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안녕이라는 말 대신 (90/145)


90화. 안녕이라는 말 대신
2022.12.10.



 
테레사와 헤어지고 집무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막시밀리안은 이상하게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를 데이먼이 불렀다.


“소공작님.”

“어, 어?”

데이먼의 부름에 막시밀리안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요즘 들어 데이먼이 테레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데이먼은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보고가 급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보안 문제에 관해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보고에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구겼다.

공작성은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기에 테레사를 데려온 것인데 보안에 구멍이 뚫렸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도록.”

평소보다 낮은 소공작의 어조에 데이먼은 몸이 굳었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협력한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안쪽에서 결계의 일부를 파손했다가 다시 수복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성 내부에 마법사가 있다고.”

마법사는 숫자도 적은 고급 인력이었다.

그런 마법사가 별 이유 없이 사람 하나를 들일 리가 없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쫓아왔군.’

골치 아픈 일이었다.

내부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이 커다란 성에서 테레사를 지키는 것은 오히려 어려울 수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두 분께서 비 전하가 계신 히에라에 잠시 갔다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히에라에?”

“예. 그 사이에 저와 킬리언 경이 첩자를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현재로서 디에스 기사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태자와 킬리언 정도였다.


“그러도록 하지.”

데이먼은 순순히 그러겠다 하는 막시밀리안에게 살짝 놀랐다.

그 자존심 강한 남자가 약혼녀의 안전을 위해 부하의 의견을 따르겠다니.


‘정말 진심이신가?’

데이먼의 궁금증을 모르는 듯, 막시밀리안은 곧바로 제이나에게 편지를 썼다.

듣자 하니 테레사에게 놀러 오라고 했다니,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지런히 펜대를 움직이며 막시밀리안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요즘 테레사가 몸도 안 좋은데 마차를 또 타야 하니 걱정이라…….”

“…….”

성에서 히에라까지는 고작 세 시간 정도만 달리면 되었다.

그걸 걱정하는 막시밀리안이 정말 새로워 보였다.


‘저렇게 좋아하면서 대체 왜 전에는 그런 거지?’

데이먼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방법이 있는가, 그저 모르는 척 넘어가는 수밖에.


‘사랑싸움에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지.’

앞으로 잘하면 조금이라도 과거를 만회할 기회가 있겠지, 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 *

다이애나를 지하에 가둬 두자 좀 마음이 편안해졌다.

손톱 옆에 남은 거스러미를 깔끔하게 떼어 낸 기분이다.

덕분에 나타니엘과 남은 축제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타니엘은 축제에 푹 빠져들었다.


“소공작이?”

“네. 아마 내일 오후에 도착할 거예요.”

축제의 피날레를 앞두고, 오라버니가 테레사와 함께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이애나와 어머니를 빨리 치워 버려야죠.”

“흐음. 그로반 영애야 반역자로 마차에 태워 보내면 되지만, 그대의 어머니는 좀…….”

나타니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실리아는 그날 이후 아프다는 핑계로 누워서 자꾸만 크라비로 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그동안 봐주고 있었지만, 더는 눈감아 줄 수 없었다.


“나타니엘은 다이애나를 보내요. 전, 어머니를 해치울게요.”

나타니엘이 침실을 나가자 나는 1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세실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신가요.”

머리가 아프다느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느니 하더니 아주 팔팔해 보였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제 아주 멀쩡해 보이는군.”

“아……. 그럼요. 이제 그만 내려가 봐야죠.”

그렇게 말한 세실리아가 침대에서 내려오며 바닥에 툭 쓰러졌다.

뒤에 있던 하녀가 재빨리 달려와 그녀를 안아 다시 침대에 앉혔다.


“왜 이러지?”

청순가련한 외모 덕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하녀들을 구워삶은 것인지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내보냈다.

방 안에는 세실리아와 나, 단둘이 남았다.


“솔직히 말할게요. 오라버니가 여기로 올 거예요.”

“마, 막스가?”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원작에서 막시밀리안은 어머니에게 양가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사랑받기를 원했다.

세실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막시밀리안을 멋대로 휘둘렀다.


“어머니가 왜 여기에 왔는지, 그 비앙카라는 여자를 왜 데려왔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 대답에 세실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난 그냥 내 자식들을 보고 싶어서…….”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조차 모르고 있던 분노가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당신은 우리 어머니잖아!”

