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사랑스러운 집착 (91/145)


91화. 사랑스러운 집착
2022.12.14.



 
별장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오라버니와 테레사가 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내가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나타니엘이 꿈틀거리며 깼다.


“으…….”

어젯밤, 마리가 데려온 마물로 변한 사람들을 확인하느라 늦게 잠든 나타니엘의 컨디션이 안 좋았다.

이불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어, 깼어요? 좀 더 자도 되는데.”

“시끄러워…….”

“조용히 움직이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나는 손을 뻗어 투덜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나타니엘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주었다.

그러자 이불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민 나타니엘이 물었다.


“언제 온다고 했지?”

“음, 이따가 점심시간에 맞춰서 올 거라고 했어요. 두 시간 정도 남았고요.”

“그렇군.”

나타니엘은 겨우 침대 밖으로 나와 씻으러 사라졌다.

저 게으름뱅이가 어쩐 일로 먼저 나서는 거지?

어느새 옷까지 잘 차려입고 얌전히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는 나타니엘이 신기하기만 했다.


“왜 그렇게 기다려요?”

“소공작에게 빚진 게 있다.”

“빚이요?”

“응.”

무슨 빚인지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봤지만, 나타니엘은 입을 꾹 닫아 버렸다.


‘나중에 오라버니에게 물어봐야지.’

이쪽은 물어볼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이거야.

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타니엘을 지켜보고 있는데 시종이 문을 두들겼다.


“전하, 소공작과 그 약혼녀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심지어 나타니엘이 살짝 기쁜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혹시 뭔가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저 용용이가 남을 좋아할 사람이 아닌데.

1층으로 내려오자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테레사가 보였다.


“테레사!”

“비 전하.”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 보다가 고작 몇 주를 못 본 것뿐인데 너무 반가웠다.

그녀의 손을 덥석 잡자 테레사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엄청 즐거웠어요. 테레사도 분명 재밌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나와 나타니엘은 며칠 뒤에 떠나야 했지만,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은 여기서 더 지내기로 했다.

아무래도 공작성에 숨어든 마법사를 잡아낼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오라버니는 덤덤히 나타니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타니엘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와 인사를 나눴다.


“아직 점심 전이죠? 곧 준비가 끝나니 식당으로 오세요.”

하인들이 두 사람의 짐을 부지런히 날랐다.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나타니엘은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곧 옷을 갈아입었는지 가벼운 차림새의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히에라 지방 전통 음식을 재해석한 디시가 올라왔다.

독특한 풍미와 맛을 자랑하지만, 좀 더 대중적인 재료로 요리한 것이었다.


“정말 맛있는데요?”

마음에 들었는지 테레사는 요리사에게 음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우리는 신이 난 요리사의 설명을 들으며 식사를 했다.

요리사가 조금 지나칠 정도로 열의에 불탄 탓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테레사가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니까.’

나는 혹시 나타니엘이 불편해할까 살짝 눈치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길게 느껴졌던 코스가 끝나고 우리는 정원이 보이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뒤, 시종들에게 미리 일러둔 차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향긋한 차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 오늘은 다른 걸 마시네요?”

테레사의 잔 속을 보니, 평소 마시던 홍차보다 수(水)색이 더 짙었다.

내 물음에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다즐링이 마음에 들어서요.”

그러면서 테레사는 찻잎을 섞어 마시는 것에도 관심이 있다며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


“공작성에서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무도 없으니까 심심해할 줄 알았거든요.”

내 말에 테레사는 힐끗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 일인지 나타니엘이 막시밀리안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많이 신경 써 줘서 잘 지내고 있어요.”

“오라버니가요?”

웬일로 이런 예쁜 짓을 하는 거지?

혹시 죽을 때가 다가온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테레사는 내 반응에 놀라더니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그리고 중간중간 나타니엘과 막시밀리안을 곁눈질하며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오라버니가 자꾸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것을 소개해 주었다고 했다.

차와 같은 일상적인 소재부터 시작해서, 꽃이나 나무, 보석, 드레스까지.

온갖 것을 보여 주고 직접 체험하게 해 주고 있다는 거다.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래.’

막시밀리안의 손님 응대가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성이 보이긴 했다.

원작에서는 후회의 ‘ㅎ’ 자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내가 바라는 건 테레사의 행복이었다.

오라버니야 혼자서도 잘 먹고 잘살 놈인데 괜히 그녀에게 미련 갖고 질척거리는 건 아닐까?

나는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막시밀리안과 나타니엘을 훔쳐보았다.

자못 심각한 표정인 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뭔가 좀 다른데.’

