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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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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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2022.12.21.
황제는 울컥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긴 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내가 후원하던 아이를 정부로 들였으니 문제가 컸다.
밀리아의 명예에 먹칠을 하다 못해 바닥에 패대기친 수준이었다.
필립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간 하지 못한 말을 뱉어냈다.
“내 부인께 사과하려 불렀소.”
“사과……요?”
뜻밖의 단어에 밀리아가 움찔, 반응했다.
필립스와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여자 문제로 사과한 적이 없었다.
“그래. 내가 미색에 눈이 멀어 그대의 자존심까지 상하게 했구려.”
“…….”
“부인?”
필립스는 뜻밖에 반응이 없는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사과하면 바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많이 달랐다.
“아, 제게 사과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대에게 많이 미안해서 그렇지.”
황제는 테이블을 지나 황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을 토닥였다.
이런 밀접한 접촉은 오랜만이라 밀리아는 어쩔 줄 몰랐다.
“앞으로 황후에게 더욱 신경 쓰도록 하지. 그리고 헨리에게도 말이야.”
이토록 달콤한 말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밀리아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뺨을 붉혔다.
“그래서 내가 큰 결심을 했네.”
필립스는 잔뜩 뜸을 들였다.
밀리아는 사과의 선물로 무언가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타니엘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그대와 아나이스, 헨리와 함께 남부로 내려갈까 하는데 어떤가?”
상상도 못 한 선언에 밀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필립스의 얼굴을 봤다.
누가 누구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그러니 준비를 해 줬으면 해. 내 그간 부인과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으니…….”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필립스의 얼굴이 가물거린다.
“황후?”
“아, 아닙니다.”
밀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수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 이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최대한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그동안 그대를 고생시켜서 미안하오.”
“전 폐하만 믿고 기다렸는걸요.”
필립스의 마음에 드는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황후는 황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양위를 늦출 방법을 찾았다.
“아, 그리고……. 나타니엘이 다이애나를 잡아 이쪽으로 보낼 것이오.”
“그렇군요.”
“반역을 저지른 자이나 원한다면 황후에게 신병을 넘기도록 하지.”
황후는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그 여자를 자신에게 넘겨서 어쩌자는 것인지.
“폐하. 국무청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황제는 밀리아를 돌려보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예, 폐하.”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헨리를 후계자 자리에 올려야만 했다.
“방법이, 방법이 필요해.”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 그녀가 가진 패는 많지 않았다.
근처에서 몰래 군사를 키우고 있었지만, 친정의 힘이 약해지면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윈터스 공작가에서 마석 공급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으니…….’
한때 밀어주던 사람들마저 소극적이 되자 친정 가문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단숨에 쓸어 버렸다.
“황후 폐하!”
요란한 소리에 놀란 시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카펫 위에 깨진 꽃병과 메모지, 잉크병 따위가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급하게 황후를 뒤로 잡아당겼다.
“어디 다치신 데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눈이 하얗게 뒤집힌 시녀장이 황후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마치 악마가 씐 것 같은 모습에 밀리아는 몸을 떨었다.
“뭐, 뭐 하는……!”
“원하는 것이 있다 들었습니다, 폐하.”
그녀의 목에서 나오는 건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누, 누구냐!”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황후 폐하. 디에스 기사단의 단장, 하리라고 합니다.”
뜻밖의 인물이 그녀를 찾아왔다.
* * *
며칠간 나타니엘이 고생한 덕에 테레사의 성력을 이용해 마물들을 인간으로 돌리는 방법을 안정화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성력을 섭취하면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거다. 마법을 완전히 해제하려면 황성에서 더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군.”
그가 이것저것 마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내게는 꽤 어렵기만 했다.
“음, 좀 어려워요.”
“…….”
솔직한 반응에 나타니엘은 입을 닫았다.
그러더니 약간 풀이 죽은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어려울 수 있지.”
괜히 미안한 마음에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타니엘은 마법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싫어하지는 않는다. 연구하는 것도 좋아하고, 응용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흐음, 그럼 저보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요?”
그가 아무리 재밌게 이야기해 준다 한들 나에게는 그저 어려운 수업일 뿐이었다.
“잘 아는 사람?”
“네, 킬리언 경 같은 사람이요!”
나타니엘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친구까지 사귈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그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응.”
이렇게 고민할 일인가? 순간 표정이 밝아진 나타니엘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가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테레사의 성력을 가득 담은 커다란 마석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마을로 향했다. 숨겨진 장치를 건드리자 결계에 틈이 생겼다.
“이번에는 이런 게 생겼네요?”
