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성력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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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성력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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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성력이 필요한 이유
2022.12.17.
“아, 그.”
“왜?”
너무 덤덤하게 고백하는 통에 어떤 반응을 해 줘야 할지 몰라 한발 늦어 버렸다.
막상 내게 당당하게 집착을 요구한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나타니엘.”
“응?”
“제게 소중한 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어?”
난데없는 고백에 나타니엘은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마치 방금 전 나처럼.
어둠 속에서도 그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잡아 내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나타니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보드라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가 떨어졌다.
“하.”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린 나타니엘이 내 뒷머리를 꾹 눌렀다.
“으음.”
달콤한 숨결이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혹시라도 나타니엘을 놓칠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배가 살짝 출렁거렸지만, 한번 불이 붙자 쉽게 꺼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뒤로 밀리다가 그대로 배 위로 쓰러졌다.
“으악!”
이번에는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나타니엘이 마법으로 배를 고정시켜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말 많이 왔군.”
나타니엘은 배를 타고 풍등을 날리는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과 강 위에서 빛나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평화로워 보여요.”
나타니엘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테레사와 산책할 요량으로 나갈 준비하던 나를 나타니엘이 불렀다.
“잠깐 메니실 영애와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테레사하고요? 왜요?”
내 물음에 나타니엘은 피곤한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다이애나에게서 받아 온 약과 빌의 혈액을 비교, 분석 좀 했지.”
설마 놀러 와서도 일을 할 줄이야.
뜻밖의 성실함에 놀랄 틈도 없이 나타니엘이 그들이 걸린 마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생각보다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직접 마법을 시전하는 게 아니라 이런 물약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마법을 거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다이애나의 묘약은 테레사의 성력으로 깰 수 있었다.
그러니 빌과 마리의 가족도 테레사의 도움으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가서 이야기해요. 테레사라면 분명 도와줄 거예요.”
내가 아는 테레사는 도와주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입도 무거우니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 이야기를 들은 테레사는 아무 질문 없이, 예전처럼 마석에 성력을 넣어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나와 나타니엘은 놀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마을로 향했다.
“아, 마리가 사람을 더 찾아서 인구가 좀 늘었다. 놀라지 말도록.”
“그렇게나 많다고요?”
“그간 그 기사단이 암암리에 얼마나 많은 마법을 사용하며 국사에 개입했을지 알 수가 없군.”
나타니엘의 걱정과 달리, 내 생각엔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원작대로 세상을 조율하려 했다면, 내가 이 세계에 개입한 다음부터 마법 사용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가 이제야 발견된 걸지도 모르지.’
나와 나타니엘은 결계의 틈 사이로 들어갔다.
마을은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니, 정확히는 마물로 북적였다.
나타니엘과는 몇 번 마주쳤기 때문인지 딱히 숨지도 않고 멀뚱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그 며칠 사이에 마을도 꽤 커져 있었다.
나는 나타니엘의 손에 이끌려 마리와 빌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안에선 표정이 훨씬 밝아진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 잘 지냈어요?”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위험한 업무였는데도 어디 하나 다친 곳이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빠르게 성력을 테스트하고 싶다고 알려 주었다.
- 제가 하겠습니다.
빌은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아마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먼저 해 보기엔 불안해 보였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저런 힘이 있나 싶었으니까.
빌의 크고 투박한 손 위로 붉은색의 마석이 떨어졌다.
그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은은한 흰색 빛이 빌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빌은 손과 발을 살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마석을 살폈다.
“오늘은 1인분만 가져왔다. 그리고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야 하니 채혈도 한 번 더 해야겠군.”
나타니엘은 능숙하게 채혈을 해냈다.
그가 누군가를 챙기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마치 잘 키우던 고양이가 훌쩍 커서 제 길을 찾아 떠나는 느낌이다.
“뭐야, 그 눈빛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생각을 들키면 화를 낼 게 뻔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혹시 마물 모습으로 돌아와도 놀라지 말도록. 만약 바뀌면 시간은 기록해 두고,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예, 예!”
빌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나타니엘은 준비한 것들을 다 챙기고 마리와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곧 해답을 찾을 것 같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도록 해.”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마리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들을 도울 수 있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조용히 별장으로 돌아온 뒤 나타니엘은 연구를 위해 지하실에 처박혔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테레사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늘은 어느 지방 차예요?”
“캠프 지방에서 나는 다즐링이래요.”