움찔 몸을 떠는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한번 끓어 오른 분노는 거대한 불길이 되어 전신을 휩쓸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으면서, 돈이 떨어지니까 이제야 우릴 찾아온다고요? 그것도 소개해 주고 싶다며 여자를 옆에 끼고?”

“나, 난 아무 생각 없이 데려온 것뿐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정말 다른 의도 없었어.”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에 기도 안 찼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사기꾼의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어설픈 변명은 그만두세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저나 오라버니나 더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실리아는, 어머니는 이렇게 나와 막시밀리안을 이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별거 중에도 우릴 이용해 윈터스 공작가의 돈을 빼돌렸고, 이혼 후에도 몇 번인가 시도하다가 아버지에게 걸리기도 했다.


“그저 이용할 대상이었지, 단 한 번도 우릴 사랑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이제 와서 어머니인 척하지 말아요. 역겨우니까.”

세실리아는 몸을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손을 높이 들자 내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곧 세실리아는 손을 다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 몸에 작은 상처라도 생긴다면 그녀는 죄수가 되어 다이애나 옆자리에 앉아야 했다.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 보답으로 크라비에서의 생활비와 체류비를 내주겠다는 거야. 그것도 받고 싶지 않다면 이 히에라 바닥에서 구르든가.”

세실리아는 뺨을 붉히더니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어리지도, 그녀보다 약하지도 않은 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요.”

“…….”

“다시는 보지 말아요, 우리.”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문을 열고 나왔다.


“레이디 데메테르가 떠날 터이니 도와드리거라.”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은 몸을 숙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반항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세실리아는 조용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간 나는 복도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나타니엘과 마주쳤다.


“다이애나는요?”

“호송 마차에 실어 보냈다.”

“하아…….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드디어 보내네요.”

그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향했다.

긴 소파에 털썩 앉자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 아이스 티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단숨에 반을 마셨다.


“진짜 속이 다 시원해요.”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나타니엘은 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정말 그게 단가?”

“……!”

무심한 그의 말에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지금 상황에 몰입한 탓에 남아 있던 감정들이었다.


“어머니는 날 한 번도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어그러졌던 기억은 하나의 선이 되어 갔다.


“나와 오라버니를 이용해서 공작가의 돈을 뜯어내려고만 했어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가끔 때리기도 했고…….”

그럼에도 어린 제이나와 막시밀리안은 그녀의 사랑을 원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랬다.

나타니엘이 어머니에게 상처받으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원했듯, 나와 막시밀리안도 그랬다.

아아.

그 순간, 내가 이 세계에 끌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책 속이라고 믿었던 세계는 내 과거였다.

한 번의 생이 끝나고, 지구에 살았다가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괜찮다.”

“알아요. 이제는 어머니가 저에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리고 나도 있고.”

그의 말에 충동적으로 나타니엘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울고 소리치고 싶다면 그래도 돼.”

그의 말이 시발점이 되어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간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타니엘은 오랫동안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과거의 내 상처를 다독여 주는 것처럼.

나는 한참을 울다가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 *



“다이애나를 잡았다고?”

“예.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잡으셨다고 합니다. 곧 황성에 도착할 텐데 어찌할까요.”

시종장의 말에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다이애나는 재밌고 신비로운 여자였지만, 이제 와서 더 두고 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즉결 처리 하도록.”

“예, 폐하.”

시종장을 돌려보내고 필립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리해서 신년제를 미룬 탓에 어느새 눈이 녹고 나뭇가지에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인가…….”

황제는 요즘 유난히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중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나타니엘을 걱정하던 제이나의 모습이었다.

둘이 어찌나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그는 아들 부부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꼈다.

자신도 한때 사랑에 목매고, 사랑에 울고 웃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껏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결국 남는 건 가족뿐인가.’

필립스는 벽에 걸려 있는 가족 초상화를 보았다.

10년도 전, 밀리아가 황후 자리에 오른 기념으로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 속에서 그와 밀리아, 그리고 어린 나타니엘과 아나이스의 모습은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다.

그동안 일에 치여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타니엘이 용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그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천천히 초상화 앞에 섰다.


“아직 헨리가 어리지.”

이제 황제로서가 아니라, 남들과 같은 진짜 가족을 갖고 싶어졌다.

아나이스를 좋은 남자에게 시집보내고, 헨리가 커 가는 모습을 밀리아와 지켜보고 싶었다.

필립스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위할 때가 온 거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그림 속의 밀리아를 살짝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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