얼핏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매일같이 나타니엘과 얼굴을 맞대는 내 눈에는 평소와 다른 점이 보였다.

묘하게 웃음기 어린 표정이라든지, 평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이라든지.


‘이따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식사 시간이 끝났다.

* * *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은 축제의 마지막 날임에도 별장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축제의 피날레인 풍등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나타니엘과 함께 나왔다.

우리는 히에라의 외곽에 흐르는 강으로 향했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 있었다.


“정말 많이 왔군.”

“윈터스 공작령에서는 거의 신년제급으로 유명한 축제예요. 자, 이쪽이에요.”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풍등 가게로 향했다.

긴 나무 가판 위에 온갖 모양의 풍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둥근 것부터 꽃이나 왕관, 동물 모양까지 참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용이었다.

길이가 1m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용에서부터 작은 새끼 용까지.


‘이쯤 되면 제국의 마스코트 아닌가.’

나는 살짝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어쩌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귀엽군.”

예상과 달리 그는 덤덤하게 고양이 모양 풍등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응.”

나타니엘이 고른 건 치즈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얼굴 옆에 풍등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묘하게 닮았다.”

“…….”

이걸 좋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나도 옆에 있는 새끼 용 풍등을 들었다. 나타니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예, 예. 제일 인기 있는 걸로 잘 고르셨습니다.”

풍채 좋은 아저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소원은 어디에서 쓰면 되죠?”

“이쪽에 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의 안내에 따라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원을 적고 있었다.

나는 새끼 용 옆구리에 빨간색 펜으로 소원을 적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

잠시나마 우리 가족에 테레사가 들어갈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반대편에는 무슨 소원을 쓸까 고민하던 중, 나타니엘이 심각한 얼굴로 풍등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그래요?”

“뭘 빌어야 하지?”

순간 그의 물음에 말이 막혔다.


“음. 뭔가 이렇게 되길 바란다든가, 그런 거 없나요?”

“흐음.”

나타니엘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고백했다.


“여태 원했던 걸 얻어 보지 못한 적이 없는걸.”

“…….”

이 사람이 제국 서열 2위라는 걸 깜빡했다.

나는 짜증이 올라오려는 걸 참고 내가 쓴 걸 보여 주었다.


“그럼 저처럼 앞으로 누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쓰는 건 어때요?”

“제이나, 튼튼해 보여.”

한 대 칠 수도 없고 이걸 어쩐다.

우리가 한참을 펜을 든 채 고민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표정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럼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걸 써요.”

나타니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렸다.

그는 내 걸 계속 보면서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나는 풍등 빈 곳에 다른 문구를 적어 내리고 물었다.


“다 썼어요?”

그러자 나타니엘은 다 썼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와 선착장으로 향했다.

소원을 고민하던 사이에 다들 배를 탔는지 생각보다 줄이 짧았다.


“지금 배 빌릴 수 있나요?”

“예, 여기에 타시면 됩니다.”

우아한 모양의 검은색 배 안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화려해 보였다.

배의 한쪽 끝에는 작은 랜턴이 걸려 있었다.


“남자분이 노를 저으시면 됩니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배 주인은 우리 배를 툭 쳐서 강물로 밀어 넣었다.

두둥실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배가 강 가운데로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타니엘은 주변을 살피더니 노를 잡았다.


“그냥 마법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다들 이걸 움직이는데?”

그러고는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들과 비슷하게 제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수면 위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오렌지빛과 푸른빛이 뒤섞였던 강물이 조금씩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멈춰 봐요.”

적당한 자리를 잡고 배를 멈췄다. 나는 배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며 풍등을 들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돼요.”

우리는 배 앞에 걸린 등에서 양초를 꺼내 풍등에 불을 붙였다.

밝게 빛나는 풍등을 놓자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새까만 하늘 위로 갖은 모양의 풍등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빛이라고는 희미한 별빛이 다인 밤하늘에서, 수백 개의 풍등이 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다.


 


‘이곳에서 내가 만난 모두가 행복하길.’

나는 높이 올라가는 풍등을 보며 기도를 드렸다.

내가 사랑했던 이야기 속 사람들은 이제 내 가족과 친구였다.

그리고 전생의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자 나타니엘이 물끄러미 날 보고 있었다.


“무슨 기도를 했어?”

“음, 나타니엘이랑 저,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게 해 달라고요.”

나타니엘은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나타니엘이 눈을 반짝 뜨고는 날 빤히 보았다.

마치 뭐라고 기도했는지 물어보라는 것처럼.


“뭐라고 기도했어요?”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살짝 고민하더니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평소보다 더 달짝지근한 향기가 전신을 뒤덮었다.


“그대가 나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나는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