알았다.


“이렇게 길게 쉬어 본 적이 처음이라 그런 걸지도.”

“흐음.”

이게 바로 휴가 후유증인가?

처음 겪어 보는 거라니 뭔가 의욕을 줄 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내년에 또 놀러 가요.”

“내년에?”

“네. 1년에 한 번쯤은 휴가를 가는 거죠. 이번에는 북쪽이 아니라 따뜻한 남쪽으로 가는 건 어때요?”

“남쪽이라.”

물론 어머니가 있는 크라비는 무조건 제외였다. 다음 휴가에서도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바다에도 가 보고, 열대 과일도 먹고,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기만 하다가 오는 거죠. 사실 이번 휴가는 반쯤 일한 거나 다름없잖아요.”

물론 쉬는 날도 많았지만, 마물로 변한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정비하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그들의 모습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도 찾아냈다.


‘생각해 보니 내내 일만 한 것 같기도.’

더 놀지 못해 아쉬워졌다.

다음에는 꼭 제대로 놀자고 다짐하며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니 다시 열심히 일해 봐요.”

시선을 맞추자 나타니엘이 배시시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 * *

황태자궁에 들어서자 그래도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짐을 풀고 쉬고 있는데, 황제가 나타니엘을 찾았다.

나타니엘은 오자마자 일 시킬 셈이라 투덜거리며 나갔다.


“정말 이제야 사람 같아졌어.”

새삼스레 그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느껴졌다.

어리광도 부리고, 토라지거나 질투를 하기도 했다.

불안해하는 것도, 무언가 좋아하는 일이 생긴 것도 신기했다.

감정이 다양해지면서 단순하던 그의 사고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때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 전하, 아나이스 황녀 전하와 헨리 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라 해요.”

그간 못 본 두 사람의 방문이 반갑기만 했다.


“비 전하!”

헨리가 활짝 웃으며 도도도 달려와 치마폭에 폭 안겼다.

나는 그의 복슬복슬한 금발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네!”

그가 힘차게 대답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를 찾으시나요?”

“네……. 형님이랑 킬리언 경은 어디 갔어요?”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셨답니다. 그리고 킬리언 경은 아직 오지 않았고요.”

“힝…….”

잔뜩 실망한 기색에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나는 헨리를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전하, 저는 안 보고 싶었나요?”

장난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내저었다.


“비 전하도 엄청, 엄청 보고 싶었어요!”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곱슬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녀에게 기념품을 가져오라 시켰다.


“자, 이건 제가 가져온 선물이에요.”

작은 상자는 아나이스에게, 큰 상자는 헨리에게 건넸다.

제 것도 있는 걸 안 아나이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 이런 거 안 받아도 되는걸요.”

“받아 둬요. 제가 아니라 나타니엘이 산 거니까.”

물론 같이 고르긴 했지만.

아나이스는 기뻐하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푸른색 마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디자인 자체는 단순해 보였지만, 마석이 고급품이었고 특히 히에라 지방 특유의 장식이 있어 이국적이고 고아한 느낌이 풍겼다.


“나타니엘이 무슨 마법을 걸어 놨다는데, 그건 아마 본인에게 물어봐야 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잘 간직할게요.”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아나이스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솟았다.

이런 반지는 황녀에겐 별로 대단한 선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좋아하다니…….


‘대체 황후는 왜 이렇게 딸을 차별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황제가 밀리아를 황후 자리에 앉힌 것은 그저 과거에 갖고 있던 알량한 사랑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여자 중 유일하게 아이를 가졌다는 점도 그녀가 황후가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황후로 만들어 준 딸을 저렇게 박대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와, 와아!”

옆에서 선물 상자를 뜯은 헨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의 손에는 작은 강아지만 한 크기의 검은 새끼 용 인형이 들려 있었다.


“황자 전하. 어떻게, 마음에 드나요?”

“네, 네! 제가 아는 용님하고 아주 똑같이 생겼어요!”

“어머, 그래요?”

사실 길을 가다가 나타니엘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내가 산 것이었다.

좋은 비단으로 만든 인형은 황자가 갖기에는 좀 소박하긴 했다.

그래도 새끼 용이었을 때의 나타니엘 모습을 고대로 빼다 박았기에 꼭 선물해 주고 싶었다.


“헨리, 비 전하께 인사드려야지.”

아나이스의 다정한 말에 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폭 숙였다.


“감사합니다, 비 전하!”

“소중히 다뤄 주세요.”

“네!”

귀엽고 똘망똘망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 * *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부름에 천천히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부르는 것이 아무리 봐도 급한 일인 것 같았지만…….


‘어쩐지 꺼림직하군.’

황제가 이렇게 급하게 저를 부를 일은 몇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겨우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이 나타니엘의 도착을 고했다.


“폐하, 황태자 전하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거라.”

황제의 명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나타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활짝 웃으며 저를 맞이하는 황제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살짝 멈칫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곧 감정을 지우고 황제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래, 휴가는 즐거웠나?”

“예, 뭐. 즐거웠습니다.”

실제로도 그랬기에 나타니엘은 사실대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아들의 표정을 금방 읽어 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려 있고, 눈은 예전과 달리 부드러워 보였다.

분명 여행을 가서 제이나와 더 돈독한 사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즐거웠다니 다행이로구나.”

황제는 그런 나타니엘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가족들과 함께 천천히 전국을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니 벌써 웃음이 나왔다.


“내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이리 급하게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네게 황위를 물려줄까 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