역시나 지난번에 들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홍차였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막시밀리안은 다양한 종류의 차를 구해다 주고 있었다.
“이번 거는 어때요?”
“음, 좋긴 한데…….”
테레사는 묘한 표정을 짓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왜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뺨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먼저 제 취향이 뭔지 모르겠다고 화냈거든요. 그래서 막스가 도와주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에 마시던 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요.”
“아…….”
“노력해도 진짜 제 취향을 찾는 게 쉽지 않네요.”
테레사는 꽤 오랫동안 마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얼그레이만 마셨다.
막시밀리안이 선물해 줬기 때문이긴 했지만, 그 차를 선호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 그건 원래 테레사가 좋아하던 차 아니에요?”
“네?”
내 말에 놀란 듯 테레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테레사에게 해 준 몇 안 되는 착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황실에 초대받았을 때 기억나요?”
테레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아주 어릴 적이니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었다.
“한 열 살 때였는데…….”
“아! 기억났어요.”
“그때 언니가 맛있다고 한 걸 오라버니가 기억해서 매주 주문해서 주방에 갖다 줬던 거로 알거든요.”
테레사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찻잔을 매만졌다.
“막시밀리안이 자주 마셔서, 전 당연히…….”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막시밀리안에게 나쁜 방향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맞아요, 기억나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테레사가 중얼거렸다.
“전 당연히 막시밀리안이 처음에 좋아하던 건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했잖아요. 가만 보면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이던데요.”
“저희……가요?”
테레사는 정말 놀란 표정으로 날 보았다.
이제 당황스러운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음식이나 음료 취향도 그렇고, 향수나 꽃도 비슷한 종류를 좋아하잖아요.”
그녀는 정말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대체 이렇게 서로를 모를 수 있나 싶어 물었다.
“서로 취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그야, 막시밀리안은 늘 크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잖아요……. 저는 좀 소박한 것들을 좋아하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고 있는 막시밀리안의 취향과 너무 달랐다.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대체 어디서 저런 간극이 생겨난 걸까.
나는 원작에서의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오라버니도 원래 좀 작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건 소공작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많이 혼내셨거든요.”
나는 힐끗 테레사의 기색을 살폈다.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여튼, 마고 지방의 얼그레이는 테레사의 취향이 맞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테레사는 찻잔을 한참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나 봐요. 사실은 막스도, 저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씁쓸하게 웃는 테레사의 얼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주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 헤어진 사람들이 갖는 죄책감처럼 보였다.
단순히 애정이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취향을 나누며 비슷해졌다는 사실도 테레사를 자극한 걸까?
“굳이 오라버니에게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대로 두면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이 화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는 도저히 막시밀리안이 용서되지 않았다.
특히나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하고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건, 소중한 사람에게 해 줘야 할 당연한 일이에요. 오라버니는 테레사를 좋아하고 사랑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껴 주지는 않았다고 확신해요.”
단호한 내 말에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가 오라버니를 받아들이는 건 자유지만, 이런 관심은 원래 언니가 받았어야 했던 거예요.”
테레사는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함께해 와서 더 그런가 봐요. 원래는 서로 어떤지 다 아니까 평소와 조금만 다르면 신경 쓰이고 그러네요.”
“그럴수록 더 냉정해져야 한다니까요.”
더 단호하게 말했는데도 테레사는 웃기만 했다.
그때, 나는 멀리서 이곳을 힐끗거리는 막시밀리안을 발견했다.
다행히 예상보다 일찍 후회하고 테레사에게 매달린다고는 하지만…….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남몰래 그를 노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밀리아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에 바짝 긴장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후원하던 다이애나와의 일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가 오셨습니다.”
집무실 문 앞에 서자 시종장이 그녀의 방문을 고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열리자, 여전히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필립스가 보였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와 새파란 눈동자는 한때 사랑했던 모습 그대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부인, 어서 오시오.”
평소와 달리 부인이라 부르며 살갑게 구는 필립스의 반응에 그녀는 미간을 구겼다.
저렇게 대할 때는 항상 안 좋은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간단한 다과가 준비된 다음에도 오랜 침묵이 흘렀다.
“흐, 흠. 그간 잘 지냈소?”
그 무거운 침묵을 깨며 필립스가 물었다.
“네, 폐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냉랭한 대답에 몸을 움츠린 그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황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소.”
“말씀하시지요.”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필립스는 새삼스레 자신과 밀리아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애틋하게 매달려 오던 쪽은 밀리아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