“내가 없으면 사람들이 직접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어느새 자기가 떠난 후의 준비까지 한 나타니엘의 모습이 어색하고 신기했다.
“들어가지.”
“네.”
우리는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 앞에 섰다.
소식을 들은 것인지 마물로 변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맞춰 우물 근처를 맴돌았다.
아공간에서 마석을 꺼낸 나타니엘은 마석을 작동시키고 우물에 던졌다.
풍덩, 한참을 떨어져 내린 돌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물을 꾸준히 마시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후 24시간 내에 물을 마시지 않으면 다시 마물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나타니엘의 말에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반신반의하던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
- 줄을 서세요.
우리 일을 도와주러 나온 마리와 빌이 줄을 세워 한 명씩 우물물을 나눠 주었다.
“아, 아아!”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둘, 흉측한 마물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만져 보기도 하고, 제 몸을 만지기도 하면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걸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마침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무언가 말을 해 줘야 할 타이밍인데 나타니엘은 귀찮다는 듯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감사할 필요는 없다. 황태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살짝 미소를 띠었다.
* * *
주의 사항까지 모두 알려 준 우리는 마을에서 나왔다.
“방법은 어느 정도 찾았으니, 이제 다들 완전히 마물 모습으로 변해 버리진 않겠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단 노력해 봐야지.”
말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무심해도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즐거운가 보네.’
요 며칠 나타니엘은 이런 상태였다.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해 보이던 그가 이렇게 의욕적일 줄은 몰랐다.
히에라로 돌아오자 어느새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별장으로 바로 들어갈까?”
나타니엘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지만, 내일이면 황성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좀 더 놀고 싶었다.
“기왕 나왔으니 밖에서 조금만 놀다가 가요.”
“이제 축제도 끝났는데 뭘 하고 논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늘 이벤트가 있는 곳에서 놀았지, 평범한 데이트는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얼마 전, 하녀들에게 들었던 숨은 맛집들을 떠올렸다.
몇몇은 나타니엘이 아주 좋아할 만한 곳이기도 했다.
“흠.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히에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강렬한 붉은색 간판을 달고 있는 레스토랑은 히에라 전통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우리는 살짝 변형한 음식들만 먹어 봤잖아요. 제대로 된 것도 먹어 봐야죠.”
“응.”
나는 돼지고기로 만든 메인 요리 하나와 가볍게 먹을 전채 요리 하나를 시켰다.
거기에 주방장이 추천하는 수제 맥주까지 함께 마셨다.
꽤 맛있는지 나타니엘의 표정이 내내 좋았다.
“괜찮죠? 하녀들이 하나같이 추천해 주더라고요.”
“생각보다 맛있군.”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산책도 했다.
요 몇 주간 열심히 놀러 다녀서 그런지, 종종 알은척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가벼운 인사도 하고 짧은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히에라 사람들은 인심도 좋고 넉살도 좋아서 이야기하기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마치 히에라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던 중, 나타니엘이 물었다.
“여행의 마지막인데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나?”
“무슨 뜻이에요?”
“마틴 말로는 여행은 화려하게 마무리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언제부터 마틴에게 조언을 얻고 다닌 거지?
일머리만 있고, 눈치 없는 그가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주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참기로 했다.
“화려하고 비싼 건 전부 황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그야, 그렇지…….”
어쩐지 나타니엘이 시무룩해진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흠, 전 이런 평범한 것도 마음에 드는걸요. 나타니엘과 함께라면 평범하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나타니엘은 놀란 듯 날 빤히 보았다.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 나타니엘은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었다.
* * *
제이나가 온천을 즐기는 사이, 나타니엘은 방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별장이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덕분에 히에라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그는 오늘 함께했던 제이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공녀로 태어난 만큼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소소하고 평범한 걸 더 좋아해.’
표정도 황궁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좀 더 생기 있고, 건강해 보였다.
처음에는 휴가를 와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황실 생활이 맞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한참을 반짝거리는 야경을 보던 나타니엘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 구경해요?”
막 씻은 제이나가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신기해서.”
“뭐가요, 야경이요?”
“황성에서 지낼 때는 보지 못한 광경이니까.”
나타니엘은 수도보다 훨씬 따스한 색으로 빛나는 히에라를 보았다.
그가 머무는 황태자궁은 높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이런 야경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결혼식 올리고 봤었잖아요.”
“아, 그때…….”
나타니엘은 작게 웃으며 제이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잠깐 놀란 듯 움찔하더니 곧 손을 뻗어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왜 그러세요?”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한 적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